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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화: 디오지크)너의 일상이 되기를
Caption 멸자님의 낙원의 사람을 읽고 감명을 받아 쓰고 있습니다. 제 글은 어디까지나 팬창작이므로 멸자님의 방향성이나 묘사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저는 3차입니다). 늘 멋진 글 감사합니다! 낙원의 사람 바로가기 I~IV V~VII VIII~XI XII~XV 지크하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자는 줄 알고 뒤돌아 나가려던 디오는, 뒤늦게 그와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로 반 바퀴를 돌았다. 지크하트가 고개도 들지 않고 픽 웃었다. “뭐 하냐.” “…자는 줄 알았다.” “그렇다고 그렇게 칼 같이 나가?” 그럼 자는 내내 곁에 있어도 된다는 뜻인가. 디오는 문득 낙원 밖에서 그와 함께 지냈던 때를 떠올렸다. 처음엔 잠드는 기색도 안 보이거나 까닥하면 저를 죽일 뻔하더니, 익숙해진 뒤에는 방을 나눠놔도 자연스럽게 제 침대까지 찾아왔었더랬지. 디오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지크하트는 눈만 깜빡일 뿐 옆으로 돌아누운 몸을 일으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꾸물거리며 웅크리더니, 제 머리맡에 사람 하나 앉을 공간을 남겨두었다. 디오는 구태여 확인하지 않고 그곳에 자연스레 걸터앉았다. 그러나 지크하트가 그의 팔 아래 파고들어 무릎에 고개를 올려놓았을 땐 눈썹을 꿈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건가.” “침대 빌려준 값 정산중.” “앉기만 한 걸 빌렸다고 할 수 있나.” “그럼 눕든가.” 디오는 대꾸를 포기했다. 지크하트가 정면으로 돌아누웠다. 그의 시선이 얼굴을 훑듯이 움직인다고 생각한 찰나, 지크하트의 손이 디오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귀 밑으로 길게 기른 머리칼이 하얗고 긴 손가락에 실처럼 걸리다 미끄러졌다. 디오는 재차 바깥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크하트에게 처음으로 가족 이야기를 했던 때도 이러했던가. 그때는 침대가 아닌 아래에 앉아 있었던 디오였지만,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만으로도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너 그때 가족 얘기했던 거.” 지크하트도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디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였다.” 지크하트가 다시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게 진실이 나오는 마법 지푸라기 같은 거였나보다.” “실례군. 매일 관리하고 있다.” 지크하트는 마지막 말은 자연스럽게 무시했다. 머리카락의 결을 감상하던 손끝이 느리게 그 위를 덧그렸다. 미끄러지듯 옆으로 빠져나가는 손가락에 머리카락이 아쉽다는 듯 휘감겼다. “그동안 거짓말만 했으면서. 왜 그때만 얘기해줄 생각이 들었냐?” “너에게서 진실을 너무 많이 들어서…” 죄책감이라도 느꼈나. 별 기대 없이 시큰둥하게 눈을 꿈뻑이던 지크하트는, 이어지는 말에 실소했다. “나에 대한 것도 말하고 싶었다.” “……이런 성격으로 거짓말은 어떻게 했나 몰라.” 어차피 자신이 떠난 뒤엔, 지크하트가 모든 걸 거짓이라고 여겨도 상관없었다. 전부 잊었대도 납득했을 터였다. 그가 낙원과 상관없이, 쫓기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럼에도 디오는 어쩐지 그가 그날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럼 내가 알려준 게 더 많으니까 앞으로는 진실만 얘기해야겠네. 그치?” “여기에서는 숨긴 적 없다.” “누가 몰라.” 삐딱하게 얘기하면서도 지크하트는 여전히 디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디오는 문득 그가 아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진실이 나오는 마법 지푸라기. “더는 숨기지 않을 거다.” “…….” 만지작거리던 손이 멈추었다. 마주한 은빛 눈동자는 담담해보였지만, 일순 스쳐간 반짝임이 너무나도 또렷했다. 디오는 다문 입술에 힘을 주었다. 희망을 믿는 자에게는 그만큼의 보답이 주어져야 한다. 너의 그 꿈을, 그 신뢰를 내가 이뤄주고 싶다. 내가 깨트린 것보다 더 많이. 네가 그간 받았던 만큼. 네가 머무는 곳이 언젠가 이 낙원보다 찬란해질 거라는 꿈을 꿀 수 있게. “안 믿어.” 퉁명스레 말하면서도 지크하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느슨하게 구부러진 손가락에 휘감긴 자홍색의 머리카락이 레이어드 반지 같았다. 디오는 피식 웃었다. 그가 안심할 때까지, 몇 번이고 들려줄 작정이었다. 믿고 싶어하는 마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럼 계속 만지고 있어라.” “…왜.” “진실이 나오는 마법의 지푸라기라며.” 이 마법이 너의 일상이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