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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화: 디오지크)발아
Caption 멸자님의 낙원의 사람 을 읽고 감명을 받아 쓰고 있습니다. 제 글은 어디까지나 팬창작이므로 멸자님의 방향성이나 묘사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저는 3차입니다). 늘 멋진 글 감사합니다! 디오가 실로 오랜만에 그를 떠올린 날이었다. 그가 그립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디오는 그 기억이 자칫 입 밖으로 나올까 하여 필사적으로 바쁘게 살았다. 다행히도 낙원은 디오의 변명을 수상쩍게 여기지 않았다. 디오에게 주어졌던 계획은 다른 방향으로 수정되었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중에 디오는 입가에 맴도는 씁쓸함을 꾸역꾸역 씹어삼켰다. 그래도 저를 만났으니 지크하트도 이제 사람들을 더 자주 경계할 테고, 같은 방식으로는 그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으리라. 그것만이 디오를 연구에 전념케 하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도 마찬가지겠지. 디오는 의자를 한껏 젖혀 눕듯이 앉은 채로 멍하니 생각했다. 모처럼 연구실엔 사람도 없어, 디오는 어린 아이가 제 보물을 넣어둔 상자를 몰래 열듯 지난 기억을 떠올려보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지낼까. 낙원에서의 지크하트에 대한 무소식은 희소식이었다. 그는 디오가 계획한 대로 들키지 않았고, 아마 그 뒤로 낙원과 접촉할 일 없는 곳으로 옮겨갔을 가능성이 컸다. 그 뒤로는, 하던 것처럼 생존자를 살피고 감염체들과 싸우고. 그에게 보여줬던 것과 같은 일상을 살아갈 터다. 가끔은 고장난 전자음만 들리는 낡은 티비를 벗 삼아 곁에 두고… 허나 거기까지 떠올리고 나면 디오는 제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은빛 눈동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관련된 모든 것을 제 탓이라 여기던 그였다. 들끓는 원망 대신 슬픔과 공허로 젖어가던 그 색채가, 맥없이 감기던 눈커풀과 무거운 속눈썹이 어른거리면 심장 한켠이 으깨진 듯 뻐근해지는 것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디오는 습관처럼 손을 들어 길게 내려온 옆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익숙한 마찰음이 안정제처럼 그가 그리워하는 빛깔을 뇌리에서 길어올렸다. 기대하지 않는다던 그의 눈, 무한한 그리움과 회한, 그럼에도 언젠가 보았던 기쁨 한 조각을 잊지 못하고 일렁거리던 찬란한 은색을. 무심코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살아갈 것이다. 상처 입고 주저앉을지라도 다시 일어나 걷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디오의 판단이 어긋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 걸음이 닿는 곳이 디오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못한 것. “디오!!” 동료 연구원이 급하게 들이닥쳤다. 난데없는 소란에 잠깐 미간이 찌푸려졌던 것도 잠시, 디오는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듣고 정신없이 연구실을 뛰쳐나갔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누군가의 사칭인가? 허나 그렇다면, 지크하트라는 이름을 댄 자는 왜 그를 찾고 있는가? 코너를 뛰어 돌아가는 디오의 머릿속은 고장난 티비처럼 잡음만이 가득했다. 디오가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움켜쥐고 도착했을 무렵엔, 이미 그는 양손을 결박당한 몰골로 무릎 꿇려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디오는 재차 생각했다. 하도 문질러 붉게 짓무른 퀭한 눈가며 부르튼 입술, 하얗게 튼 뺨이 시야에 들어올 적마다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는 듯했다. 이런 걸 바랐던 게 아니다. 이런 재회도 원하지 않았다. 그저 언젠가 보여주었던 눈이 새로운 경치를 담는 걸 보고 싶었다. 닳고 닳아 광채조차 남지 않게 된, 재를 긁어모은 듯한 눈동자로 이런 곳에서 마주치기를 원한 적은. 맹세컨대 이름을 읊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때에도 바란 적이 없었는데. “안녕.” 쌀쌀맞은 인사가 귓가를 때렸다. “거짓말쟁이.” 낙원이 한 귀퉁이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