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ption
멸자님의 낙원의 사람 을 읽고 감명을 받아 쓰고 있습니다.
제 글은 어디까지나 팬창작이므로 멸자님의 방향성이나 묘사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저는 3차입니다).
늘 멋진 글 감사합니다!
커플링 요소는 없지만 본편의 소설이 디오지크인 만큼 제목에 커플링을 표시해두었습니다.
살인, 시체, 부상의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낙원의 사람 바로가기
I~IV
V~VII
VIII~XI
XII~XV
"잘 들어, 에르크나드."
그레이엄이 반쯤 부서진 머리를 가리켰다. 아직 빛을 잃지 않은 은색의 눈동자는 경악과 공포가 섞인 눈으로 그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제만 해도 지크하트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동료는 입을 벌린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전, 제 관자놀이를 찢고 나오는 통증에 괴로워하다가 그를 덮치려고 덤벼들었던 감염자의 최후이기도 했다. 새카맣게 죽은 피가 행여나 지크하트에게 닿지 않도록 그레이엄은 아껴두었던 외투를 던져 혈흔을 덮었다.
"머리를 노리는 거야. 심장은 빗나갈 확률이 높아. 인간은 장기만 손상되어도 치명상이지만 이것들은 달라."
그레이엄은 죽은 동료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지크하트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그레이엄을 향해 돌아갔다. 비난인지 충격인지 모를 시선에도 그레이엄은 담담한 낯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디를 노려야 할지 모르면 눈을 노려라. 설령 죽이지 못하더라도 시간은 벌 수 있어. 징후가 보이면 그땐 늦은 거야. 망설이지 마. 멈춘 순간 다음은 없다."
말을 마친 그레이엄이 버려진 짐을 뒤적거렸다. 남은 거라곤 생수 한 병과 만일을 위해 챙겨두었던 비상용 나이프가 전부였다. 작은 포켓 하나까지 전부 열어본 그레이엄이 빈 가방을 내려두곤 지크하트에게 다가섰다. 아직 애티가 남아 있는 소년은 이제 더는 움직이지 않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가자."
그레이엄이 지크하트의 어깨를 당겨 일으켜 세웠다. 제 다리에 매어두었던 벨트를 풀어 그의 다리에 둘러 나이프를 고정시켜주자 지크하트의 손이 느리게 움찔거렸다.
"…그레이엄이 가져. 난 못,"
"해야 해."
쉬고 탁해진 목소리가 끊겼다.
"네가 죽여야 해."
목적어가 없어도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세차게 일렁거리는 은안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레이엄이 발을 돌렸다.
"난…"
옷자락이 당겨졌다. 이럴 시간이 없다고 냉정하게 내뱉으려던 말은 지크하트와 재차 눈이 마주친 순간 먼지처럼 흩어졌다. 지크하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그래도 함께 살았으면 좋겠어."
"……."
"함께 살아서… 밖으로 나가면 되잖아… 그레이엄만이라도…"
지크하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잘게 떨리는 흑발 새로 보이는 뺨이 축축히 젖어가고 있었다. 그레이엄은 본디 지크하트에게 매정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었던 모두가 그러했다. 가장 어린 아이. 가족을 모두 잃었어도 정이 많고 외로움을 잘 타는 아이. 목숨과 맞바꾸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낙원'은 그렇게 무르고 작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낮은 숨과 함께 돌아선 그레이엄이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옷자락을 빼낸 손이 초라하게 오므라든 순간, 그레이엄이 그 안에 조그만 무언가를 밀어넣었다. 포장지에 싸인 조그만 다크초콜릿이었다.
"나도 네가 살았으면 좋겠다."
지크하트는 손에 쥐어진 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레이엄이 앞장서서 발을 옮겼다. 소리도 없이 걷는 그의 기척은 금방이라도 지크하트를 두고 사라져버릴 것처럼 옅고 가벼웠다.
지크하트는 초콜릿을 주머니에 꾹 밀어넣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가르침을 실전으로 옮기는 데에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지크하트는 자신이 감염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뜯겨나갈 것처럼 아픈 옆구리에서 흐르는 뜨겁고 축축한 피도, 점차 밝아지는 시야도 기이하게 또렷하고 생생했다. 반쯤 부서진 두개골을 내려다보던 지크하트가 천천히 피에 젖은 손을 올려 제 머리를 매만졌다. 결 좋은 흑발이 무겁게 젖어 달라붙은 살갗에 돌출된 부위는 만져지지 않았다. 불거진 혈관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마치 죽어서 움직이지 않는 그레이엄처럼.
입이 벌렸다, 닫힌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삶의 고통을 헤아려보듯, 제 상처를 쑤시던 손가락이 느리게 멈추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소년이 그의 눈을 관통한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더러워진 칼날을 그레이엄의 옷에 문질러 닦는 소년의 눈동자는 이제 빛이 없는 어둡고 칙칙한 잿빛이었다. 낡은 천을 찢고 나온 날붙이가 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죽어간 동료들의 것과 다른, 동그랗게 반짝거리는 붉은 방울이 땅에 꽃잎처럼 떨어졌다.
소년이 일어선다. 피가 아직 흐르는 손으로 지크하트는 주머니를 뒤졌다. 그레이엄이 주었던 초콜릿이 잡혔다. 은박지를 벗겨낸 지크하트가 그것을 입에 넣었다. 달고도 비린 맛이었다. 그것을 오래도록 녹여먹으며 지크하트는 걷기 시작했다. 그레이엄이 알려준 탈출구의 끝이 코앞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