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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자님의 낙원의 사람 을 읽고 감명을 받아 쓰고 있습니다.
제 글은 어디까지나 팬창작이므로 멸자님의 방향성이나 묘사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저는 3차입니다).
늘 멋진 글 감사합니다!
해당 글은 낙원의 사람 본편 이후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낙원의 사람 바로가기
I~IV
V~VII
VIII~XI
XII~XV
“지크하트 씨 소개시켜주실 수 있을까요?”
디오는 가운을 벗다 만 모양새로 꽤 오래도록 정지해 있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먼저 말을 꺼낸 상대는 디오의 변화를 아직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열린 연구실 문 너머에 서 있는 자를 흘긋흘긋 곁눈질하던 청년이 뺨을 수줍게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지크하트 씨랑 친해지고 싶어서요. 듣자하니 성격도 좋으시다던데. 얼굴이야 말할 것도 없고…”
“…….”
“버닝캐니언 씨가 그분과 제일 친하다고 들었어요. 저, 여기 오기 전부터 지크하트 씨가 좀 궁금했거든요.”
“…….”
“아아, 물론 실험체라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낙원을 구한 은인이신데다가, 뭐랄까… 정말 ‘영웅’ 같잖아요. 붙임성도 좋으시고, 말도 잘 들어주시고. 사실 슬쩍 인사는 드려봤거든요. 그랬더니 두 번만에 제 이름을 기억해주셔서 얼마나 감동했는지…”
그때를 떠올리며,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눈가가 촉촉해지던 청년이 그제야 디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디오는 아직도 가운을 팔에 어정쩡하게 걸친 그대로 목석처럼 서 있었다. 느리게 꿈뻑인 눈은 평온하고, 다물린 입술도 숨 하나 새지 않고 조용하기만 했다. 그래서 연구원은 지크하트를 향한 제 사랑이 잘 전달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작게 헛기침하며 몸을 가다듬은 그가 다시금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저, 버닝캐니언 씨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낙원의 연구원으로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예전엔 치료제 관련으로도 논문 하나를—”
“디오. 가자.”
지크하트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청년은 너무 펄쩍 뛴 나머지 하마터면 연구실 천장을 뚫고 나갈 뻔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지크하트가 말을 끊어서 미안하다는 듯 살짝 목례했다. 입을 붕어처럼 뻐끔거리는 청년의 뒷목이 찜질이라도 한 양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럼 이만.”
“네, 네에!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청년이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가운을 벗어 의자에 대강 걸쳐놓은 디오가 연구실을 나갔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한참 멀어지고 난 후에도, 사랑에 빠진 가엾은 청년은 지크하트를 소개시켜달라는 말에 디오가 대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지막 인사도 연구실을 제 방처럼 나서던 지크하트의 것이었다는 것도.
구석에 놓인 가습기가 한숨을 내쉬듯 하얀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디오는 그 뒤로도 말이 없었다. 지크하트와 집에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고, 조금 늦은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그의 입은 봉인되어 있었다. 끓인 물이 식을 때까지, 잠시 식탁에 기대어 턱을 괴고 있던 지크하트가 먼저 그를 불렀다.
“디오.”
고개를 삐걱대며 돌린 디오가 그와 눈을 마주했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어디 아파? 아니면 아까 걔가 이상한 말했냐?”
“…….”
“가운도 대충 벗어두고 말이야. 나한테 못할 이야기야?”
찻주전자에 물이 채워지고, 이내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잔에 진한 다홍색의 찻물이 향기를 뽐내며 내려앉았다. 지크하트가 그걸 들고 와 제 앞에 놓아주는 동안에도, 말을 잊은 것처럼 한 마디도 않던 디오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에르크나드.”
“말해. 듣고 있어.”
“네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
지크하트가 찻잔을 들어올리며 픽 웃었다.
“뭐 지금은 아니라는 것처럼 얘기한다? 그게 그렇게 무게 잡고 말할 일이야?”
“…….”
“그러니까 무슨 고백이라도 하는 것 같잖아.”
“……….”
디오는 말없이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실 때만 해도 태연했던 지크하트의 눈이 조금씩 동그래졌다. 침묵이 길어졌다. 이미 충분히 식힌 차의 김이 멋쩍게 옅어져가고 있었다.
지크하트가 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방으로 향하는 그를 보며 디오가 덩달아 엉거주춤 일어섰다.
“에르,”
“잘래.”
문이 닫혔다. 널찍한 거실에 덩그러니 놓인 디오를 남겨진 홍차 두 잔이 속닥대며 바라보고 있었다.
지크하트는 잘 생각이 손톱 만큼도 없었다. 그것을 침대에 주섬주섬 눕고 나서 삼십 분은 족히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어두컴컴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지크하트는 눈을 깜빡였다. 말을 잃는 증상이 디오에게서 그에게로 옮겨온 모양이었다. 문득 지크하트가 제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은 없었다. 숨도 평온했고 왼쪽 가슴을 더듬어보면 박동도 다를 것 없이 정상이었다. 지크하트의 눈이 그제야 진지해지며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거 미친 놈인가.
대상은 당연하게도 지크하트 본인이었다.
보통 이런 고백을 들으면 가슴 터질 듯이 설레고 기뻐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사람도 아닌 디오인데? 하다못해 간질간질한 뭐라도 있어야 하잖아. 화…가 나는 건 좀 이상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담담한 거 아냐? 심장이 너무 잔잔한데? 혹시 죽었나? 아까 너무 좋아서? 지크하트는 팔짱까지 끼고 한참을 고민했다. 얼마나 심각했는지 미간에 골이 깊게 패여 있었다.
—아니 근데, 이미 내 옆엔 늘 디오만 있었잖아.
디오 옆에도 나만 있지 않았나?
그거면 됐지. 뭐 미칠 듯이 두근두근해야만 사랑인가……
“……!!”
지크하트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고민이 이제야 또렷하게 보였다. 그는 자신이 디오를 사랑하지 않을 리 없다는 확신을 구태여 더듬어보고 있었다. 이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그걸로도 만족하여 몇 번이고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는 것처럼. 디오가 새삼 소리를 내어 둘의 관계를 말로 들려주었듯이. 지크하트는 침대를 박차고 나가 문을 열어젖혔다.
계단을 요란하게 밟아내려가면 디오는 티브이도 켜지 않고 앉아 있었다. 지크하트만 조금 맛보고 두고 간 차도 그대로였다. 디오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소리없이 얽혔다.
“생각 좀 해봤는데.”
먼저 입을 연 건 지크하트였다.
“기념일은 내가 이 집에 온 날도 하자. 그게 맞아.”
줄곧 차분하던 자홍색의 눈이 이윽고 점차 커다래졌다. 지크하트가 덧붙였다.
“오늘도 챙기고.”
“…….”
“할 말 다했으니까 잔다. 너도 일찍 들어와. 졸려.”
제 할 말만 늘어놓은 지크하트는 대답도 안 기다리고 몸을 돌렸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곧장 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로 끝났다. 계단과 가장 가까운 문이었다.
디오가 튕겨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계단을 달려올라가는 뒷모습을, 아직 옅은 김이 피어오르는 찻 잔 두 개가 나란히 배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