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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화: 디오지크)낯선 익숙함
Caption 멸자님의 낙원의 사람 을 읽고 감명을 받아 쓰고 있습니다. 제 글은 어디까지나 팬창작이므로 멸자님의 방향성이나 묘사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저는 3차입니다). 늘 멋진 글 감사합니다 낙원의 사람 바로가기 I~IV V~VII VIII~XI XII~XV 소란과 비상의 차이를 꼽으라면, 후자엔 죽음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지크하트는 일찍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비명도 내지 못하고 달려나가는 사람들과, 동료나 가족을 찾는 필사적인 외침, 먼저 죽어가는 유리와 시멘트의 파열음마저도 처절하고 두려운 시간이었다. 과거의 그 날에 그러했듯 지크하트는 피묻은 맨발로 정신없이 긴 복도를 내달렸다. 주저앉은 이를 일으켜세우고 부상자를 업는 등을 밀어준다. 머릿속에서 모든 걸 잃은 지크하트가 울부짖고 있었다. 도망쳐! 제발! 죽지 말아줘!!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비명과 절규가 침묵으로 바뀌지 않기를, 걸어온 모든 길에 핏자국을 그리며 지크하트는 그저 빌고 또 빌었다. “—아,” 제 위기보다 다급한 것을 떠올린 건 그때였다. 보이지 않았다. 보안 알람이 오작동을 일으킨 날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그를 안아주고 안심시켜주던 사람이. 쿵 내려앉은 심장에서 공포가 역류하여 혈관을 뒤덮었다. 이미 발에 채이는 시체를 네 개는 족히 넘은 뒤였다. 넘어질 듯 휘청거리던 다리가 다급히 방향을 틀어 움직였다. 비관적인 상상을 할 틈도 없었다. 그의 이름 한 번 되뇌기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낯익은 코너를 돌며 내팽개쳐진 선반에서 메스를 본능적으로 찾아 움켜쥐었다. “으아아아악!!” 괴로움에 뒤틀린 비명이 울려퍼졌다. 지크하트에게 소름끼칠 만큼 익숙한 소리였다. 감염체다. 소리를 찾아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면 이미 눈을 뒤집은 청년이 손발을 덜덜 떨며 발작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그와 나눴던 시시콜콜한 대화를 떠올리기도 전에 손이 먼저 튀어나갔다. 그의 미간에 정통으로 꽂힌 메스가 뽑혀나가자 검게 물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죄책감보다 다급한 마음이 앞섰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외침이 절박하게 터져나왔다. “디오! 어디 있어!! 대답—” 피 묻은 발에 무언가 밟혔다. 얇고 버석거리는 은박지였다. 머리보다 먼저 반응한 몸이 우뚝 멈춰 섰다. 크게 뜨인 눈이 붉게 얼룩진 그것을 더듬듯이 헤매었다. 폐에 못이 박힌 것처럼 호흡이 어렵고 목구멍에서는 비린 쇠맛이 났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가장 조용하고 단정한 곳. 그가 아끼는 것들로 장식해놓은 곳. 이 아비규환과는 절대로 거리가 먼, 행복을 배양하는 다정한 장소에 있었어야 했는데.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면 그의 외침에 반응해 비틀대면서 일어나는 자가 보였다. 옆구리가 온통 붉고 내딛는 걸음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귀 양 옆으로 내려온 자홍빛의 머리카락이 촛불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 벌어진 입에서는 부상자의 신음이 아닌 짐승이 목을 긁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지크하트는 깨달았다. 제가 또 한 번 늦었음을.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 ……알고 있는데. 이미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다. 지크하트는 아직 손에 메스를 쥐고 있었다. 지크하트를 향해 다가오는 디오의 발이 점차 빨라졌다. 그순간 지크하트는 제가 처음으로 찔렀던 남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레이엄. 차라리 그때 내가 죽었더라면. 하다못해 너를 곧장 죽이지 않았더라면. 네가 무슨 말을 하든 그 이빨을 두들겨 으깨놓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희망에 목숨을 걸었더라면. 후회는 찰나의 망설임 같았으나 제게 달려드는 디오를 비치는 눈은 이제 동요하지 않았다. 두 팔을 벌린 지크하트가 디오를 와락 받아안았다. 메스는 진작에 떨어트린지 오래였다. 어깨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인간이 무는 것보다 열 배는 더 아프다. 비명도 나오지 못하는 입에선 끊긴 숨만이 각혈처럼 새어나왔다. 그의 등을 찢을 듯이 긁어대는 손톱과 목덜미를 씹어대는 이빨이 축축하고 뜨거웠다. 실로 오랜만에 짙은 피비린내로 물든 공기가 폐로 스며들었다. 의식이 흐려져갔다. 고통으로 발작하는 뇌의 비명이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 가늘게 떨리는 손 끝이 검게 얼룩진 디오의 상처를 매만졌다. 벌어진 입술에서 몇 번의 기침과 함께 붉은 선혈이 길게 흘러 턱을 적셨다.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정신없이 그를 씹어대던 디오가 처음으로 멈추었다. 안겨 있는 게 고작이었던 몸이 스르르 미끄러져 그의 팔에서 빠져나갔다. 흐려진 눈을 깜빡였을 땐, 경악과 충격에 뒤섞인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디오를 겨우 보는 게 고작이었다. “……에…르크, 나드…?”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는 허언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대답할 새도 없이 시야가 검붉게 물들었다. 뒤늦게 밀려오는 옅은 안도감이 지크하트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