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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화: 디오지크)다음의 기약
Caption 멸자님의 낙원의 사람 소설을 읽고 창작된 팬연성입니다. 허락해주신 멸자님께 감사드립니다! 팬연성인 만큼 원작과 다소 연출이나 전개가 상이할 수 있습니다. 방에 누군가 있다. 지크하트는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손이 움직이는 걸 느꼈다. 그가 눈이 다 뜨이기도 전에 기척을 알아챈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거니와, 몸에 밴 습관이 척수에서 튕겨나가듯 상대를 공격한 것도 최초가 아닌 까닭에 지크하트는 몸이 움직이는 대로 두었다. 눈꺼풀이 깜빡이며 흐린 시야에 초점이 맺히는 사이, 지크하트는 생각했다. 어제 내가 어디서 잠들었지? 비명 소리나 구조 요청은 안 들리나? 타는 냄새라든가 피비린내는? 마을이 습격당한 건 아닌 모양이군. 기척은 하나고, 빠르게 피했지만 감염체에 비할 건 못 돼. 먼저 달려들진 않으니 이쪽에서 먼저 급소를 친다. ‘나’를 노리고 덤벼들었다면 낙원의 사람이거나— “…!” 지크하트는 그제야 눈을 번쩍 떴다. 디오가 그의 손목을 간신히 움켜쥐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무기랍시고 움켜쥔 주삿바늘이 디오의 목에 금방이라도 꽂힐 듯 예리하게 빛났다. 천천히 손에 힘을 푼 지크하트가 그제야 팔을 거두었다. “네가 왜 여기 있냐.” “그 질문도 세 번째군. 기억력 감퇴나 일시적 망각 증세인가. 진통제 부작용인지도 모르니 앞으로는 덜 다치도록 해라. 다치고 오면 진통제를 안 쓸 수도 없지 않나.” 방금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사내치고는 제법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였다. 지크하트는 또렷했던 머리가 다시금 느려지는 걸 느꼈다. 우습게도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너 의사야?” “…조금 공부했었다.” “어쩐지 실험 받았던 것치고는 아는 게 많더라.” 지크하트는 떠오르는대로 입 밖에 내뱉었다.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였을 뿐 진통제의 약기운이 아직 남아 있었다. 혹은 그의 말마따나 부작용일지도 모른다. 고작 며칠을 알고 지냈다고, 그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의심조차 않다니. “그런데… 이런 걸 두 번이나 당하고 너는… 또 나랑 같이 있냐?” “잊어버린 게 확실하니 다시 말해주지, 지크하트. 난 너랑 같이 격리된 처지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아.” “네가 말해줬지 않나.” 너한테 이름까지 알려줬다고. 꽁꽁 숨길 것도 아니다만 어쩐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주사기를 떨어트린 몸이 휘청거렸다. 급하게 저를 당겨 안는 팔에 이끌려 끌려가고 보니 이번엔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어떻게 해야 널 효율적으로 제압할지도 생각해둬야겠군.” “그런 거… 왜 생각하는데……” 지크하트가 눈을 느리게 꿈뻑였다. 디오는 말없이 그를 눕히고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었다. 쟤는 방금 전까지 내가 죽이려고 했던 걸 잊어버렸나 봐. 저거야말로 기억력 감퇴 아닌가. 지크하트의 눈꺼풀이 내려앉으려는 찰나, 다시금 무언가가 입술을 간지럽히듯 내려앉았다. 디오가 고개를 숙여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못 봐주겠어서 말이다.” “…뭐래…… 난 계속… 이렇게 살았어……” 남을 앞에 두고 이렇게 잠든 건 얼마만이었더라. 낙원을 나온 뒤로는 처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또 다음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수면에 물이 반짝이듯 떠오른 의식이 이내 도로 잠기며 흩어졌다. 간만에 곤하고 단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