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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화: 디오지크)평생의 겨울
Caption 1. 필멸자님께서 풀어주신 썰 급하게 짧게 써봤습니다 이건 쓸 수밖에 없었어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끝없는 겨울이 찾아온 적이 있었단다. 눈이 쏟아지고, 강이 얼어붙어, 불도 도망쳐버린 고요한 나날이었지. 사람들은 이것이 마족의 저주라고 했어. 누구도 그와 대적할 수 없으니 모두 얼어죽게 될 거라고 두려움에 떨었단다. 새벽부터 굵어진 눈발이 발굽이 파묻힐만큼 쌓인 길이었다. 말의 고삐를 당겨 멈춘 이가 뛰어내리며 후드를 벗었다. 단정하게 빗어 다듬은 흑발 사이로 드러난 은실의 귀걸이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찰랑거렸다. 그와 같은 색의 눈동자가 차분히 앞을 훑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말에 매어두었던 창을 챙기고 긴 목을 가볍게 어루만져주자, 말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몸을 돌려 왔던 길로 향했다. 홀로 남은 청년은 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숲으로 걸어들어갔다. 꽃잎 같은 눈송이가 춤추듯 흩날리며 그의 발자국을 덮어 가렸다. 그때 막 작위를 받은 젊은 영주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구하겠다며 혈혈단신으로 겨울의 숲에 뛰어든 게야. 이윽고 영주님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퍼붓는 눈보라를 헤치고 겨울을 몰고 오는 마족과 사투를 벌였지! 그 마족은 녹지 않는 만년설의 휘광을 두르고, 죽음의 모양을 한 낫을 휘두르며 영주님을 공격했단다. 일 년 사이에 무성하게 자란 덩쿨이 앞을 막았다. 지크하트는 귀찮은 기색도 없이 검을 묵묵히 휘둘렀다. 눈이 무거워 내려앉은 가지가 잘려나가 떨어지고, 길을 막은 나무동이는 토막 난 채 굴러가다가 멈추었다. 지크하트의 오른쪽 가슴에 달린 꽃에 작은 눈이 소복히 쌓여가기 시작했다. '이 추운 땅에서 자라지도 않는 꽃을 상징이랍시고 주다니. 인간들도 성미가 고약하군.' '언젠가 이 꽃이 피는 날까지 이 땅을 다스리란 의미다. 마족의 차가운 심장으로는 이해할 수 없겠지.' 지크하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흩날리는 눈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노래가락처럼 아스라히 울려퍼졌다. '...뭐, 네놈과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만.'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지크하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눈의 무게 탓인지 조금 느려진 발이 무겁게 눈을 밟았다. 그러나 백성들을 사랑하는 젊은 영주님의 마음은 지지 않았어. 마침내 마족이 두른 얼음을 녹여버리고, 이 영지에 봄을 가져오신 게야. 용기와 고결함에 감동한 신은 그에게 영원한 삶을 하사했고, 영주님은 영원히 이 북부 영지를 다스리게 되셨단다. 그는 아직도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마족이 나타났던 겨울의 숲을 돌아본다고 하더구나. 언제고 그 마족이 나타날 때를 대비하듯이 말이야... 이제는 동화가 되어버린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직도 그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영원한 겨울을 가져올 뻔했던 마족은 그에게 죽지 않았고, 그 역시 마족에게 검을 겨누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을 따름이었다. 만일 그때 그를 보내지 않았다면, 다른 수를 써서 잡아둘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지크하트는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곤 했다. 그리고 결국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며 쓴웃음을 짓고 마는 것이었다. 과정이 어찌되었든 이 세계엔 봄이 필요했고, 녹지 않는 눈은 겨울이 끝나면 살아갈 수 없었다. 지크하트는 잠깐의 사욕에 눈이 멀어 그에게 남아달라 애원할 성정도 못되었다. 그렇게 마족은 - 디오는 이 땅을 떠났다. 그의 후회와 그리움이 되어서. '이건 그리움일까.' 지크하트가 손을 뻗었다. 새하얀 장갑 위로 내려앉는 눈송이가 그의 눈썹에 맺혀 있던 서리를 닮았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살이 에는 듯한 한기가 느껴지던 모습이었다. 그를 꿈에서도 그리워하다 결국 그가 떠난 자리로 돌아오다니, 지크하트는 그때도 지금도 이런 자신이 낯설기만 했다. '너는 날 녹여버릴 거다.' 처음 그에게 닿았던 날, 디오는 말했었다. 사실을 전하듯이 덤덤하게. 그랬기에 지크하트도 부정하지 않았다. 제 손에 닿았다 멀어지는 그의 팔이 불에 닿았던 것처럼 무수한 물방울로 흩어지고 있음을. '그러니 난 돌아가야만 한다. 지크하트.' '...알고 있어.' 인사는 그것이 끝이었다. 돌아온 지크하트는 영웅으로 칭송받고 만인이 인정받는 영주가 되었으나, 그의 마음은 디오를 보냈던 겨울과 함께 멈춰 있었다. 헤어진 그 날도. 눈이 녹은 이후의 나날에도. 그리고 다시 눈이 오는 날에도. 지크하트는 가슴에 어린 서리를 쥐어뜯듯이 내달려 그와 헤어졌던 숲으로 돌아왔다. 어지럽게 흩날리는 굵은 눈발과, 눈이 덮여 조금 무거워진 꽃 브로치와, 귓가를 스치는 아련하고도 평범했던 대화가 머물렀던 장소로. 하지만 할머니, 마족은 죽은 거 아니에요? 왜 영주님은 자꾸만 겨울의 숲에 가시나요? 어쩌면 그 마족을... 다시 만나고 싶으신 것 아닐까요? 지크하트는 다시 걸었다. 지크하트는 받아들여야 했다. 영원한 겨울의 저주가 끝난 후, 녹아버린 것은 디오가 아니라 지크하트 본인이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이성을 적셔 망가뜨렸고, 구멍이 난 마음엔 디오가 가득 담겨 출렁거렸다. 이제 얼려야 하는 것은 지크하트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겨울에도 이곳에 오고 만 것이었다. 그를 얼릴 수 있는 유일한 겨울은, 이제 여기 없다는 걸 알면서도... "......!" 지크하트가 멈춰섰다.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얼음 가시처럼 뾰족하게, 그러나 눈부신 빛을 퍼트리는 만년설의 후광. 새하얀 눈발 같은 머릿결 사이로 드러난 단단하고 우아한 뿔. 동화에서 말해지던 죽음의 모양을 한 낫을 집어들며, 그는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나 지크하트를 향해 돌아섰다. 얇은 서리가 맺인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드러난 자리엔 선혈처럼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지크하트를 마주보고 있었다. "......" 지크하트는 앞으로 걸었다. 고작 일곱 여덟 걸음될 법한 거리가 마치 수백 수천 거리는 되는 것만 같았다. 디오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 묵묵히 서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지크하트를 가만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고요를 깨는 질문. 지크하트였다. "내가 봤던 그 놈이 맞나?" 코앞에 닿을 만큼 가까워져서 하는 말이 이거라니. 디오는 웃고 싶었지만 웃을 수 없었다. 지크하트의 손이 그에게 닿을 듯하다가 미모사 잎처럼 잔뜩 말리며 물러선다. 그 손을 낚아채듯 잡으며, 디오는 그가 손을 빼지 못하도록 단단히 깍지부터 꼈다. "아니길 바랐나?" "......" "지크하트." 지크하트는 멍하니 제게 닿은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처음 그와 닿았을 때 서리처럼 퍼지던 지독한 한기도, 그러다가도 저를 얼려 산산조각내버릴 것 같던 서슬퍼런 추위도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단단하고, 매끄러웠으며, ...다정하기까지 했다. 맥이 탁 풀렸다. 겨우 주저앉는 꼴을 면한 지크하트의 허리를 다른 팔이 단단히 감싸왔다. 소복히 내리는 눈이 두 사람의 머리를 꽃잎처럼 장식하고 있었다. "어서 와. 나의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