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로 돌아가기
정궁)너와 나의 이야기
Caption 2회차에서 추가되는 아처 이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돌아가면 좀 더,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나?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과 달리, 정성공은 잔을 두어 번 비울 동안 말이 없었다. 아처•주유도 먼저 대화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그와 같이 잔을 비우고, 고요한 분위기를 음미하며 달이 기운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진정 가까운 사이는 침묵을 어려워 않고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사이, 라고 했던가. 주유는 지금의 평온함이 좋았다. 아카사카에 막 도착했을 무렵, 정성공을 마스터로 인정한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그 역시도 그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함께 나라를 염려하는 신하로서— 라고 덧붙였던 거겠지. “—사실은 말이다.” 주유가 고개를 들었다. 잔에 비친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정성공이 말을 이었다. “서번트와 마스터의 정신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어떻게 차단할 수 있는지 찾아본 적이 있다.” 뭐,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정성공은 농담하듯 덧붙였다. 주유는 그저 조용히 웃었다. “단순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남에게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거니와,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자들도 있거든.” “이해한다. 전장에서는 어떤 사소한 것이 약점이 되어 발목을 잡을지 모를 일이지. 경계에 충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자들은, 이미 죽어서 땅에 묻힌 자들뿐일 거다.” “정말이지 너는 말에 거침이 없군. 감탄이 절로 나온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정성공이 술을 들이켰다. 주유가 자신의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알싸하고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하지만, 너는 내게 직접 말해주었다.” 정성공의 손이 멈추었다. 주유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경멸당할지 모른다, 혹은 불신할지 모른다, 배신할지 모른다… 그런 걱정을 차치하고서라도, 스스로 치부라 여기는 것을 입 밖에 내기는 쉽지 않지. 설령 내가 보았더라도, 그리고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더라도 모른 체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거다.” “…….” “하지만 너는 도망치지 않았다, 명엄.” 피를 묻히기 두려워하는 자는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 때로 병사들을 사지에 내몰더라도 뒤에 쌓인 시신의 수를 세지 않는 것이 장수이며, 앞에 남은 자들을 이끌고 나아가며 적을 베는 것이 명장일지니. 주유는 그 차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눈앞에 있는 젊은 장수에게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명이 망했어도 그 영혼은, 긍지는 분명 너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분명, 너의 손으로 되살아나겠지. 너 같은 장수가 오에 있었다면 필히 천하는 손가의 것이 되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야.” 빈 잔을 멍하니 들고 있던 정성공이 소리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과대평가해주는 것 아닌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닌 걸 알지만, 그래서 더 무게가 느껴지는걸.”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난 어깨가 가벼운 자보단 무거운 자에게 매력을 느끼거든.” 농담조로 대꾸한 주유가 술을 들이켰다. 이어 술병을 쥐어든 작은 손이 정성공의 잔을 가득 채웠다. 마지막 방울이 떨어지며 만든 파동이 달빛을 흔들며 퍼져나갔다. “뭐, 네 말대로, 모른 척할 수도 있었겠지. 분명 너라면 이런 것으로 트집잡지 않고 이해해주었을 테니까.” 술병을 받아든 정성공이 주유의 잔을 채웠다. “무엇보다 전장에 대해… 목숨을 건 전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나에겐 과분하게 느껴지면서도, 반하게 만들어 따르게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어느샌가 반해 있는 건 내 쪽이었다.” 어떤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고, 정성공을 ‘주군’으로서 예우하면서도, 자신이 동요할 때는 망설임없이 꾸짖는다. 존경했던 아버지는 청에 투항했고, 황제가 그를 의지하고 있는 한 정성공은 결코 물러서지 않는 벽이 되어야 했다. 그를 이끌어줄 존재도, 옆에 함께 해주는 이도 없다. 그런 외로움을 토로해서도 안 되었기에, 그가 가까이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말이 없는 술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곁에 서주었다. 위험한 순간에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를 서슴지 않는, 그보다 훨씬 작지만 강인한 등을 지닌 사람이 나타나주었다. “그러니 더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네게 보이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노력해서 네게 걸맞은 마스터가 되도록 말이야. 훌륭한 지략가는 장수의 실력을 끌어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을 이끌어낸다지. 너를 소환한 것은 내게 천운이었다, 아처.” “보필하는 보람이 있는 주군을 만나는 것은 지략가의 복이지.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나의 주인이여.” 둘의 잔이 부드럽게 부딪혔다. 선선한 바람이 아카사카 저택의 정원을 느릿하게 거닐었다. 연거푸 차오르는 맑은 술에 비친 나무에서는 까마귀가 앉아 있다가 조용히 날갯짓하여 사라졌다. 비우기 무섭게 그득해진 잔을 다시금 입가로 가져가던 정성공이 주유를 보았다. 잔을 곧장 들지 않은 그는 품을 뒤져 익숙한 것을 찾아 꺼내고 있었다. 정성공이 환히 미소 지었다. “오늘은 운이 좋은걸! 주랑의 연주를 이토록 가까운 데에서 볼 수 있다니 말이야.” “아아, 네 앞에서 연주하는 건 처음이지. 가끔 기분 전환으로 불었던 것이 설마 그리 널리 소문날 줄 몰랐다만……” 곤란한 듯 웃던 주유가 대나무 피리를 고쳐쥐고 입가로 가져갔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괜찮겠지. 나의 마스터에게… 아니, 벗에게 바치는 곡이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작은 한숨. 그리고 한 박자의 고요. 이어서 흘러나오는, 청명하고도 아름다운 음율의 향연. 정성공은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술에 아무리 취해도 음이 틀리면 돌아본다는 주유의 이야기도 익히 아는 바였다.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우아한 선율에 탄복하며 정성공은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그저 주유를 바라보았다. 잔잔히 흔들리는 선명한 은빛의 머리칼은 옅은 금발과 대조되어 눈이 부시고, 내리감긴 눈의 속눈썹은 풍성하고 길어 만져보고 싶은 충동마저 들 정도였다.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손은 거짓말처럼 평화를 노래하는 꽃잎처럼 흔들리고, 잔잔한 곡조가 술 대신 마음을 채우며 보듬듯이 일렁거린다. 모든 것이 꿈만 같은,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도 선명한 장면이 시선을 사로잡고 뇌리에 또렷이 새겨지고 있었다. 정성공은 그가 연주하는 선율에 제 심장 소리가 같이 울려퍼지고 있음을 알았다. 이건, 분명, 설렘이나 기쁨과는 다른 감정의 색채다. 동경이나 우정도 아니었다. 정성공은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워진 기척에 주유가 연주를 멈추고 정성공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 물끄러미 영롱한 금빛의 눈동자로 정성공을 담으며, 주유는 다가오는 손에 자연스럽게 뺨을 기대왔다. 봉을 오래 잡아 단련한 자의 손바닥은 거칠고, 손가락은 울퉁불퉁하며, 주유의 한 뺨을 전부 가리고도 남을 만큼 컸다. 그를 통해 전해지는 온기가, 살아 있는 자의 것 그 자체여서. 주유는 무심코 낮은 한숨을 흘리며 영주가 새겨진 손등을 덮어쥐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이 있었다. 서로의 눈으로, 좁혀지는 거리로 닿는 마음이 있었다. 주유는 정성공이 이끄는 대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 겹쳐진 입술 사이로 서로의 숨결이 섞였다. 떨어질 듯하던 입술이 이번엔 틈을 벌려 작고 얇은 입술을 약하게 물었다. 기꺼이 응하여 입을 벌리며 주유는 정성공의 목에 팔을 둘렀다. 피리가 땅에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났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정성공이 고개를 숙이며 좁고 뜨거운 입안으로 혀를 밀어넣었다. 젖은 살덩이가 느릿하게 얽히며 타액을 섞고 서로에게 휘감겼다. 마력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느껴지는 생기가 무엇보다 달고 매력적이었다. 주유는 작게 목을 울리며 고개를 좀 더 뒤로 젖혔다. 목덜미를 탄탄히 감싼 손이 그를 받쳐주었다. 이제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건 정성공 혼자만이 아니었다. 주유의 떨리는 손 끝이 옷자락 위로 드러난 정성공의 목덜미를 문질렀다. 입술이 문질러지며 나는 소리도, 서로에게 묻힌 젖은 물 소리도 합주처럼 감미로웠다. “……주유.” 입술을 떼며, 정성공은 그를 불렀다. 그에게 진명을 가르쳐주었을 때조차 감히 부를 수 없다 했던 이름이었다. 주유가 부드럽게 눈을 휘어 웃었다. “아아.” “너와의 관계에, 더 많은 이름을 붙이고 싶어… 네게 내가 유일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너 이외엔, 나는, 누구도 이렇게 마음을 줄 수 없을 거야.” “그건 실로 반가운 말이구나, 명엄.” 이미 좁혀진 거리를 더욱 밀착하며, 주유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나 역시도 너와 같은 마음이니까.” 속삭이는 달콤하고 낮은 어조가 정성공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짧게 소리 내어 웃은 정성공이 그에게 입맞추었다. 찰랑이는 술 위로 비친 두 사람의 위로 반달이 눈부시게 걸렸다. 입맞춤을 나누는 둘의 심장 박동이 거짓말처럼 하나로 겹쳐졌다. 두 번은 없을 특별한 밤이 고요히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