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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마(라이더)를 짝사랑하는 타카스기를 짝사랑하는 아마료로, 쌍방연애물이 아닙니다.
셀리움(@Iceselloum)님이 연성하신 아마타카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분위기와 대사를 차용하였습니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신성배전쟁과 기타 서번트들 간의 사건은 개인적인 해석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그럼, 타카스기 씨. 다음에 또 보세.”
그는 평소처럼 그리 말했다. 한치의 거짓도 없이, 그럼에도 그 뒷면을 전혀 보이지 않으며 말하는 모양은 사카모토 료마의 강점이자 약점이었다. 타카스기뿐 아니라 모두가 그를 꺼려하는 이유. 타카스기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자신과 또 만나고 싶어하는 료마’를 불신했다. 만일 그와 다시 얼굴을 맞댈 날이 있다면 그건 운명의 장난이거나, 서로에게 칼을 겨눠야 할 때일 터다. 어차피 평생 같이 어깨동무하며 지낼 것도, 시덥잖은 말들로 엮어가며 오래 볼 사이도 아니었어. 타카스기는 샤미센의 끈을 당기며 콧방귀를 뀌었다.
“……끝까지 알지도 못했으면서. 그런 멍청한 얼굴을 두 번이나 보고 싶을까봐.”
오료의 이야기를 하며 부드럽게 웃던 료마가 떠올렸다. 장난스레 자신도 산에 가볼까 맞받아쳤지만, 이미 땅으로 내려가버린 용을 잡을 수는 없다는 걸 스스로가 진저리나도록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대로 영영 못 봐도 상관없다. 그래야 했다. 타카스기 신사쿠는 저를 지나쳐 굴러간 돌을 볼썽사납게 쫓아 뛰는 성미는 못되었다. 그것이 발끝을 찧어 오래갈 상흔을 남겼더라도, 결국 지나쳐간 것은 억지로 붙든다고 멈춰지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타카스기는 음울하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를 털어내었다. 사카모토 료마라는 이름에 오래 붙어 있었던 연심이 마른 딱지처럼 지저분하게 바스라지며 자국을 남겼다.
“ㅡ안녕. 사카모토 군.”
몇 해 뒤 5월, 타카스기 신사쿠는 결핵으로 사망했다. 같은 해 12월, 사카모토 료마는 신분을 모를 자들에게 습격당해 암살당했다. 다시 보자는 말은 예감처럼 들어맞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시대였다. 마음을 전한다든가, 미래를 약속한다든가. 그런 것들을 삶과 투쟁 뒤로 당연하게 미뤄놓는 시기였다.
그런 시대에, ‘죽은 자’에게 다시 한 번이란 기회가 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고작 일 년 사이에 일본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신정부군과 구막부군. 기울어가는 도쿠가와 막부와 득세하는 유신지사들. 습격, 암살, 사망, 사망…… 성배의 힘으로 소환된 서번트들은 감회에 젖을 새도 없이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다들 생전 이루지 못한 것에 눈이 돌아가 있었으므로 운명을 원망하거나 한탄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타카스기 신사쿠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는 곳마다 피가 튀었다. 잘린 목과 찢긴 사지가 굴러다니고 화약의 폭발음과 검이 부딪히는 쇳소리가 요란했다. 타카스기는 점점 즐거워졌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다다미 위의 짚더미처럼 삭지 않으리라!! 연심이 다 무어냐! 한때의 간질거림, 그 이름과 함께 흘려보낸 욕망은 어찌나 무의미한가! 이미 그는 내 것이 아니되 오로지 내 것은 이 몸뚱이 하나요,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이상의 혼뿐이거늘!!
“여전히 요란하군, 타카스기.”
서번트가 누가 소환됐는지, 타카스기는 관심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맞붙기 전까지는 구태여 위험을 감수하며 일을 벌릴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 날도 토지를 깨끗하게 부수고 밀어버리던 타카스기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깔끔한 정장에 정성껏 손질한 머리칼의 사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저 재미없고 고지식한 인상. 잊어버릴 수가 없지. 타카스기는 성큼성큼 걸었다. 피로 번들거리는 칼이 바닥에 끌리며 소름끼치게 울었다.
“이게 누구야. 타케치 군이잖아. 어라, 그 뒤엔 다나카 군? 시대를 착각한 거 아냐? 너희 이미 죽었잖아. 아, 나도 죽었었지. 그럼 너희도 서번트? 싫다아~ 적으로 돌리면 귀찮은 부류잖아, 타케치 군은.”
특유의 경박한 어조로 말을 쏟아낸 타카스기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기왕 죽었다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이라지만, 나는 아직 더 놀고 싶어서 말이야. 재미없는 녀석하고는 말 섞기 싫은데, 도망가도 될까?”
“네놈, 감히 타케치 선생께……”
앞으로 나서려는 신베에를 타케치가 손을 들어 막는다. 여전히 충직한 개 노릇이군. 그런 일로 불명예스럽게 죽었는데도 심신을 다해 따를 이유가 있나. 마치 사랑이라도 하면 모를까. 물론 자신은 사랑하더라도 저렇게까지 따르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너와 싸우기 싫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피차 시간낭비일 뿐이겠지. 난 이 전쟁을 단순한 권력쟁탈전으로 끝낼 생각은 없다.”
“헤에. 그럼? 뭐 재미있는 제안이라도 있어?”
미끼랍시고 던진 의미심장한 말이 너무 눈에 빤히 보여서 지루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타카스기는 생전의 정을 생각해 조금의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타케치는 그를 바로 습격하지도 않았고, 어쌔신인 다나카 신베에를 그의 편으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그것만으로도 간단히 알 수 있는 수순이었다. 타케치 또한 이 성배 전쟁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죽어서 이루지 못했던 꿈.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제대로 된 후계조차 남기지 못한 자들의 달콤한 착각. 이번에야말로 이 나라를 완전히 바꾸어 새로운 시대를 연다. 타케치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하늘이 주신 기회다. 이 일본의 해묵고 낡은 관습과 적폐를 청산하고, 도사 근왕당을 재수립하여 일본을 새로이 만들어내려 한다.”
“…헤에.”
재미없는 이야기. 역시 그하고는 상성이 맞지 않았다. 사카모토 군이라면 좀 더 흥미로운 계략이라도 세워왔을 텐데. 타카스기는 문득 심기가 불편해졌다. 당장 저들과 대립하는 건 시기상조다. 허나 같잖은 일에 맞춰주는 척하는 것도 썩 즐거울 것 같진 않았다. 이걸로 제가 얻을 재미가 눈곱 정도라도 보이지 않는 이상은. 어떻게 할까. 타카스기는 심드렁하게 검을 허공에 두어 번 던졌다 잡았다.
“생각할 시간 정도는 주는 거지? 애초에 그쪽도 패를 전부 드러내진 않았잖아?”
“……무슨 의미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 아니라고 해줘? 진짜로 모른다고 하면 역으로 손잡고싶지 않아질 것 같으니까.”
타케치는 침묵했다.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신베에가 굉장한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지만 알 바 아니었다. 정말이지, 차라리 그 녀석이 소환됐더라면 재밌었을 텐데. 짝사랑은 끝났다고 생각하면서도 타카스기는 사카모토를 그와 비교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침묵이 길어진다. 불쾌 지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았다. 다가오는 발 소리를 눈치 못 챈 건 그 탓이었다.
“ㅡ성배 전쟁으로 모두를 없애버리는 거야 간단하지만 결국 이겨서 성배를 손에 넣는 건 한 명뿐.”
날카로운 무언가가 땅에 부드럽게 박혔다. 타카스기는 믿을 수 없었다. 이제 그만두자고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는 그 목소리에 반응해버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푸른 제복을 입은 사내가 타카스기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그 마력량으로 우리 서번트들을 이 땅에 머무르게 한다 해도, 타케치 씨가 말한 계획을 이행하기엔 인력도 마력도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는 이야기겠지.”
젠장, 젠장, 젠장!
‘다음에 또 보자’를 이렇게 회수할 거라곤 얘기 안 해줬잖아!
당연한 말도 수상쩍게 구사하는 화법을 가진 건 그 하나뿐이다. 타카스기는 타케치가 보는 앞에서 그를 끌어안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애써야 했다. 바보는 죽어서도 못 고친다더니, 천재는 죽어서도 사랑은 못 잊는 거냐. 타카스기는 일부러 검 끝을 바닥에 거칠게 긁으며 돌아섰다. 서양식 군복을 차려 입은 사카모토 료마가 창을 쥐고 번듯하게 서 있었다.
“그렇지? 타카스기 군.”
‘…어라.’
타카스기는 일순 검을 놓칠 뻔했다. 사카모토가 늘 데리고 다니던 여자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뿐이면 놀랄 것도 없겠지만. 잠시나마 들떴던 마음이 거대한 얼음을 삼킨 양 느리게 식어갔다. ‘사카모토 료마’? 아니, 그가 맞다. 누구보다도 모를 리 없었다. 고작 눈동자색이 좀 금색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복식이 바뀌었다고 해서, 무기가 바뀌었다고 해서 타카스기 신사쿠가 사카모토 료마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하지만 안심해. 그걸 해결할 방법도 생각해 뒀으니까. 이제 남은 건 너의 선택뿐이야.”
신물이 올라온다.
“손을 잡지 않겠어?”
당장이라도 그의 멱살을 잡아 내동댕이쳐서, 형체가 남지 않을 때까지 난도질하고 싶은 기분이다.
“타카스기 군.”
‘타카스기 씨.’
ㅡ저건 ‘사카모토 료마’가 아니야.
이어지는 설명은 간단했다. 여기 모인 넷 외에 다른 서번트 중 하나, 모리 란마루의 존재.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머리를 보구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전국 시대의 한 획을 긋고, 그 시작과 종결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존재의 수급이다.
“…뭐, 그게 있다면 서번트를 유지하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겠네.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선 더한 것도 할 수 있을 거고.”
“모리 란마루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다. 료마만으로도 처치할 수 있어. 견제해야 할 건 캐스터 - 이즈모노 오쿠니 정도다. 파마의 진을 사용할 수 있다더군. 오다 노부나가의 힘에 미치진 못하겠지만 귀찮은 방해가 들어올 가능성은 충분해.”
“그렇단 말이지. 거기까지 잘도 파악했네, 타케치. 정말 무섭다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타카스기는 턱을 괸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타케치는 사카모토에 대해 어떤 의심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이렇다면 신베에 쪽은 들여다볼 가치도 없었다. 확실히 이 '사카모토'는 그 몸짓이나 어조, 표정, 덧붙이는 의견이나 사고의 흐름까지도 생전과 다를 바 없었다. 종종 저와 마주치는 순간 부드럽게 휘어지는 가늘고 순한 눈매마저도.
…재미없는 계획.
짜증나는 녀석들.
판만 뒤집어버릴 생각으로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냐. 영령이 되어서까지 결국 이 정도라니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쁘지 않네. 역시 발은 걸쳐볼까나.”
진짜 사카모토 료마가 있었다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개인적인 소원은 이루지 못하게 될 텐데. 역시 타카스기 군다워.”
“하! 수상쩍은 녀석에게 칭찬 들어봐야 하나도 기쁘지 않다구. 적당히 재밌어보이니 어울려도 되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니까.”
“자네가 와준다면 이미 계획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네. 바로 다음 작전으로 넘어가도 되겠어.”
보나마나 시시한 이야기겠지. 어차피 절반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아, 살아나서 날뛸 때까지는 즐거웠는데. 차라리 모르는 상태로 죽였으면 더 좋았을걸. 타카스기의 메마른 눈이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실 흥미가 끊긴 이상 지금이라도 빠지면 그만이긴 했다. 말은 좋다는 듯이 했지만 어느 모로 보나 재미없어보이고.
그러다 문득 타카스기는 깨달았다.
왜 자신은 나가지 않고 있는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멍청한 바보 녀석들이라고 호통이라도 쳐줘야 상쾌해지리란 걸 알면서도, 어째서 행동에 옮기지 않는지.
“그러고 보니 타카스기 군의 소원은 뭐였어? 성배를 넣어서 하고 싶었던 것.”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얼핏, 예전의 깊은 검은 빛으로 돌아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창에 기댄 채 비스듬히 상체를 기울인 그 자의 눈은 여전히 뱀의 것처럼 노랗게 빛나고 있는데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신이라도 만들어볼까 했지?”
“……신?”
“그래! 인간처럼 변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은 위대하고 기이한 신 말이야~ 이름하여 「기신계획」!”
“허… 잘도 그런 걸 생각해냈군. 그야말로 타카스기 네가 아니면 떠올리지도 못할 발상이다.”
“하하하. 그건 듣기 좋은 칭찬이네.”
꼴보기 싫은 얼굴에서 고개를 돌린 타카스기가 타케치와 무성의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신베에는 여전히 그림자처럼 말이 없었다. 화제는 다시 모리 란마루를 쓰러트리고 오다 노부나가의 목을 빼앗는 이야기로 돌아왔다. 어린애마냥 밝게 웃었던 타카스기는 어느샌가 말을 걸면 죽여버릴 듯한 살의를 내걸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곁에 있던 사카모토 료마의 집요한 눈길이 그를 쫓고 있는 건 알지 못한 채로.
그러므로 사카모토가 그를 찾아왔을 때, 타카스기가 어이없어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타케치가 보낸 건가 했는데… 그 말 진심?”
“진심이야.”
사카모토가 소리없이 미소지었다. 저러니까 진짜 같네. 당연히 몸뚱이는 사카모토 료마니까 어쩔 수 없겠지만. 타카스기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조용히 눌러 삼켰다. 아직 자신은 이 자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뭐라도 캐내어 알기 전까지는 속내를 다 내보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타카스기 군, 네가 꺼낸 계획이 제법 흥미로워서 말이야.”
“기신 계획?”
“그래. 모든 인간들의 위에 선 확고하고 영원한 신, 그것을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낸다… 타케치 씨의 계획도 나쁘진 않지만, 나는 이쪽이 더 구미가 당기는군.”
벌어진 입이 도로 다물렸다. 정치판에선 흔한 일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전쟁중이니까.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어보이는 쪽에 접근하여 다른 쪽을 꺾는다. 생존, 혹은 품고 있는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그래서 먼저 손을 잡자고, 그것도 타케치를 배신하고 그 옆에서 첩자 노릇을 하겠다고 제안해오다니 말이야~…. 사카모토 군은 늘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수상쩍은 녀석이었지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애초에 처음부터, 자신처럼 기회가 오면 떠날 작정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운 좋게 자신이 나타났고. 추리력을 발휘할 필요도 없는 예상도였다.
그러나 거기에 들어가 있는 인물이 사카모토 료마이면 안 되었다.
아무리 속내를 알 수 없어도 타카스기 료마라는 인물은, 타카스기 신사쿠가 아는 그는 절대로.
……‘진짜’가 아니라는 걸 이렇게 역겨운 방식으로 확인시켜줄 필요는 없었는데.
“이상하네.”
경멸을 숨기지 못한 조소가 입가부터 번져나왔다.
“내가 기억하는 사카모토 군은 이렇게 한심하지 않았는데.”
내내 여유롭던 눈썹이 느리게 꿈틀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체를 들켰나 하는 것? 혹은 비꼼에 대한 단순한 분노? 여전히 사카모토의 속내는 읽기 힘들었으나 지금의 표정만큼은 볼 만하여, 타카스기는 오랜만에 흡족해졌다.
“그것 참 대단한 기억력이구나, 타카스기 군. 하지만 지금의 ‘내’가 뜻을 같이 하고 싶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타케치는 날 전적으로 믿고 있어. 노부나가의 머리를 가져오는 것도 내게 맡길 정도로 말이야. 네게는 제법 좋은 조건일 거라 생각하는데.”
그 정도로 안달이 나 있는 건 잘 알겠다. 타카스기는 느리게 손깍지를 꼈다. 대강 짐작이 갈 듯도 했다. 이 ‘사카모토 료마’가 관심이 있는 건 타카스기 신사쿠가 아닌 「기신 계획」. 원래의 사카모토 료마가 사람을 좋아했던 걸 생각하면 유추는 더 쉬워진다. 흔히 있는 일 아니던가.
뭔가의 신에 씌였거나, 혹은 그에게 잡아먹혔거나.
“…뭐, 어느 쪽이든 타케치의 이야기는 너무 재미없었으니까. 그래, 네가 와준다면 확실히 이쪽이 더 승산 있어. 거래는 성립이다. 아, 그래도 네 말대로 타케치 편에 그대로 붙어 있는 편이 좋겠어.”
곁에 가까이 두는 건 절대 사양이니까.
“걱정하지 마. 겉으로 보기엔 완벽하게 네가 혼자 배신한 것처럼 보일 테니까. 소문이 필요하다면 적당히 이름을 팔아도 좋아. 잘 굴러간다면 타케치가 오히려 날 숨겨주고 가까이하는 모양새가 될 테니까.”
“역시 꿍꿍이가 남다르네, 사카모토 군.”
여전히 경멸을 누르지 못한 채로 타카스기가 손을 내저었다. 비치지 않는 금안이 잠시 그에게 머물렀다가 이내 문가로 향했다. 다음에 또, 라는 인사는 없었다. 문이 닫히고 기척이 멀어지고서야 타카스기는 그걸 알았다.
“……재미없어.”
손에 뭐라도 들려 있었다면 아무 데나 내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빠진 녀석들이었다면 이전 연모했던 이가 먼저 찾아와주었다며 노래라도 불렀을지 모르겠다만. 책상을 짜증스럽게 두드리던 손가락이 아주 천천히 느려졌다. 속이 메스꺼웠다. 머리를 도려내고 싶을 만큼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마지막으로 제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던 ‘사카모토 료마’의 잔상이었다.
‘다음에 또 보세.’
“진짜, 재미없다. 사카모토 군.”
타카스기가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낡아빠진 의자가 뒤로 넘어갈 듯 기울며 위태롭게 울었다. 분명히 다 잊었다고, 희미해지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을 터인 감정이, 어째서.
“…내가 너를, 아직까지……”
ㅡ이리도 지독한 향기로 남아 있는지.
한 번 운을 탄 흐름은 순탄했다. 모리 란마루는 필사적이었으나 세 서번트가 손을 잡은 상황에서 패배는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타케치와 사카모토의 조작 아래 회담 장소에 다른 서번트들을 포함한 보신 전쟁의 요인들이 전부 모였고, 살해당했다. 누군가에겐 경악스러운 참극, 전말을 아는 자에게는 시시하리만치 잘 짜여진 희극. 열린 성문으로 피의 강과 사체들이 쓸려내려갔다. 모두가 방심한 순간 타카스기는 성배를 손에 거머쥐었다. 승리를 확신했던 타케치의 마지막 표정만이 그 날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재밌었던 장면이었다.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부터 바빠지겠네.”
마력이 흘러넘치는 황금의 잔을 장난감처럼 돌리던 타카스기가 이내 손을 멈추었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그가 소리 없이 걸어왔다. 점차 가까워지는 사카모토를 응시하는 눈이 가늘어졌다.
“멋진 열연이었어.”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화내는 것보단 슬퍼해주는 게 더 어울렸을 것 같지만. 뭐, 그들이 알아채지 못했으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
잠시 말이 끊겼다. 같은 배를 탄 사이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한기가 둘 사이에 옅게 깔렸다.
“캐스터가 보이지 않던데. 의도한 건가?”
“타케치는 너까지 포함해서 셋이고, 나는 하나잖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말 정도는 준비하게 해줘야지. 아니면,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고 또 한심하게 굴 작정?”
꿈틀대던 입가가 곧 느리게 휘며 웃었다. 꾸며낸 웃음과 속내를 보이지 않는 미소를 구분할 수 있다는 건 이럴 때만 성가셨다. 어쩔 수 없이 사카모토 료마란 남자가 제게 어떤 존재인지 상기하게 되니까.
“타카스기 군은 말이지, 정말 신경을 긁는 말을 잘해.”
책상을 짚은 사카모토가 상체를 숙였다. 거리가 가까워진다. 가까이서 들여다본 그의 눈 안에 자신이 비치고 있었다. 타카스기는 무심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야. 이제서야. 저 눈이 그가 아니게 된 다음에서야.
“하지만 그런 점이 재미있어.”
손끝이 얼음에 닿은 듯 차갑게 얼어간다. 그것을 들키지 않도록 타카스기는 태연하게 웃었다.
“‘네’ 흥미를 끌었다니 역시 나는 평범한 취급은 안 어울리는 그릇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런 걸로 해두지. ‘나’에 대해 일찍 눈치챘다는 점에서도.”
“그거야 말했잖아. 내가 아는 사카모토 료마는 한심하게 굴지 않는다고.”
사카모토가 재차 웃었다. 이번엔 꽤나 즐거워보이는 기색이었다. 피가 식는다. 그의 거죽을 당장이라도 벗겨내고 토막내어 저잣거리에 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한켠에서 타카스기를 막고 있었다. 그가 사카모토 료마라는 이유로.
그런 이유가 드는 감정마저 같이 도려내어 버리고 싶어질 만큼.
“하지만 타케치는 의심조차 하지 않던데. 그도 제법 철저한 사내잖아? 애초에 연기를 할 것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얀 장갑을 낀 손이 타카스기의 턱을 부드럽게 쥐었다. 뿌리치지 않는 스스로에게 진저리가 났다.
“내가 타카스기 군, 네게만 틈을 보인 걸까 아니면…”
네가 ‘사카모토 료마’에게만 예민한 걸까?
거리가 더 좁혀졌다. 닿을 듯 하다가 흩어지는 숨결마저 느껴질 정도로. 사카모토 료마는 하지 않을 짓이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래. 자신을 이런 눈으로 바라보는 사카모토 료마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재미있어.”
이런 사카모토 료마를 사랑할 수 있을 리 없다.
“타카스기 군은 어때? 확인해보지 않겠어? 이 몸 자체는 틀림없는 사카모토 료마니까. 적어도 시시하진 않을걸.”
눈에 빤히 보이는 수작이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뿌리치고, 적당한 선을 지키라고 그어주면 그만인 일이었다. 사카모토 료마의 대신이라고 즐기기엔 지나치게 같잖은 녀석이다. 하지만 이후의 기신 계획을 생각해본다면. 타카스기는 다음을 위해 기다릴 줄 아는 사내였다. 대놓고 호의를 내보이는 존재를 굳이 물릴 필요는 없었다.
그래. 놀아나주는 척 정도라면.
그 육신을 완전히 부숴버리기 직전까지는.
“……그것참,”
타카스기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가늘게 휜 눈동자에는 상대의 모습이 비치지 않은 채이다.
“―재밌어 보이는 제안이네.”
입술이 닿았다. 타액이 섞이며 호흡을 얽는 내내, 그 붉은 눈은 시리게 얼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