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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데니)핑계
“어르신~ 어르신~” 데니프는 머리가 지끈거려옴을 느꼈다. 벤투스가 저렇게 해맑고 발랄하게 그를 부른다는 건 필시 뭔가를 저질렀거나, 저지를 예정이라거나, 저지르고 있음이 분명했던 까닭이었다. “급한 용건만 받겠네. 뭔가.” 데니프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모처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던 참에 방해를 받아 심란한 것도 있었다. 그의 옆에 폴싹 앉으며 벤투스가 화사하게 웃음 지었다. “깐깐도 하셔라. 모처럼 앉아 계신 모습을 보고 반가워서 찾아왔는데 너무하시네요.” “……난 놀기 위해 앉아 있는 게 아니네. 심심하면 자네도 거들지 그러나.” “에이, 그러지 마시고. 어차피 이거 사흘 내로만 처리하면 되는 일이잖습니까? 다 알아보고 왔다고요. 어르신 성미엔 빨리 처리해버리고 싶으시겠지만~” 벤투스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데니프가 들고 있던 것들이며 무릎에 올려두었던 뭉치까지 낙엽처럼 휘리릭 솟아올랐다. 서류를 잡으러 혼비백산하여 뛰어다니는, 어린애같은 당황함을 기대하진 않았으나, 비어버린 손가락이 움찔 놀라며 힘이 들어가는 건 제법 볼 만했다. 만족스럽게 벤투스가 한 번 더 손을 튕겼다. 따닥, 경쾌한 소리와 함께 춤추듯 날아간 서류들이 저만치 자리한 책상에 우수수 쌓였다. “……마스터 벤투스……” 낮게 깔린 어조가 음산하고 서늘했다. 얼핏 살기마저 느껴지는 분노에도 벤투스는 마냥 웃고 있었다. 에이, 화내지 마시고요, 어르신. 살갑게 말을 붙이며 벤투스가 데니프의 빈 무릎을 장난스레 두드렸다. 데니프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어쩌잔 건가?” “어쩌긴요. 이제 이 무릎 제게 달라는 거죠.” “…….” “서류 같은 재미없는 것보다 제가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어르신을 위해서 애교도 떨고 재롱도 부리고 이야깃거리도 잔뜩 늘어놓을 수 있다고요.” 벤투스가 귀엽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래도 데니프는 요지부동이었다. 눈빛이 되레 더 싸늘해진 것도 같았다. “자네 지금 여기서 내쫓기고 싶나……?” “어르신도 참… 저도 진심인데요.” “이런 장난에 진심 발휘하지 말게.” “딱 한 번만요, 데니프.” 말투가 바뀌었다. 아직도 허공에 떠 있던 그의 손을 벤투스가 조심스레 감싸쥐었다. 데니프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여전히 미소하고 있었으나 장난기를 걷어낸 눈길이 훨씬 부드럽고 진지했다. “모처럼 다시 만났는데, 당신과 제대로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잖습니까. 거기다 쉬지도 못하고 일만 하고 있고. 이대로 가다간 데이트하기도 전에 당신이 먼저 쓰러질까 겁난다고요.” “…….” “그러니 지금만큼은 제게 시간을 빌려주세요, 데니프. 당신과 같이 있고 싶어요.” 느리게 끌려간 손등에 따뜻한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다른 색채로 빛나는 녹안이 그를 담고 미소했다. 천천히 노기를 누그러뜨리던 데니프가, 말없이 그를 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 어린애 같다고 해야할지, 나이를 먹어서 능청스러워졌다고 해야할지. 하여간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아이였다. “…….” 데니프의 시선이 제 무릎을 향했다. 사실, 그의 뜻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비록 꾀를 부리는 것처럼 보여도 그는 제법 마스터 일에 성실했다. 게다가 데니프가 어느 선에서 진심으로 화를 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도 했다. 그런 그가 고작 무릎 베개를 해달라고 어리광을 부릴 리 없음은 데니프가 제일 잘 알았다. 아마도 이유는, 지금 입밖에 낸 것들이겠지. 영악하게도 그는 자신의 진심을 데니프를 위해 이용할 줄 알았다. 그걸 빤히 아는 데니프가 그를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번만일세.” 데니프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어르신이 최고라니까요. 금세 본연의 장난기 많은 모습으로 돌아온 벤투스가 잽싸게 누웠다. 밝은 금발이 조그만 무릎 위에 햇빛처럼 쏟아졌다. 데니프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사락거리며 금발을 스치는 손이 느리고 부드러웠다. “…다음엔 어림도 없네.” 하지만 분명, 다음에도 지고 말겠지. 누워서 소리 없이 웃는 이도, 괜히 입을 꾹 다문 이도 알고 있었다. 내어준 무릎은 그래서 따뜻했고 오가는 눈빛에 불만은 없었다. 비로소 오롯이 둘이 놓인, 한가한 오후가 너머로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