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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3화: 그라세츠)신과 소년 .11
Caption 소설이 아니라 썰로 이어집니다. 주의해주세요. 리랴님(@ryria_HQ)의 허락을 받고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성관계 묘사가 있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와 성인의 관계를 다루는 트리거 요소를 기반으로 합니다. 썰의 특성상 이하는 반말로 진행되므로 양해바랍니다. "그라함 도련님!" 어린 그라함은 고개를 돌렸다. 뱀파이어든 인간이든, 작고 유약한 시절은 피할 수 없는 법. 그도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열살배기 모습이었다. 시종이 급히 손짓했다. "손님이 계십니다.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하지만 인간의 냄새가 났는걸." "그분이 바로 손님이십니다! 주인님과 대화중이시니 방해하시면 안 돼요. 어서요." 그라함은 고개만 갸웃거렸다. 개구진 장난을 칠 궁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에이커 가문은 뱀파이어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귀족 가문. 그의 성에 인간이 들어왔다는 게 이상했을 뿐. 시종이 다시 손짓했다. 그의 표정이 사뭇 엄했다. 지금은 가지 않으면 혼날 것이다. 그라함이 아쉬운 듯 발을 한 걸음 내딛었다. "들어오거라. 그라함." 그라함은 우물쭈물대던 것이 거짓말처럼 후다닥 응접실로 뛰어들었다. 그의 부친이 이곳에 오라는 듯 손짓했다. 손님은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으나 그라함은 타고난 후각으로 그가 꽤 나이를 먹은 노인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도도도 달려 아비의 옆에 앉은 그라함이 눈을 멀뚱이다 탁자를 보았다. 천에 감긴 긴 물건이 놓여 있었다. 눈치를 보던 그라함이 슬쩍 그곳으로 손을 갖다대려 했다. "만지지 말거라. 은이다." 그라함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뒤로 치웠다. 웃음이 나올 법도 한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낯선 손님은 웃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이것은 스승의... 내 아버지의 마지막 바람이기도 했으니까요." 에이커는 쓰게 웃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우리가 무기를 만들어주는 것도 반대했었지. 인간은 어리석고 싸움을 반복할 뿐인 존재다, 그걸 쥐어주면 반드시 은혜와 정을 잊고 벗인 우리를 상처입힐 것이라고." "...마지막에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나머지 여섯 무기를 빼앗았고, 그것들로 뱀파이어를 괴롭히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무기를 준 건 결국 우리 뱀파이어들이었다. 우리를 죽여도 괜찮다고, 너희라면 그렇게 해도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그들은 받아들였던 거야. 실제로 우리 중에도 인간들을 괴롭히는 자들이 있었지." 에이커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어리석다면 그것은 뱀파이어들도 마찬가지다. 너희가 그것을 원한다면, 가진 모든 것으로 우리를 부수면 돼. 그것을 비난할 자격은 우리에게 없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과거 당신들께서 무기를 맡길 때 바랐던 풍경은 이런 것이 아닐 겁니다. 인간들 역시 지금의 참극을 원하고 무기를 받지 않았을 겁니다. 천사의 이름을 걸고 주고받았던 사랑과 믿음은 깨졌습니다. 누군가가 맹세를 깨트린 지금, 앞으로 오랜 나날동안 증오와 복수, 절망과 슬픔이 두 종족 사이에 쌓여가겠지요. 멸망보다도 더 슬픈 일입니다." 어린 그라함으로서는 전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금세 싫증이난 그라함이 천 사이로 드러난 손잡이 부분을 바라보았다. 날이 이어지는 부분엔 천사의 날개가 붙어 있었다. 예쁘다. 그라함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니 엑시아를 다시 당신들께 돌려드리겠습니다." 엑시아. 그라함은 단숨에 그 이름을 외워버렸다. "이 비극의 시간이 지나 두 종족이 서로의 죄를 뇌우치고 용서하며, 손을 맞잡을 날이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요. 누군가는 영영 오지 않는다 말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믿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다시 저희에게 목숨을 맡겨도 괜찮다고 생각했을 때. 그리고 저희가 그렇게 하더라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그리고 그런 당신들의 마음을 저희가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을 때 이 검을 다시 주십시오." 여전히 어려운 말 투성이였다. 그라함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후드 아래로 겨우 드러난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어쩐지 이 어려운 말들을 그라함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이 저희가 다시 사랑할 날의 시작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알렐루야. 몸은 좀 어때?" "좀 피곤한 것 빼곤 괜찮아. 마력도 적당히 안정됐고. 피만 좀 섭취하면 괜찮아질지도..." "당연히 그래야지, 멍청아! 멋대로 나대다 죽어버리면 죽여버린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할렐루야!" "음. 좋아. 멀쩡하군." 닐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고개를 돌렸음. "티에리아 너는?" "당연히 멀쩡하다. 그보다, 그런 말을 물어볼 처지가 아닐 텐데?" "응? 왜?" 인상을 팍 구기고 그를 바라보던 티에리아가 성큼 다가서선 닐의 안대를 꾸욱 눌렀음. 닐이 비명을 흘리며 뒤로 펄쩍 물러섰음. "환자한테 못하는 짓이 없어!!" "환자 같은 짓을 해야 그런 취급을 해주지! 하여간 이번에도 몸도 성치 않은 주제에 뛰어들어선...! 당신은 멍청인가! 아니면 바보!? 아니, 의심은 나쁘지! 당신은 바보고 멍청이다, 닐 디란디!!" "의심이 나쁘다는 말을 그런 데 쓰는 게 아닐 텐데..." 알렐루야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지만 티에리아가 노려보자 찔끔 고개를 돌렸음. 닐이 한숨을 내쉬며 안대를 매만졌음. "나야 괜찮대도. 네 마법 때문에 아프지도 않아." "......" "진짜라니까, 티에리- 아악, 악! 누르면 아파! 아프다고! 그렇게 누르면 안 다친 곳도 아파!!" 티에리아가 흥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음. 얼얼한 눈을 감싸쥐고 고통스러워하던 닐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할렐루야가 느리게 웃었음. "...그래도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네. 생애 다시 없을 길고 험난한 전투였어. 두번 다신 못할 거야... 하고 싶지도 않고." "그건 나도 동감." 겨우 진정한 닐이 머리칼을 쓸어넘겼음. "그래도 결국 알리는 죽었고 원수는 갚았으니 우리로선 해피엔딩인가. 그러고보니 알렐루야, 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난 헌터 일밖에 할 게 없는걸. 앞으로도 계속 헌터로 싸우고 싶어. 나처럼 원치 않게 뱀파이어가 되는 인간들이 없어질 때까지... 닐은?" "글쎄. 사실 원수를 갚으면 라일의 곁에서 평범하게 지낼까 했는데...... 눈도 다쳤으니." 닐이 어깨를 으쓱이다가 허리에 손을 갖다댔음. 그에겐 아직 듀나메스가 남아 있었다. 그걸 가만히 내려다보던 닐이 피식 웃었음. "역시 나도 할 게 이것 뿐이네. 나같이 복수에 이를 가는 녀석들은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시야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래도 싸우고 싶어. 그래도 될까? 티에리아." 갑작스럽게 던져진 질문에 티에리아가 눈썹을 올렸음. 알렐루야도 닐과 함께 그를 보며 똑같은 질문을 함. "그래도 돼? 마력이 충분하지 않으니 전처럼 큐리오스는 못 다루겠지만, 그래도 싸우고 싶은데." "......그걸 왜 나한테 묻지?" "그거야 우리가 예전 같진 않으니까. 이거, 지켜야 하잖아?" 닐이 듀나메스를 가리켜보임. 티에리아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들을 보다가 눈썹을 찡그렸음. 그래서는 금방 들킬 거라던 그라함이 예전에 했던 말이 뇌리를 잠시 스쳐갔음. 그들은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티에리아가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닐과 알렐루야가 말을 이었음. "아, 그래도 역시 거둬가는 건 좀 아쉬운데~ 부모님 유품이기 이전에 좋은 동료였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싸우다 죽어버리면 무기가 뱀파이어들에게 넘어갈 위험이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 이미 무기가 네 개나 넘어간 상태고..." "......럽다." "응?" "시끄럽다!!" 갑자기 티에리아가 빽 소리를 지른 바람에 닐과 알렐루야 둘다 놀랐음. 안경을 꾹 밀어올린 티에리아가 어딘지 화가 난 표정으로 말을 두두두 쏟아냈음. "감히 누가 그 무기의 소유권을 인정해줬는데! 예전같지 않다느니 뭐니 하는 말로 간단히 포기해!? 남에게 넘기기만 해봐라! 바체로 저세상 끝까지 날려주지!" "아니, 잠깐, 티에리아, 너 평소 하던 거랑 얘기가 다르ㅡ" "시끄럽다고 했다!!" 빽 소리를 지른 티에리아가 씩씩대다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토해냈음. 말문이 막힌 닐과 어리둥절해진 알렐루야만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음. "당신들은, 내가 인정한, 최고의 헌터들이니까!! 내가 먼저 얘기 꺼내기 전엔 그런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 알겠어!?" "......어...네...?" "목소리 작아!" "넵!! 알겠습니다!!" 닐과 알렐루야가 급히 외쳤음. 그러고도 한참 분이 안 풀린 것처럼 뚱하게 그들을 노려보던 티에리아가 휙 몸을 돌렸음. "알아들었으면 간다. 다음 목표물 정보 탐색부터 시작하겠어." "엣, 티에리아! 너 아직 마력도 다 안돌아왔으면서 그건..." "괜찮다고 했을 텐데?" 급히 그를 따라간 알렐루야와 티에리아가 투닥거렸음. 얼떨떨하게 앞서가는 둘을 바라보던 닐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깍지낀 손으로 머리를 받쳤음. 어쩐지 즐거운 표정이었다.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그래도 나쁘진 않은 결말이네. 한쪽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닐이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다가 뒤를 돌아보았음. 미소가 조금 지워졌다. 이제 더 관여할 일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쉽게는 못 잊을 것 같은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너에게도 그런 결말이었을까?" "세츠나." 작게 중얼거린 말이 바람에 떠밀려 사라졌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차라리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바라서 억지로 붙들고 있었던 침묵. 그라함은 자신이 무자비하게 뜯어냈던 목덜미를 생각했다. 자신에게 겨누어졌던 검을, 끝내 자신을 베어내지 못하고 웃던 소년의 얼굴을. 마지막 순간 그는 뭐라고 했더라. 사랑한다고 했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 자에게. 바보처럼. 엑시아를 처음 주었을 때부터, 어쩌면 처음 만났던 그 날부터 자신의 목숨은 그의 것이었는데. 너라면 날 죽여도 기꺼이 용서하겠노라고, 그것마저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했기에 손에 쥐어주었던 것이었는데. 마지막 순간 자신은 확실히 그를 베었다. 새빨갛게 터지는 피를 뒤집어썼던 것을 기억했다. 기억했기에 오히려 재앙이었다. 차라리 계속 이성을 잃은 채였다면 이렇게 괴롭진 않았을 텐데. 아니면 좀 더 일찍 의식을 차렸더라면. 그를 베어내기 전에 막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라함은 서서히 깨어나는 정신을 막을 수 없었다. 금이 어설프게 간 새하얀 천장이 보인 게 절망스러웠다. 이 삶에 의미 같은 게 있을까. 살아난 자신을 저주하며 그라함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 한쪽이 욱씬거렸지만 그건 고통도 아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라함은 다시 눈을 떴다. 우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급하게 돌린 목이 옆을 향했다. 이건, 이 느낌은. 경악으로 떠졌던 눈이 세차게 동요했다가 일그러졌다. 소년은 옆에 있었다. "......ㅡ" 벅찬 마음에 말도 못하고, 그라함은 그를 온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소년에게선 미약한 숨소리가 났다. 잠이 든 걸까, 아니면 기절한 채로 깨어나지 못한 걸까. 그래도 살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라함은 세상의 모든 것에게 감사했다. "이제 일어났네. 잠꾸러기." 그라함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자에 앉은 빌리가 핼슥한 얼굴로 웃었다. "일주일을 내리 잤어. 알아? 기껏 귀하신 분이 여기까지 와줬는데 인사도 못하다니." "귀한 분...?" "커티 마네킹. 널 살린 약을 제조한 마법사 말이야. 집에 개를 놔두고 왔다면서 급히 돌아갔지만." 빌리가 뺨을 문지르다가 덧붙였다. "깨어나면 세츠나부터 혼내라고 했는데, 네가 먼저 깨어났군. 아무튼 다행이야. 괜찮다는 말은 들었지만 역시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 "아, 세츠나를 걱정하는 거라면 안심해. 너보다 괜찮을 거라고 하던데. 대신 많은 마력을 썼을 테니까 금방은 못 일어날 거라고." "...그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라함이 그를 조심스레 눕히곤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떻게 된 거지? 마지막 순간에." "기억 안 나?" 그라함은 고개만 끄덕였다. 소년을 베어내던 순간을 입에 올리기엔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빌리가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세츠나의 피를 뒤집어쓰고 나서 너는 한동안 발작했어. 하지만 세츠나에게 더 손을 대지는 않더군. 아마 그때부터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던 거겠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 기절해서 쓰러졌고... 지금은 보시다시피. 둘이 따로 눕히고 싶었는데, 네가 그를 너무 꼭 잡고 있어서 말이야." "......" "커티의 말로는 세츠나의 피가 너를 살렸다고 하더군. 그의 피가 약과 섞이면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고." 커티의 약은 인간으로서의 피를 강화시키는 것. 당연히 그가 가진 마력도 깎여나가야 했다. 하지만 세츠나의 피는 그 약과 융합하면서 자신의 몸에 있던 그라함의 피와 알리의 타액마저 같이 흡수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마력에 약하기 때문에 마력을 튕겨내지 못하고 억지로 담고 있던 뱀파이어의 피와, 강하기 때문에 마력을 튕겨낼 수 없던 인간의 피가 섞이며 그는 마력을 전부 흡수하면서도 버틸 수 있는 몸이 되어버렸다. 그라함의 칼에 크게 베였으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폭발적인 마력이 그를 치유해버렸기 때문. 그라함의 정신을 되돌리는 데 성공한 것도 세츠나의 피의 힘이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커티는 이를 기적이라고 불렀다. "뭐, 운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역시 둘다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건 기적이란 말이 더 어울리겠지." 빌리가 희미하게 웃곤 그라함을 보았다. "얼굴의 흉터는 낫지 않을 것 같지만." 그라함이 그제야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얼굴의 왼쪽이 화끈거렸다. 시력엔 이상이 없었지만, 아무래도 전투 중에 크게 베인 것 같았다. "네가 삼킨 세츠나의 피가 너무 강력해서, 아마 회복력이나 마력은 크게 상실했을 거라더군. 앞으로 어떻게 바뀔 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했지만." "......흉터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한숨을 내쉬며 그라함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소년이 살아 있다면. 그걸로 됐어." "...너답군. 그라함." 조금 웃은 빌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튼, 괜찮아 보이니 난 좀 쉬어야겠어. 늘 쓰던 방 빌릴게." "...아아. 고맙다. 푹 쉬어라, 빌리." 방을 나서던 빌리가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얼굴은 평소와 달라졌지만, 그래도 자신이 아는 그라함 에이커였다. 안도의 미소가 겨우 그에게 번졌다. "살아돌아온 걸 환영한다. 그라함." 그라함이 눈을 깜빡이다가 마주 웃었다. 방을 나선 빌리가 문을 닫았다. 그제야 세츠나에게 고개를 돌린 그라함이 가만히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저보다 이렇게 작고 사랑스러운 그를 감히 다치게 했다니. 자신보다 더 쉽게 나았다지만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라함은 눈을 찡그렸다. 소년이 살아 있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로 자살을 택했을 터였다. 그가 없는 삶은 제게 의미가 없으니까. "......" 문득 뭐라 웅얼거리던 세츠나가 느리게 눈을 떴다. 감겨 있던 눈꺼풀이 들어올려지는 그 짧은 순간이 그렇게 길 수가 없었다. 그라함이 아무 말도 못하고 그와 눈을 맞추었다. 깜빡, 깜빡, 느리게 움직이다가 이내 살짝 동요하던 눈이 겨우 웃음을 띠우며 둥글게 휘었다. 저 붉고 아름다운 눈. 자신이 비치는 눈. 내가 사랑하는 소년의 눈. "그라함." 그라함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끌어안았다. 세츠나가 손을 올려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입을 열었다 닫기를 한참 반복하던 그라함이 겨우 그를 불렀다. "...소년." "응. 보고 싶었어." 너무도 간단하고 아픈 인사. 세츠나를 끌어안은 팔이 떨렸다. 이 이상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품 안에 안긴 온기를 가만히 받아내던 그라함이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를 올려다보던 세츠나가 문득 걱정스러운 얼굴로 흉터가 남은 곳을 쓸어내렸다. "흉터가..." "신경 쓰지 마라. 네가 받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웃은 그라함이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세츠나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이내 표정을 풀었다. 지금은 확실히 흉터에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살아난 날을, 재회한 지금을 즐길 때. 그라함이 제 얼굴에 닿은 손을 꼭 잡았다. "...너는 언제나 날 신이라고 불렀지만... 지금만큼은 네가 신이군. 내게 목숨을 줬어. 살아갈 의미를 줬어. 고맙다.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세츠나가 옅게 웃었다. "말했었잖아. 나도 당신의 도움이 되고 싶다고." "너무 큰 도움을 받았는데." "나도 당신 덕분에 살았고, 살 의미를 얻었으니까. 그걸 되돌려준 것 뿐이야."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말만 골라 하는지." 손에 뺨을 부비며 그라함이 중얼거렸다. 작게 웃은 세츠나가 다시 그를 끌어안았다. 그라함도 그를 마주안았다. 비로소 꼭 맞닿은 포옹이 따뜻했다. 앞으로 영영 풀리지 않을 두 팔이 단단했다. 그라함이 소리내어 웃었다. "앞으로는 나도 신이라고 부를까?" "아니. 소년이 좋아." 세츠나가 웃곤 입술을 맞대왔다. 포개어지기 직전 속삭인 말이 작고도 또렷해, 그라함은 다시금 활짝 웃었다. 행복했다. 그 어느때보다도. "앞으로도 영원히, 당신의 소년으로 남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