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로 돌아가기
993화: 그라세츠)신과 소년 .07
Caption 소설이 아니라 썰로 이어집니다. 주의해주세요. 리랴님(@ryria_HQ)의 허락을 받고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성관계 묘사가 있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와 성인의 관계를 다루는 트리거 요소를 기반으로 합니다. 썰의 특성상 이하는 반말로 진행되므로 양해바랍니다. "......" "네가 그럴 건 없어. 스메라기." 빌리의 말에 얼굴을 내내 감싸고 있던 스메라기가 한숨을 내쉬었음. "하지만 내 책임도 있어. 난 그들에게 정보를 팔았으니까." "결국 갈지말지 정한 건 그들의 몫이었지. 네가 알려주지 않았어도 그들은 갔을 거야." "그랬겠지만......" 말끝을 흐리던 스메라기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빌리를 보았음. 그는 사실 스메라기보다 꼴이 엉망이었음. 세츠나에게 입은 상처는 진작에 다 나았음에도. "...알리 알 서셰스는 결국 죽은 거지?" "그래. 더는 재생하지 못하도록 난도질을 했으니까." "...하지만 그 피해가 너무 커. 닐은 한쪽 눈을 잃었고, 티에리아는 마력의 일부를 영영 잃었지. 알렐루야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어. 깨어난 건 할렐루야뿐. 그는... 알렐루야가 깨어나지 않으면 자살한다고 했어. 더는, 살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스메라기가 얼굴을 문질렀음. "...그는... 뭘 잃었어?" "......." "그라함은 뭘 잃은 거야? 빌리." 빌리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음. 이어지는 말은 지독히도 담담해서 오히려 비극적이었다. "아마도, 이성." 왜 아마도인지 스메라기는 물을 수 없었다. 빌리가 자기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까보다 더 참담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치광이의 피가 그의 삶을 빼앗았어. 동족의 피를 마신 자는 영영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해. 지금은 그래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주기가 점점 짧아질 거야." 알리는 죽었을진대 괴물은 죽지 않았다. 스메라기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빌리의 목소리가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죽일 수밖에 없어." * 그 이후 아마도 삼 주 같은, 석 달 같던 사흘. 소스라치게 놀라서 잠에서 깬 세츠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렸음. 하지만 옆자리는 비어 있었음. 분명 어젯밤에도 같이 잠들었었는데. 침대를 박차고 일어서서 세츠나는 침실 밖으로 나왔음. 피로도 가시지 않은 얼굴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음. 어디 있어, 그라함? 수없이 중얼거린 말이 비명으로 변해 터져나오기 직전이었음. 마지막으로 벌컥 열어젖힌 문은 그라함이 일하던 집무실. 안으로 뛰쳐들어간 세츠나는 그제야 전신에 힘이 탁 풀려서 넘어질 뻔함. "아, 소년. 일어났나?" 그라함은 앉아서 일을 하고 있었음.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쾌활하고 밝기까지 했음.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에게 다가가던 세츠나는 뭔가를 발견하고 턱 멈춰섰음. "없어서 놀랐나보군. 메모를 남겨놓고 왔는데." "......" "물론 깰 때까지 옆에 있어줬어야 했지만 말이야. 바쁘다 보니 그럴 겨를이 없었어. 미안하다." 그라함이 조금 웃고는 마저 서류를 써내려감. 아무 말도 못하던 세츠나가 비틀거리듯 다가감. "...그라함." "응? 왜 그러지?" "...손이..." "아, 이거?" 그라함이 오른손을 흔들어보였음. 난간에 단단하게 묶어놓은 손은 그런다고 풀리지 않았음.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에 세츠나는 더 말도 못 잇고 그라함만 바라봤음. "아무래도 이래놓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말이야. 빌리가 올 동안만 이러고 있으려고 한다." "......" "그러니 걱정 마라. 소년에게 손을 대는 일은 없도록 할 테니까-" 말을 하면서 세츠나를 돌아본 그라함이 말을 삼키곤 쓰게 웃었음. "...그런 표정 하지 마라." "......" "지금은 안아서 달래줄 수도 없어. 소년." 울 것처럼 눈을 찡그리고 있던 세츠나가 그에게 다가가서 그라함을 와락 끌어안았음. 잠시 멈칫했던 그라함이 한숨을 내쉬며 그를 조심스럽게 밀어냈음. 평소라면 세츠나가 다가오기 전에 그가 먼저 안아줬겠지만. "소년.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아직도 모르겠어." 세츠나가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그라함을 더 끌어안았음. "왜... 왜 당신이 이런 일을 당해야 해. 어째서..." "...소년."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대체 왜..." 말없이 그의 품에 안겨 있던 그라함이 손을 뻗어 그의 등을 도닥였음. "죄라면 지금도 죄를 짓고 있다만. 소년을 울리고 있잖나." "농담하지 마..." "농담 아니다. 진심이야." 그라함이 세츠나의 뺨에 살짝 키스했음.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세츠나가 고개를 들자 그라함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후회하지 않아, 소년. 너는 무사히 구해냈으니까. 알리가 마지막 순간 네가 아니라 나를 노린 것에 감사하고 싶을 정도다." "그걸 말이라고...!!" "난 말이다, 소년." 그라함이 그를 끌어다가 이마를 맞댔음. "처음 소년을 만났을 때, 그저 맛있는 먹잇감 정도로만 생각했었어." "......" "그래서 뱀파이어로 만들었고, 곁에 두려고 했던 거야. 그런 점에선, 그래. 알리와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르지. 소년의 달콤한 피만을 탐냈으니까." 그라함이 부드럽게 웃고는 입술에 한 번 더 키스했음. "하지만 함께 있으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네가 나를 신이라고 불러줬으니까. 나를 구원자라고 불러주는 너를 진심으로 구원해주고 싶었어. 그러고 싶을 만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해." "...그라함..." "내 비원은 이루어졌다. 이제 너만 행복하다면 나는 더 바랄 게 없어." "그렇게 말하지 마." 세츠나가 고개를 흔들었음. 나만 두고 가버릴 것처럼 말하지 마. 뺨에 닿은 손을 꼭 쥐며 세츠나가 눈을 일그러뜨렸다. "곁에 있어주겠다고 했잖아..." "..." "당신이 없으면 내 행복도 없어. 혼자 행복해지는 법 같은 거 몰라. 안 가르쳐줬잖아. 나는 영원히 당신 거라고 했잖아." "...세츠나." 그라함이 쓰게 웃으며 그를 불렀음. 그러나 다음 순간, 그라함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경련하듯 떨리는 손. 벌어진 입에서 나오는 고통스러운 신음. 이상을 감지한 세츠나가 급히 그를 불렀다. "그라함-" 쾅!! 그리고 말이 끝나기 전에, 그라함의 왼손이 먼저 그의 멱살을 낚아채어 책상에 들이박았음. 머리가 찡 울릴 정도의 지독한 힘. 세츠나가 비명을 지른 순간 그라함이 먼저 그의 목덜미에 이를 박았음. 드러난 목덜미를 찢어낼 듯이 짓씹어대는 이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졌음. "악....!!" 절로 비명을 지른 세츠나가 발버둥쳤음. 하지만 원래도 세츠나보다 셌던 그라함을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음. 그라함의 손목을 묶어놨던 난간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서져내렸음. 영혼까지 빨려나가는 듯한 흡혈에 세츠나가 그를 붙잡고 숨을 헐떡였음. 아무리 화가 나도 그라함은 이렇게까지 그를 거칠게 다룬 적이 없었음. 피에 젖은 입술에서 짐승 같은 그르렁거림이 새어나옴. 세츠나가 아는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라, 함- 아악!!" 그의 어깨를 잡고 밀어내려 애쓰던 세츠나가 비명을 지름. 저를 붙잡은 손목을 으스러뜨릴 듯이 쥔 그라함이 다른 손으로 그의 옷을 찢어발겼음. 이미 가슴팍은 목덜미에서 흘러넘친 피때문에 엉망이었음. 물기가 어려 있던 눈이 공포로 떨렸음. "싫어... 그라함, 제발...!!" 그라함이 다시 으르렁거렸음. 어느새 짐승처럼 날카롭게 손톱이 자란 손이 손목에 달려 대롱거리는 난간을 집어들었음. 이대로 죽는 건가. 나중에 당신이 정신 차렸을 때 날 보면 어떡하지. 몰려오는 슬픔에 세츠나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음. 콰직!! 그리고 얼굴에 피가 튀었음. 자신의 피가 아니었다. 세츠나는 퍼뜩 눈을 떴음. 그라함이 움켜쥔 난간이 꿰뚫은 건 그의 오른손. 세츠나가 아니었음. 끔찍한 광경에 옷을 추스를 새도 없이 세츠나가 다시 그를 부르려 할 때였음. "...나가라, 소년...... 당장..." 여전히 거친 어조에 실린 목소리. 세츠나가 몸을 겨우 일으키며 그를 다시 불렀음. "그라함," "나가!!" 쾅. 그라함이 휘두른 손에 책상 한켠이 와지끈 무너져내렸음. 자신의 왼손에 여전히 난간을 박아넣은 그라함이 비틀거리며 주저앉았음.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제발..." "......" "여기서, 나가... 부탁이다..." 그 말을 어떻게 더 거역할 수 있을까. 비틀거리면서 일어난 세츠나가 너덜거리는 팔뚝을 붙잡고는 방을 나섰음. 마지막으로 문을 닫기 전, 돌아본 그는 아직도 제 팔을 찍어누르고 있었음. 세츠나가 떨리는 손으로 문을 닫고는 그 앞에 무너져내렸음. 그라함. 그라함. 수없이 그의 이름을 되뇌는 목소리가 자꾸만 떨렸다. 그리고 안에서 들려오는, 맹수의 포효 같은 끔찍한 절규. 기어이 떨어진 눈물이 문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상황이 일단락된 건 빌리가 도착한 뒤였음. 그는 에이커의 성 아래에 있는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음. 입에는 재갈을 물린 채로, 양 팔은 결박된 채로, 무릎은 꿇려진 채로. 세츠나는 차라리 기절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음. 그가 언제 다시 정신을 차릴까. 아니면 영원히 차릴 수 없을까. 빌리는 침통하게 알 수 없다고 했다. "...세츠나." "......" "이미 알고 있겠지만, 네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말하지 마." 세츠나는 고개를 흔들었음. 그는 아직까지도 피로 흠뻑 젖은 옷차림이었음. "난 그런 거 몰라. 하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 "신을 죽이는 방법 같은 거 몰라." 빌리는 한숨을 내쉬었음. 그를 구하겠다고 아픈 몸을 이끌고 그 먼곳까지 달려나갔던 세츠나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그는 짐작도 할 수 없었음. 하지만 그래도 말할 수밖에 없었음. "......그를 편하게 해줄 건 너밖에 없어. 언제 구속을 풀고 날뛸지 모르지. 귀족들은 그라함을 죽이는 것에 찬성하고 있어." "......" "그가 너무 강한 뱀파이어니까. 더군다나 알리처럼 이성을 유지하지도 못하는 상태다. 그가 날뛰기 시작하면 그때야말로 뱀파이어와 인간 모두 전멸이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세츠나가 제일 잘 알고 있었음. 하지만 그래도 그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음. 차라리 그의 손에 죽었으면 죽었지, 그를 죽이는 건 상상만 해도 고통스러웠음. 고개를 든 세츠나가 붉은 눈으로 빌리를 바라보았음. "...내가 끝까지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지?" "그때는..." "누군가가 그를 죽이는 것조차 반대한다면?" "...진심인가?" "진심이야. 누가 그를 죽이러 온다면 전부 죽여버릴 거야." 침통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던 빌리가 또 한숨을 내쉬었음. "그게 그에게 더 비참한 죽음이 될 거다." "..." "광기를 가라앉히는 법을 모르니 그를 계속 묶어둘 수밖에 없어. 당연히 피의 공급도 불가능하지. 저대로 묶여서 죽어갈 거다." "......" "뱀파이어에게 아사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야. 자신들이 원할 때 언제고 피를 빨 수 있는 자들이니까. ...네가 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라함이라면 분명 그 방식을 택하겠지만." 세츠나가 느리게 자신의 얼굴을 감싸쥐었음. 그라함이라면 분명 세츠나가 고통스러워하는 건 싫어할 테니까, 그럴지도 몰랐음. 하지만 정말로 이런 결말뿐인가. 서로를 구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저 둘이서 아무 걱정 없이 편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대신 죽었으면 좋겠어." 세츠나가 비참하게 중얼거렸음. 더 아무 말도 못하고 빌리가 그를 바라보았음. 누구도 아닌 자신의 친구의 일이었는데 도와줄 수 없어 슬픈 건 그도 마찬가지였음. 무거운 침묵이 길어져갔음. 세츠나의 어깨의 떨림이 점차 심해져갔다. "그건 곤란해, 세츠나." 세츠나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음. "아직 네가 할 일이 있는 것 같으니까." 빌리도 덩달아 고개를 돌렸음. 문가에 서 있는 건 그들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음.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지만. 닐이 가볍게 손을 들어보였음. "바쁘니 오랜만이라서 반갑단 인사는 생략할게. 미스 스메라기의 호출이다. 꼭 오지 않아도 되지만, 가급적 와줬으면 한다는군." "......" 세츠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음. 상황이 상황인데 그가 더 움직이고 싶을 리가 없었음. 하지만 다음 말을 듣고서 세츠나는 벌떡 일어섰다. 언제 기운이 빠졌었느냐는 것처럼. 어느새 꽉 쥐어진 주먹이 잘게 떨렸음. 닐이 격려하듯 조금 웃어보였다. "마지막 남은 희망에 걸어볼 자신이 있다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