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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 그라함 x 인간→흡혈귀화 세츠나의 이야기입니다.
썰풀어주신 리랴님(@Ryria_HQ)의 허락 받고 썼습니다 감사합니다^^)9
그라세츠 사귑니다 다들 더블오 극장판 봐주세요 제발
키스씬 묘사 있습니다.
인간들이 멋대로 죽어버리는 건 그라함에겐 흔한 일이었다. 서로의 흉을 잡아 싸우다 죽는다. 이유 없이 공격당해 죽는다. 혹은 원한이나 미움을 사서 죽는다. 아니면, 멍청하게도 우월한 '뱀파이어'를 건드려 죽는다. 그런 존재로서 장생해온 그에게 인간이란 서로를 미워할 줄만 아는 동물이었다. 설령 타협하더라도 이익을 위해 손을 잡을 뿐, 동포를 위해 목숨을 걸진 않는다. 그가 '식사'를 할 때도 그랬다. 한 명이 잡히면 도망가는 나머지들은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상대가 처절히 울부짖으며 그들을 저주하거나 구원을 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라함은 어느 순간부터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오랜 친우인 빌리가 인간 여성에게 환심을 사려 열심인 광경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동족인 뱀파이어들에게 존경과 애정을 듬뿍 받지만 그 이하의 생물에겐 눈길도 주지 않는 삶. 그라함 에이커의 나날은 언제나 그러했었다. 적어도 이 날이 오기 전까지는.
"……."
그라함은 말없이 제 발치에 놓인 것을 내려다보았다. 가엾게도 움칫거리며 색색 숨을 몰아쉬는 손등이 한없이 작았다. 반쯤 감겨 있는 적갈색의 눈엔 이미 생기가 없었다. 아침만 해도 부드러웠을 흑발은 목덜미에서 흐른 피에 젖어 뻗뻗하게 굳었고, 입술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누가 봐도 고의로 내었을 상처엔 붉은 딱지가 무르게 내리앉았지만, 누가 봐도 그것의 생사는 자명했다. 그대로 두면 반 시간도 못 되어 죽을 터였다.
"…―."
자그마한 입술이 달싹이다가 살풋 떨렸다. 겁을 내는 것일까.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걸까. 그라함은 드물게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한손에 다 들어오도록 작은 목덜미가 아기새처럼 처연히 떨렸다. 닿은 손가락의 한기에 움츠러들듯, 곱게 뻗은 속눈썹조차도 동요하고 있었다. 그라함은 피가 묻은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미지근해졌음에도 맛을 보기엔 충분했다.
"…달군."
그라함이 중얼거렸다. 일순 금빛으로 빛난 눈동자가 혼란과 만족을 동시에 담아냈다. 이어 느리게 가늘어지는 동공은 신비하게도 끓는 듯한 녹색을 띠고 있었다. 되풀이되는 단어가 묘한 흥분으로 물들었다.
"달아."
수백 년을 살며 그라함은 지금 같은 맛을 본 적이 없었다. 탯줄도 못 자른 어린 아기부터 늙은 노인까지, 가리지 않고 피를 빨아온 세월이 거짓말 같았다. 죽어가는 소년의 핏방울이 아직도 혀를 맴돌아 알알할 정도였다. 그라함은 입술을 핥았다. 언제나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대처해왔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다. 송곳니가 가려웠다. 아주 조금 맛보았던 피맛으로 샘솟는 갈증에 목이 뜨거웠다. 하지만 당장 휘몰아치는 욕망에 휩쓸렸다간 이 소년의 피를 마른 거죽이 되도록 빨아버릴 게 분명했다. 그토록 매혹적으로 달콤한 맛이었다. 그라함은 절로 숙여지는 고개를 다잡고 생각했다. 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지만 그라함은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는 뱀파이어였으니까.
"죽기엔 아깝구나. 소년."
그라함은 제 손바닥을 손톱으로 길게 그었다. 일부러 날카롭게 세운 끝을 따라 붉은 선이 물씬 흘러나왔다. 인간의 것과 다름없는 진한 비린내음에 소년이 느리게 움찔거렸다.
"내가 살려주마. 대신 이 순간 이후로 너의 피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전부 내 것이 될 거다."
줄곧 땅에 처박혀 있던 시선이 느리게 움직였다. 검게 굳어진 얼룩 위로 떨어지는 선홍의 피가 선명했다. 소년이 입을 벌렸다. 갈라지고 마른 음성이었지만 그라함의 귀는 가느다란 소리조차 놓치지 않았다.
"…이야…?"
"음?"
"…당… 신은…… 신… 이야……?"
그라함이 눈을 깜빡였다. 점점이 떨어지는 붉은 물방울이 마른 입술을 와인처럼 적셨다. 한 줌처럼 조그만 손이 힘없이 오므라들었다.
"세상에… 신, 같은… 건…… 없다고…."
"……."
"생각… 했었는데……."
길게 늘어지던 목소리가 끊겼다. 그 뒤를 잇는 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호쾌하고 명랑한 폭소였다. 어린 인간은 그러지 못했다. 그저 반쯤 죽은 얼굴을 하고 즐거이 웃는 사내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라함은 소년을 한 손으로 가볍게 안아올렸다. 고작 열 살 남짓 되었을 몸뚱이가 천인형처럼 힘없이 기울었다.
"신을 바랐나? 소년."
"……."
"생사의 경계에서 그런 허무맹랑한 것을 원하다니, 정말 인간답구나."
그라함이 피가 흥건한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하지만 싫지 않아. 신기한 일이군."
빛을 잃은 눈동자에 제 피를 머금은 이의 얼굴이 드리워졌다. 입술이 닿는 건 금방이었다. 조그맣고 까슬한 살갗을 문질러 벌린 그라함이 조금씩 혈액을 흘려넣었다. 거부할 새도 없이 흘러드는 피는, 색처럼 비리고 짙은 맛이었다. 안개 낀 구슬 같던 동공이 만개하듯 서서히 커다래졌다. 늘어져 있던 손 끝이 잘게 떨렸다. 죽음을 앞둔 인간의 바르작거림은 아니었다.
"―내가 신이 되어주마."
긴 입맞춤 끝에 들려온 속삭임이 귓가를 가득 울렸다. 소년은 이제 늘어져 있지도 무겁게 안겨 있지도 않았다. 제 몸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실감하듯, 생기가 만연한 낯빛엔 충격과 혼란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라함이 미소했다. 밝은 금발과 녹안이 자아내는 아름답고 상냥한 웃음을 보며, 뭔가를 말하려던 소년이 문득 숨을 들이켜며 그를 붙들었다. 목덜미를 찌르던 단검과는 다른 통증이 그를 뒤흔들고 있었다.
"아, 아…!!"
금세 눈물이 고인 눈이 마법처럼 금빛으로 반짝이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커다랗게 벌어진 입술 밑으로는 하얀 송곳니가 뾰족히 자라고 있었다. 제 품에 안겨 발버둥치는 소년을 내려다보던 그라함이 만족스레 웃었다.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였다.
"그러니 너도,"
"힉, 아…! 아윽, 악……!"
"나만의 소년이 되거라."
그라함이 다시 피를 머금고 입을 맞추었다. 숨을 헐떡이던 소년이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아까와 달리 젖을 보채는 아이처럼 먼저 사내의 입을 파고드는 혀가 게걸스러웠다. 갈증을 토로하는 송곳니가 기어이 그의 입술에 상처를 냈다. 정말로 자애로운 신이라도 된 양,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라함이 그를 달래듯 혀를 얽었다. 입안을 채운 혈향이 가시다못해 밍밍해지도록 길어지는 입맞춤이 농밀하고 짙었다.
한참 뒤에야 소년을 놓아준 그라함이 눈물로 흠뻑 젖은 뺨을 느리게 쓸어주며 입맛을 다셨다. 쓰러지듯 그라함에게 기댄 소년이 숨을 색색거렸다. 완연한 금빛으로 영롱하던 눈동자는 어느새 본연의 적갈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소년의 등을 토닥이던 그라함의 손이 천천히 피로 얼룩진 목덜미로 다가왔다. 상처 하나 없는 매끈한 살갗 너머의 맥박은 조금 빨랐지만 나쁘지 않았다. 드러난 목선을 시선과 손으로 내리훑으며 그라함이 입술을 핥았다. 이번엔 그의 차례였다. 뭔가를 예감한듯, 그라함의 옷자락을 꼭 움켜쥔 소년이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나의, 신…."
그 애처로움에 그라함은 조금 웃고 말았다. 그러나 그를 속인 죄책감은 없었다. 그는 지금 진정 신이 되었고, 그는 자신만의 소년이 되었으니까. 그제야 그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지만, 그라함은 질문을 나중으로 미뤄두었다. 별로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다. 부를 호칭은 이미 충분했고― 무엇보다, 기다렸던 식사 시간이 코앞이었으니까.
"그래. 앞으로 쭉, 나와 함께하자. 소년."
상냥한 말에 소년이 흠칫 떤 것도 잠시, 이내 어둠을 타고 무언가가 여린 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들렸다. 피로 젖은 작은 입술이 꽃잎처럼 벌어졌다. 운명적인 찰나가 영원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날, 그라함은 소년에게 '세츠나 F 세이에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소년이 맞은 생애 두 번째의 생일 선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