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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5화: 현성독자/독자중혁)Ruins
Caption 오마이갓... 캡션이 날아간 줄 모르고 있다가 다급히 추가하는 캡션입니다ㅠ.ㅠ 전지적독자시점 281화까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성독자+독자중혁이지만 김독자는 나오지 않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부숴진 콘크리트 더미가 쏟아져내렸다. 진작에 폐허가 된 빌딩에서 마른 흙먼지로 뒤덮인 비명이 시끄러웠다. 성인 손에 겨우 다잡힐 듯한 쇠막대가 매캐한 바람을 갈랐다. 바닥에 나뒹굴던 시멘트 덩어리가 녹은 눈처럼 으깨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재해 같은 풍경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하품을 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안타까워합니다.] 성좌들의 메시지는 최근 손에 꼽을 만큼 줄어 있었다. 목적 없는 폭력이 난무하는 광경을 꾸준히 지켜볼 이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도 귀찮아, 중혁은 그것을 본 체도 않고 쥔 쇠막대를 내려다보았다. 한때 표지판으로서 제 역할에 충실했던 그것은 곧은 허리를 잃고 무참히 휘어 있었다. 미련 없이 내던지려던 중혁이, 돌연 힘을 쥐며 막대를 내던졌다. 창이 되기엔 비참히 휜 모양이 꼴사나웠으나, 육중한 무게에 근력이 가해진 근력은 새로운 폭력이 되기에 충분했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화산처럼 콘크리트 조각들이 튀었다. 중혁의 검은 코트와 머리칼 위로도 재앙 같은 파편들이 쏟아졌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중혁을 향해 다가오던 누군가도 마찬가지였다. "분은 좀 풀리셨습니까?" 중혁은 대답하는 대신 눈만 돌려 다가오는 사내를 쏘아보았다. 적당한 거리에서 멈춘 현성이 근처의 잔해에 주저앉았다. 중혁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용건이지." 차라리 듣기 싫으니 꺼지라고 말해주는 게 좋았을 듯한 질문이었다. 현성은 지친 얼굴로 턱을 문질렀다. 군데군데 남은 수염이 까칠하게 손을 찔렀다. 문득 살갗이 따끔했다. 면도 중에 베인 상처가 그제야 떠올랐다. 수 초도 기다려주지 않고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빛을 깨달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할 말 없으면 가라." 평소의 이현성이었다면 굳이 중혁을 찾아와 말을 거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중혁이 안면도 튼, 나름 오래도록 함께 험난한 시나리오를 거쳐온 상대에게 저렇게 흉흉한 살기를 뿜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의 현성은 너덜너덜하게 지쳐 있었고, 중혁은 지나치게 예리한 나머지 부러질 듯 얇았다. 현성이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며칠을 안 감은 것처럼 머리카락이 무겁게 손가락에 감겼다. "걱정되서 왔습니다. 요즘 계속 그렇게 부수기만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다 몸 상하십니다." "상관 없다." "다른 분들은 걱정하실 겁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욕지기처럼 차오르는 말을 뱉어내려던 중혁은 입을 다물었다. 살기가 가라앉지 않은 눈이 애꿎은 잔해를 향했다. 엉망으로 난도질 된 건물 파편들에선 아직도 뿌연 먼지가 일렁이고 있었다. "잃어버리게 될까봐요." 현성의 목소리는 낮고 탁했다. 다시 그에게 시선을 옮긴 중혁은 그가 방패를 두고 왔음을 알았다. 그의 성격상 그걸 볼 때마다 떠오르는 빈 자리를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음은 자명했다. 불쑥 다시 화가 치밀었다. 꽤 오래 전부터 생긴 나쁜 버릇이었다. 대상이 명확했음에도 엉뚱한 곳에 쏟아질 뿐인 분노. 중혁은 저도 모르게 뭔가를 찾아 움켜쥐었다. 억센 손아귀에 잡힌 시계가 부르르 떨었다. 현성이 또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중혁은 그대로 으깨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중혁 씨도 좀 자신을 돌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모두를 위해서도, 중혁 씨를 위해서도요." 중혁은 느리게 손을 풀었다. 너무 갑작스럽게 힘을 준 탓에 손마디가 쿡쿡 아렸다. 현성이 조금 인상을 쓰며 입을 다물었다. 아픔으로 물들었던 눈에 차오르는 무거운 우울이 그의 생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중혁은 반사적으로 끓는 화를 억눌렀다. 그래도 목소리까지 다듬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내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예?" "제 수염도 못 깎는 녀석이 남 챙길 처지인가?" 현성은 쓰게 웃었다. 중혁이 발치의 돌을 찼다. 간단한 동작에도 멀리 튕겨 날아간 돌이 돌더미에 부딪혀 바스라졌다. "잃어버린 것에 연연하지 말고 가진 것에 충실하자고 말하고 싶은 거면, 본인부터 잘하지 그래." 어조가 삐뚤었다. 반은 고의였다. 치기를 부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중혁은 감출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김독자의 부재가 시발점이었다. 필시 느껴졌을 반감에도 현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부서진 방패 같은 크고 초라한 손으로 얼굴을 두어 번 문질렀을 뿐이었다. 느린 바람이 불었다. 가라앉을 듯하던 먼지가 다시금 피어올랐다. "저는 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중혁 씨에게 저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먼저 이 수렁 같은 기분을 극복하는 걸 보면,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현성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중혁의 눈매에서 힘이 풀렸다. 이번만큼은 그도 날을 세우고 있기 힘들었다. 느리게 이어지는 고백이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 먹먹했다. "……너무 많이 잃었습니다." 목적어는 없었다.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 잃었을 때는 다시는 잃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두 번째에는 눈도 떼지 말자고 결심했습니다. 세 번째에는 아예 손에 쥐고 있어야겠다고 각오했었습니다." 중혁은 고개를 돌렸다. 과거형으로만 끝나던 어미가 끝내 축축히 젖어들었다. "그래도 결국 잃어버렸어요." 입술이 따끔거렸다. 중혁은 느리게 입을 벌렸다. 무심코 힘을 주었던 잇새로 비릿한 핏물이 배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건 독자 씨가 원한 게 아니라는 걸. 시나리오 클리어도, 곁에 있는 사람들을 챙기는 일에도 충실해야 한다고 매일 다짐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눈을 뜨면 그분의 빈자리부터 보여요. 제가 지키지 못한 분의……" "그 녀석이 이상한 거다." 편을 들어주려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중혁은 부정하고 싶었다. "그 녀석이 자초한 거야. 너는 최선을 다했다. 매번 좌절하고, 그래도 일어서서 노력했어.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중혁은 그를 보았다. 현성의 눈이 붉었다. 그가 느끼는 상실감이 다른 이들의 것과 남다른 이유를 중혁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과 같았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독자를 쫓는 시선, 건네는 어투에서 여실히 묻어나는 감정은 분명 중혁이 독자에게 품은 것과 동일한 빛깔이었다. 그렇기에 중혁은 날카롭게 반박했다. "그 마음을 물거품으로 만든 건 김독자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코를 훌쩍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합니다.] 자리에 없는 자도, 자리에 있는 자도 누구 하나 동의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중혁은 더 용서할 수 없었다. 성좌와 화신, 도깨비, 그 자신마저도 홀린 듯이 그를 믿고 따랐던 게 고작 몇 달 전의 이야기였다. 지금에 와서도, 그가 그럴 듯한 허언으로 모두를 구슬렸다고는 중혁도 말하지 못했다. 모두가 진심으로 그를 믿었다. 아꼈다. 스스로 나서서 감싸고 지킬 만큼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게 만들었다면 독자는,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들의 곁에 있어줬어야 했다. 비난을 받고 좌절하더라도 그 장소는 그들의 눈이 닿는 장소여야 했다. 이 오갈 데 없는 감정을 받아낼 수 있도록, 그래서 실컷 화낸 끝에 지쳤을 때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해줄 수 있도록. 독자는 중혁의 곁에 있었어야 했다. "너의 상심조차 받을 자격이 없다." 현성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피가 맺힌 입술을 짓씹으면서 중혁도 우뚝 멈춰 있었다. 말을 한 것만으로도 잔뜩 지쳐버린 것처럼. 현성은 생각했다. 중혁은 '김독자가 만들었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독자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그는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지켜보겠다고, 그러기 위해 강해져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걸어온 길엔 전부 독자가 있었다. 저를 옭아매는 심연 같은 상실감도, 독자가 만들었다는 중혁의 말은 틀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도…." 현성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생각해보면 독자는 그렇게 달콤한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때로는 지나치게 사무적인 설명으로 가슴을 후벼판 적도 여러 번이었다. 모든 성장이 풍부한 물과 자애로운 햇빛을 받아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어느샌가부터, 그의 모든 것을 달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받아온 만큼 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가 혼자서 고생하지 않도록 아껴주고 싶었다. "그때 내가 더 강했더라면.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그런 생각을 저버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되도 지금의 상실감은 잊지 못하겠죠." 하지만 이젠 그렇게 할 수 없다. 은연중에 내비쳐왔던 마음을 온전히 내보일 수도 없게 되었다. 현성은 열 살을 한꺼번에 먹어버린 듯한 피로감으로 느릿느릿 일어섰다. 손은 그토록 가볍건만 발만이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저는 역시 독자 씨를 미워하진 못하겠습니다." 중혁은 문득 깨달았다. 현성은 강한 남자다. 지금 저를 짓누르는 감정을 끌어안고, 버텨내어, 결국엔 헤아린 상실의 깊이만큼 단단해지리라. 독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아직도 사랑하기에 가능한 방식이었다. 부러운 것인가. 중혁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입술을 엄지로 세게 문질렀다. 그를 미워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는 견고함이. 하지만 유중혁은 이현성이 아니었다. "그래도 녀석은 돌아오지 않는다." 핏물이 밴 어조가 침통했다. "나한테 살라고 했으면서." 포기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함께여야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해놓고서." '중혁아. 우린 세상을 구할 수 있다. 알지?' 입술이 아렸다. 한때는 무심히 흘렸던 말이었다. 그러나 눈치채지 못한 사이 그 말은 고인 채로 뿌리를 내려 중혁을 지탱해주었다. 절망에 못 이겨 어려운 것조차 쉽게 뒤집으려 했던 그에게 생존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지금 그 말은 파고든 부분부터 썩어 곪아가고 있었다. 목 놓아 오열하고픈 서러운 고통을 호소하면서. "중혁 씨는… 그걸 선택한 겁니까." 중혁이 고개를 돌렸다. 현성은 중혁이 엉망으로 부숴놓은 잔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난 어린아이가 망가뜨린 찰흙덩이와 닮은 형상이었다. "독자 씨를 미워하는 길을?" "김독자가 그렇게 만들었다." 중혁은 변명도 하지 않았다. 모든 건 김독자 탓이었다. 자신에게 살라고 한 주제에, 정작 본인은 멋대로 죽어버리기만 수 번째다. 그냥 스쳐갈 조연도 아니었으면서. 영영 끝을 맺어주고 갈 것도 아니면서. 그는 돌아올 때마다 중혁에게 저를 켜켜이 쌓아놓았다. 그의 죽음으로 중혁이 흔들린 순간, 그에게서 쏟아져내린 건 저 자신만이 아니었다. 흩어진 추억에서 일순 반짝였던 감정을 더듬을수록 쌓이는 건 미움뿐이었다. 내게 이럴 거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달래지 말았어야지. 잡아주지도 말았어야지. 절절한 원망이 꼬리를 물고 내달리다 폭주하고 나면 중혁은 뭐든 때려부쉈다. 그러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증오하지 않고선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럼 중혁 씨가 제 대신 많이 미워해주세요." 현성은 조금 지친 듯 미소했다. 중혁의 마음을 이해한 자의 웃음이었다. 중혁이 그를 이해했듯이. 형태가 다를지언정 둘은 독자를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누군가는 부정하고, 누군가는 슬퍼하였으나. 끝끝내 마음을 잘라내지는 못하는. "아주 많이, 많이 미워해주십시오. 다른 사람들 몫까지." 그리고 내 몫까지. 현성은 말을 삼켰다. 중혁도 너도 대신 무언가를 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중혁이 걸음을 옮겼다. 현성은 붙잡지 않았다. 그저 조용하고 짤막하게, 멀어지는 등에 덧붙였을 따름이었다.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십시오." 결국 모든 것은 김독자 탓이었다. 그의 부재로 힘들어하면서도 현성이 미워하지 못하는 이유도. 연정이라 확신하면서도 중혁이 그를 증오하게 되는 까닭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비어 있을 그의 자리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처절한 걸음을 옮기며 중혁은 시계를 부서져라 쥐었다. 부수지 못할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