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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3화: Fate / Martyring Night
Caption 건담 더블오를 중심으로 한 페이트 au입니다. 해당 설정은 리랴님(@Ryria_HQ)과 찢이 함께 푼 썰로, 허락 없는 연성이나 가공 및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세츠나가 서번트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계관 상 잔인한 폭력성 묘사를 다루고 있으므로 주의 바랍니다. 그는 꽤 오래도록 매달려 있었다. 자신이 언제 땅을 디뎠는지 기억도 안 날만큼 오랜 시간이었다. 죽은 시체의 내음을 풍기는 자에게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고, 썩은 숨을 고르는 이에겐 까마귀조차도 다가오지 않았다. 그 고된 침묵이 영겁처럼 길었기에, 그리고 그만큼 더 길어질 것을 알았기에 그는 미래를 세는 대신 과거를 헤집는 쪽을 택했다. 눈앞에서 죽어간 이들의 머리를 꼽고 나면 버릇처럼 제가 죽인 이들의 수를 반복했다. 그러지 말라며 울던 양친과 조국의 사람들은 빌지도 못하고 스러진 자들보다 좀 더 많았다. 그러나 그들을 명확한 숫자로 끝맺고나서도 시간은 길어, 그는 이번엔 살리고 싶었던 자들을 헤아리기로 했다. 그들은 앞의 둘을 합친 것보다 배는 더 많았다. 이것이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 고민해야 하는 줄도 그는 몰랐다. 그저 마른 핏물이 낀 눈동자로, 제가 해온 일과 하지 못했던 일들을 사무적으로 훑을 따름이었다. "미안하다." 청년은 처음에 그것이 자신을 향한 사과라는 걸 알지 못했다. 고개를 움직이는 게 느렸던 이유는 순전히 그것 때문이었다. 파리마저도 피해간 생기 없는 시선이 눈앞에 선 자를 향했다. 둥근 안경을 쓴 중년의 남성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음을 꽤 먼 거리에도 알아볼 수 있었으나, 왜 자신을 동정하는지까지는 청년은 알지 못했다. "이오리아 슈헨베르그…." 청년은 제 목소리가 쉬어 있지 않음에 조금 놀랐다. 본인을 이렇게 만든 당사자를 앞에 둔 것치고는 제법 사소한 감상이었다. "마술 교회의 대장로가 내겐 무슨 볼일이지." "……미안하다는 말을 하러 왔네. 이미 저질러진 일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오리아는 그의 가슴께로 시선을 옮겼다. 십자가에 가시줄로 매여 양손에 못질을 당한 끔찍한 상황에도, 청년이 죽지 않았던 건 그의 심장에 새겨진 마술진 때문이었다. '쉬운 죽음을 용서치 않는다.' 독일어와 아랍어로 새겨진 글귀가 둥그런 원의 테두리를 장식한 진은 그의 심장을 강제로 뛰게 하고 있었다. 설령 양손이 꿰뚫려 움직일 수 없게 되어도. 가시덩굴에 매인 전신에서 흐른 피가 바닥에 웅덩이로 고여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이 이상할 만큼 끔찍한 광경 속에서 제일 괴이한 것은 평온한 청년의 얼굴이었다. 마치 심신과 감정을 맞바꾸어 죽여버린 듯한 고요함이었다. 이오리아가 비탄 섞인 숨을 토하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푸르르 떨리는 핏줄 선 손에서 머리카락이 기어이 몇 가닥 끊어졌다. "…순교자가 필요했네." "……." "사람들을 위해… 아니, 이것도 전부 변명이지. 그저 우리는 산제물을 원했을 뿐이야. 나를 용서하지 말게. 그럴 자격이 없으니." 이오리아가 피를 토하듯 내뱉으며 이번엔 가슴을 움켜쥐었다. 마치 스스로를 고문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소란 이브라힘." 미동도 없이 말을 듣고 있던 청년이 이오리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매달리기 전부터 죽어 있던 눈빛은 지금도 변함없이 생기가 없었다. "나 같은 걸 제물로 써서 싫어했겠네. 죄를 너무 많이 지었잖아." "자네는 많은 사람을 구했어." "하지만 그 수보다 많이 죽였지." 소란은 덤덤했다. 피로 젖은 손끝에 매달려 있던 핏방울이 뚝 떨어져 웅덩이에 파문을 그렸다. "가족도, 조국도 전부 내 손으로 파멸시켰다. 나를 이용한 자들을 없애고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명분으로." "……." "내게 순교는 너무도 과분한 말이야. 슈헨베르그. 내가 내 죗값을 치르고 있음을 당신은 잘 알 텐데." 청년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내겐 감히 그런 이름을 짊어질 자격이 없어." 뭔가 더 말하려던 이오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옷을 쥐어뜯는 손엔 아직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소란은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계속 사과를 할 거라면 돌아가. 그리고 나를 숭배하는 자들이 생긴다면 부디 고통 없이 죽여줘. 죄는 전부 내게 있으니." "……." "더 괴롭히고 싶은 거라면 남아도 좋지만, 동정은 하지 마."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은 흔히 사람들이 하는 자존심 세우기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입술을 깨물고, 가만히 그를 보던 이오리아가 뭔가 결심한 듯 앞으로 한 발 다가섰다. "지금의 처벌이 죗값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소란 이브라힘." "그래."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죄를 짊어지는 건 어떤가." 이오리아는 일순 그가 이 말을 거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도 고뇌하고 망설였던 계획이기에 더 그랬다. 그를 해방시켜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는 건 자기 기만이었다. 그가 지금보다 더 괴로워질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입에 담았기에 더더욱. 하지만 이오리아는 제안을 거두진 못했다. 소란 이브라힘.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무수한 학살자이고, 순교자이며, 지키기 위해 죽여온 모순의 길을 걸어온 자라면. "무엇이지?" "자네가 지금껏 해왔던 일과 같은 거지. 평화를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일." 소란은 눈을 떴다. 다시 시야에 들어온 이오리아는 아까보다 훨씬 결연해 보였다. "역시 난 자네를 여기에 마냥 매달아둘 순 없네. 죗값이 있다면 다른 방식으로 치르길 원해. 자네가 마지막에 구원받는 결말로 말이야." "그런 건 불가능해." "그래도 그러길 바라네. 신은 누구에게나 자애로우시니." 소란에게 문득 오묘한 빛이 스쳤다. 이오리아도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빠른 변화였다. 인형 같은 무심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던 소란이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세상에 신 같은 건 없어." "있네." "없어.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 되기 전에 죽였을 테니까. 그러니 구원 같은 것도 없어. 내게는 존재하지 않아." 어조는 단조로웠지만 그 안의 뜻은 명확했다. 그는 명백히 거절하고 있었다. 실망과 안심을 이오리아가 동시에 느끼며 마음을 접으려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대비할 틈도 없이 날아든 말에 이오리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죄의 대가를 치르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나쁘진 않아… 그걸로 세상이 평화로워진다면. 난 얼마든지 죽이고 또 죽일 수 있어. 내 손에 피를 다 묻히고 나면 남들이 죄를 짓지 않아도 평화로워질 날이 오겠지. 난 그거면 충분해." 이오리아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소란에겐 그를 매달 십자가도, 그를 얽맬 가시덩굴도 필요치 않았다. 스스로를 몇 번이고 죽여가며 살아온 자에게 그런 고문이 통할 리가 없었다. 죗값을 위해 죄를 짊어지는 것을 반복하겠다고 말하는 이에게. 이오리아는 고뇌의 잔이 제 앞으로 돌아온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오리아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역시 청년이 이렇게 죽어가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짊어지도록 해라." 탄식하듯 길게 내뱉은 이오리아가 손을 뻗었다. 낙인처럼 소란의 가슴에 찍혀 있던 마술진이 푸른빛을 내기 시작했다. "기나긴 전쟁이 시작될 거다." "전쟁?" "그래. 앞으로는 그 전쟁에서 싸우는 거다. 그릇된 욕망을 가진 자들을 유혹하여 벌린 전장이다. 그곳에서 모두를 죽이고, 또한―" 길어지는 말을 듣고 있던 청년이 돌연 눈을 커다랗게 뜨며 피를 왈칵 뱉어냈다. 시뻘건 핏물이 이오리아의 발치까지 튀었지만 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줄곧 잠잠했던 소란이 묶인 몸을 떨며 거듭 올라오는 핏덩이를 토했다. 목에 무겁게 휘감긴 터번이 검붉게 물들며 그의 몸뚱이에 들러붙었다. "커흑, 컥…! 악―…!" "……그러니, 소란 이브라힘이여. 최후의 최후까지 평화를 위해 싸우는 검으로 존재하라." 비틀린 형태로 일그러졌던 마술진이 이내 한 조각씩 느리게 짜맞춰지며 붉은 빛으로 바뀌었다. 소란이 토해낸 것과 같은 선혈의 색이었다. "뒤나메스의 원망으로, 버체의 분노로, 키리오테스의 슬픔으로, 자바니야의 증오로, 하루트의 살의로, 라파엘의 고통으로 저주받으라. 엑소시아의 마지막 축복으로 죽음 위에 생을 덧씌우니, 죽은 채 살아가는 자여, 전쟁의 참전자로서 그 사명을 다할지어다!" "아아아아악!!" 처절한 절규가 메아리치며 허공을 울렸다. 십자가 뒤로 퍼져나가는 마력의 기운이 마치 천사의 여섯 날개인 양 크고 넓었다. 쿵, 십자가에서 거짓말처럼 떨어진 몸뚱이가 피로 흥건한 대지를 나뒹굴었다. 숨을 헐떡이며 제 가슴을 감싸쥐는 소란의 손에 더 이상 못이 박혀 있던 상처는 없었다. 아직 입에 고여 있는 피를 뱉어내며 전신을 떨던 소란이 경악이 섞인 얼굴로 손을 들여다보았다. 마술로 단단히 박혀 있던 못의 모양은 찾을 새도 없이 멀끔했다. "세츠나. F. 세이에이." 퍼뜩 떨리는 소란의 눈에 다가온 이오리아가 비쳤다. 그는 어느새 처음 소란을 찾아왔을 때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죄책감과 안쓰러움이 함께 뒤섞인, 소란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들이 섞인 얼굴. "새로운 삶에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겠지. 성배 전쟁의 첫 서번트여." "…성배, 전쟁…." "그래. 싸우는 거다. 세츠나. 내가 한 말들을 잊지 마라. 자네는 그 전쟁에서 반드시──" …반드시, 무엇이었더라. 세츠나는 가만히 곱씹다가 잊어버렸다. 손바닥을 꿰뚫었던 못의 감촉만큼이나 희미해진 기억이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을 정도로. '설령 떠올린다고 해도 내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세계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속죄를 위해 반드시 성배를 손에 넣는다.' 세츠나는 덤덤히 돌아서서 어두운 복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라일이 그를 찾을 시간이었다. 과거에 다시 버려두고 온 기억들이 애타게 반짝거리다가 스러져 사라졌다. 절대로 잊지 말라고 당부했던, 이오리아의 진심 어린 당부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