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로 돌아가기
993화: 그라세츠)처음의 맛
Caption 그라함과 세츠나는 사귀는 사이입니다. 키스 묘사 있습니다. "첫키스는 레몬사탕 맛이라는데." 지나가듯 흘린 어조는 떠보는 투도 없이 담백했다. 무심코 그렇다고들 하지, 하고 대꾸하며 넘길 뻔했을 정도였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가까스로 삼키며 그라함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앞에 앉으면 시선이 부담스럽다며, 언제나 그의 옆자리를 고수하는 세츠나의 시선은 패드의 화면에 붙박인 그대로였다. 늘 그렇듯 잔잔한 적갈색의 눈동자엔 과장된 뻔뻔함조차 없어, 그라함은 곧 그 안에서 뭔가를 읽어내는 걸 포기했다. 묵직한 머그컵을 내려놓은 손이 자연스럽게 세츠나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끌어당겼다. 쏟는다. 아까와 다를 바 없는 덤덤하게 대꾸가 먼저 들려왔다. 그러나 손에 들린 컵을 금세 비워내고 그라함에게 기대는 몸짓은 제법 부드러웠다. 커피 대신 따뜻한 우유가 들어있던 컵이 채 식지 않은 온기를 품고 짝의 옆에 놓였다. "네가 그런 주제를 꺼내다니 별일이군, 소년. 이제야 사춘기가 찾아온 건가?" "그냥 궁금했을 뿐이다. 소설에 쓰여 있었으니까." 일부러 놀리듯 던진 질문에도 세츠나에겐 별 반응이 없었다.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 그라함이 그의 입술을 장난치듯 검지 끝으로 톡 건드렸다. 공들여 관리할 성격이 아닐 텐데도 슬쩍 닿았을 뿐인 입술은 의외로 말랑하고 부드러웠다. "키스해본 적은 없단 말이군. 지금까지 애인이 단 한 명도 없었나?"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러고 보니 가벼운 입맞춤은 했었지만, 그때도 레몬사탕 맛은 아니었어." "호오. 상대는 누구?" 세츠나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처음 보이는 반응에 작게나마 일렁거리던 질투가 되레 가라앉아, 그라함은 그저 놀란 눈만 깜빡거렸다. 혐오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당혹과 거북함이 애매하게 뒤섞인 섬세한 감정이 얼굴에 완연히 떠올라 있었다. 세츠나가 네나 트리니티의 일방적인 입맞춤을 회상하고 있다는 걸 그로선 알 턱이 없었으나, 그라함은 눈치 좋게 말머리를 돌렸다. 무표정이 아닌 세츠나를 구경하는 건 싫지 않았지만 그라함은 그가 불유쾌한 감정을 곱씹게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았다. "뭐, 가벼운 입맞춤 정도면 퍼스트 키스라고 할 것도 없지. 제대로 된 키스가 아니어서 맛을 못 느낀 게 아닐까?" "…그런가." "그런 거지. 그리고 키스는 레몬 사탕보다 더 달콤새콤한 거다, 소년.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 주고받는 건 말이야." 어떻게 그런 맛이 느껴지느냐고 세츠나는 반문하고 싶었다. 그러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안는 손과, 바짝 좁혀진 그라함과의 거리 때문에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빙긋 웃은 그라함이 그의 턱을 가볍게 감싸쥐고선 이번엔 손가락 전체로 입술을 상냥하게 훑어내렸다. 무심코 입을 조그맣게 달싹인 세츠나가 그라함을 보며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정중함이 완연히 묻어나는 눈빛과 손길에 거부할 생각은 먼지처럼 흩날려간지 오래였다. "궁금하다고 했지. 키스의 맛." "…그래." "시험해보지 않겠나? 정말로 레몬사탕 맛일지, 아니면 내 말처럼 사탕보다 더 달콤할지." 나긋나긋하게 속삭이며 그와 시선을 맞춘 그라함이 미소했다. 세츠나는 이번에도 거부하지 않았다. 어쩌면 말을 꺼낸 순간부터, 내심 이 제안을 기다렸던 걸지도 몰랐다. 망설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인 세츠나가 그제야 머뭇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바로 그가 어색해하는 논점을 깨달은 그라함이 빙긋 웃고선 상체를 숙였다. 맞닿기 직전의 입술이 따뜻한 숨결을 섞어 나지막이 읊조렸다. "눈 감아주게, 소년." 일순 흠칫 떨린 속눈썹이 느리게 내리감겼다. 약간 비스듬히 맞물린 두 개의 입술이 침묵을 지키다 천천히 부비어졌다. 그것만으로도 일전의 입맞춤과는 다른 저릿함이 오르는 듯했다. 숨을 삼킨 세츠나가 저도 모르게 그라함의 팔을 붙들었다. 조금씩 개화하는 입술 틈으로 오가는 숨결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고개를 좀 더 옆으로 튼 그라함이 입술을 바짝 맞대며 혀를 밀어넣었다. 축축하게 젖어 미끈거리는 촉감에 움찔 어깨가 튀어올랐지만 그라함은 세츠나를 놔주지 않았다. 생각지도 않게 가는 신음이 흘렀다. 그럴 리 없다고 인지하고 있는데도 그의 혀가 닿는 잇몸이, 치열이, 입 안의 말랑거리는 연한 살갗이 녹는 듯이 간지러웠다. "응…, 읍…." 서툴게 떠는 혀를 휘감아 장난스레 당기던 혀가 이내 옆을 간지럽히듯 파고들었다. 입 전체가 그라함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위도 아래도, 좁은 틈새부터 깊은 곳까지 그가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모자란 숨에 머릿속이 몽롱해지는 걸 느끼며 세츠나가 손가락에 애써 힘을 주었다. 구석구석 놓치지 않는 농밀한 키스가 꼼꼼하게도 길었다. 한참 뒤에야 아쉽다는 듯 입을 뗀 그라함이 장난스럽게 그의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거리를 걸렸다. 트인 입으로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는 입이 미묘하게 붉었다. "어떤가 소년? 내 키스의 맛은." "…몰라." 채 다듬어지지 않은 호흡을 억지로 숨기며 세츠나가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아까와 다른 의미로 고요한 형태를 잃은 눈이 그를 보지 못하고 흔들거렸다. "당신만 가득해서, 맛을 느낄 정신이 없었어…." "그건 그거대로 두근거리는 말인데, 소년." 피식 웃은 그라함이 아직 풀지 않은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둥근 귓바퀴를 따라 선을 덧그리는 손끝이 명백한 유혹을 품고 있었다. "예전에 했던 키스하고 비교하면 어떤가?" "몰라. 예전이 어땠는지 기억도 안 나." "그것도 또 기쁜 소식이군. 이제 맛만 정확히 알면 되겠어. 그렇지? 소년." 놀리듯 덧붙인 그라함이 이번엔 그의 뺨을 다정히 감싸왔다. 긍정도 부정도 못하고, 그저 물끄러미 그라함을 올려다보던 세츠나가 곧 다시 눈을 감았다. 그의 감촉이 선연히 남아 있는 입술은 옅게 떨리고 있었다. 이번엔 어떨까. 그와의 키스는, 두 번째 맞닿는 입술의 맛은. 손에서 패드가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비어버린 손에 그라함의 손이 퍼즐처럼 끼워맞춰진 것은 입술이 겹쳐진 것과 거의 동시였다. 이제 맛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