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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세츠)F
Caption 2기 엔딩 이후 ~ 극장판 사이의 시점입니다. 라일과 세츠나는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닙니다. 코가윤 작가님의 단편만화집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츠나." 세츠나는 놀라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나다를까, 노크도 없이 열린 문 사이에 걸쳐진 건 익숙한 녹음빛의 소매였다. 여어, 하고 가볍게 늦은 인사를 건넨 라일이 다른 손을 보란 듯 들어보였다. 무채색의 보틀에선 지구에서처럼 물이 찰랑거리는 경쾌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뭐가 들어 있는지 추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세츠나가 덤덤히 라일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보이는 대로. 어울려달라고." 씩 웃은 라일이 대답도 안 듣고 방으로 들어섰다. 자연스럽게 세츠나가 옆으로 비켜서며 침대를 눈짓했다. 제 방마냥 풀썩 자리잡은 라일이 세츠나에게 보틀을 던졌다. "알렐루야는 마리랑 노느라 정신 없지, 티에리아는 술은 관심 없다고 하지. 나머지 녀석들도 나머지대로 난리고 말이야. 다들 솔로의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해준다고… 아, 엄밀히 말하자면 당신도 아니지만. 그건 그것대로 넘어가자고."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으며 라일은 빨대를 물었다. 맞은편에 놓인 책상에 허리만 대강 걸친 세츠나가 느릿하게 날아오는 병을 낚아챘다. "나라고 재밌는 상대는 아닐 텐데." "그래도 어울려주잖아? 내가 원하면." "거절할 이유는 없으니까." "좋아. 그런 점이 편해, 당신은." 술을 쭉 들이켠 라일이 씩 웃었다. 세츠나는 말없이 제 몫의 빨대만 물 뿐이었다. 가만히 세츠나를 바라보던 라일이 빈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래도 새해 첫 날인데 혼자서 있으면 외롭지 않아?" "별로. 평소와 다름없는 기분이라서." "재미없긴. 하여간 혼자서 백 살은 먹은 것처럼 군다니까." 라일이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세츠나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말려올라갔다. 작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라일의 녹안이 커다랗게 뜨이다가 이내 반으로 접히며 둥글게 휘었다. 이어지는 목소리도 어딘지 평소보다 더 들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 당신에게 전부터 묻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뭐지?" 반문하는 세츠나는 언제 웃었냐는 듯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역시 오래 지어주진 않나. 라일은 조금 아쉬웠지만 지금은 그걸로도 좋았다. "예전에 날 만나러 술집에 찾아왔던 적 있지?" "맞아." "그때 술은 못 마신다고 했잖아?" "그랬지." 세츠나는 덤덤히 빨대를 물었다. 알콜이 적잖게 섞인 음료를 깊게 들이마시는 세츠나의 표정엔 괴로운 기색은 없었다. 라일이 뺨에 닿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런데 지금은 잘 마시잖아. 전에… 위로해주러 왔을 때도 그랬고. 어느 쪽이 진짜야?" 라일은 말을 아꼈다. 아뉴와 닐, 소중한 사람들의 부재를 느끼며 고통스러워하던 시간들. 세츠나가 그를 찾아와주지 않았다면 라일은 지금도 고독에 얽매여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도움으로 극복했다고 해서 그 시기의 고통과 슬픔까지 다시 떠올리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다행히 세츠나는 그때가 언제냐고 캐묻지 않았다. "글쎄." 대답도 자세하게 해주지 않았다는 게 문제지만. 라일은 순식간에 김빠진 눈이 되었다. "너무하네…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말해주는 게 뭐 어때서?" "자세하게 설명하기가 귀찮아." "진짜 너무하네!! 마음만 먹으면 설명할 수 있는 주제에. 당신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어." 투덜거린 라일이 빨대를 거칠게 빨았다. 지구였으면 단숨에 원샷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세츠나는 더 말없이 제 몫의 술병을 비웠다. 괜히 애꿎은 빨대를 질겅거리는 라일은 어린애처럼 심통이 난 얼굴이었다. 라일에게 시선을 옮긴 세츠나가 빈 병을 놓고선 몸을 띄웠다. 가볍게 앞으로 흘러간 몸이 라일의 옆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래서, 지금은 괜찮나?" "응? 뭐가." "괜찮냐고 묻고 있다만." "그러니까 뭘……." 라일은 말을 삼켰다. 그를 응시하는 세츠나의 눈은 언제나 그랬듯 고요하고 조용했다. 허를 찔린 듯, 그를 한참 바라보기만 하던 라일이 한숨을 쉬며 빨대를 다시 물었다. 이미 비어버린 병에선 희미한 알콜향만이 담배 연기처럼 가득 올라와 입을 채웠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술집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진작 들켰단 소리구만." 빈 빨대를 기어이 한 번 더 빤 라일이 병을 내려놓았다. 허공에 느리게 떠 흐르던 병이 세츠나의 것과 가볍게 부딪히며 머리를 맞댔다. 그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며 라일이 말을 이었다. "외롭지 않을까 했어. 당신, 요즘 계속 혼자서만 있었잖아." "그랬던가." "그랬다고. 다른 녀석들도 잔뜩 걱정했으니까. 그래서 내가 가보겠다고 해서 와 본 건데…. 나참." 헛웃음을 지은 라일이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내 처지를 들킬 줄 몰랐지." "숨기고 싶었던 거면 미안하게 됐다." "사과하지 마. 고의 아니잖아." 라일은 담백했다. 아뉴가 죽은 뒤로, 그리고 세츠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던 그 날 이후로 라일은 세츠나에게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뭔가를 더 말하려던 세츠나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라일의 고백이 잔잔하게 이어졌다. "가족들은 일찍 죽고 형하고도 헤어졌어도, 내 주변엔 늘 사람이 있었거든. 별로 외롭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어." "……." "그런데 단순히 못 만나는 게 아니라 영원히 못 보게 된 거라고 생각하니까… 이게 은근히 외롭네. 쓸쓸하고. 그래서 만나러 온 거야." 라일이 어깨를 으쓱였다. 세츠나가 고개를 돌렸다. 두 개의 병은 아직도 머리를 맞댄 채로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생각해서 와준 건 고맙게 생각해." "내가 외로워서 온 거였다니까." "다른 녀석들하고 어울려도 됐겠지. 하지만 일부러 찾아와줬잖아." 라일은 이번에야말로 말이 없었다. 꽤 긴 침묵이 이어졌다. 멀리서 술에 취한 이안의 것처럼 보이는 웃음 소리가 울리다가 느리게 지워졌다. 하아, 탄식인지 뭔지 모를 숨을 흘린 라일이 다시금 머리를 쓸어넘겼다. 엇박자로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무거워 보였다. "당신을 챙겨주고 싶었어." "응. 알고 있다." "당신이 알아채기 전에. 그런데 결국 이런 식이네. 알고 있겠지만, 당신이 이노베이터인 걸 탓하는 게 아니라 내가 미숙한 게 속상한 거야." 라일이 손을 뒤로 짚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세츠나의 시선이 자연히 그를 향했다. 또 침묵이 길어지려나 싶었던 순간, 라일의 질문이 한 번 더 울려퍼졌다. "하나만 더 물을게." "당신이 날 찾아왔던 날, 나한테 록온 스트라토스를 위한 서비스라고 했었지. 그거 지금도 해당 돼?" "그래." "우유가 아니라, 술을 권하는 록온 스트라토스?" 라일과 세츠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세츠나가 아는 것과 같은 빛깔의, 하지만 정의 가뭄으로 퍽퍽하게 말라 있는 눈동자. 역시 외로웠던 사람은. 누군가가 필요했던 사람은. 그럼에도 다른 누군가가 또 걱정되어서 차마 가만히 둘 수 없었던 사람은. 세츠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거절할 수 없었다. 이노베이터로서가 아닌, 세츠나 F 세이에이로서. "그래. 라일." 침대를 짚은 장갑이 흠칫 떨리며 뻣뻣하게 굳었다. 줄곧 들었던 그 짧은 대답이 라일이 던졌던 모든 질문의 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옅게 떨리던 라일의 눈동자가 살풋 일그러졌다. 곧장 뻗어나간 손이 세츠나의 뺨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세츠나. 키스해도 돼?" "네가 원한다면." 이번에도 망설임은 없었다. 고마워. 그에게 닿았을지 모를 조그만 읊조림을 한숨처럼 떨구며 라일이 고개를 숙였다. 세츠나의 눈이 조용히 내리감겼다. 맞닿은 입술은 서럽도록 고요하고 따뜻했다. 그 온기를 삼키듯, 입을 벌려 그를 삼킨 라일이 그를 안아 침대 위로 무너졌다. 외로움이 녹아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