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로 돌아가기
993화: 세츠나)I do for...
Caption 리리아님(@ryria_HQ)께서 풀어주신 2p 세츠나 썰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연성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육체적, 언어적 폭력 묘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츠나는 눈을 깜빡였다. 물론, 눈앞의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세츠나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질 리 없었다. 세츠나는 정면에 있는 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늘 고요하던 눈엔 예리한 자만이 알아차렸을 미미한 혼란이 깃들어 있었다. 청년은 비죽이 입꼬리를 올려 웃곤 일어섰다. 그는 눈에 익은 솔레스탈 비잉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세츠나와 같은 파랑색의. 그것만으로도 세츠나는 충분히 당혹스러웠다. 동일한 색의 복식을 세츠나 외의 누군가에게 지급했단 이야기는 그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리본즈와 이노베이드들이었지만, 세츠나는 곧 의심을 떨쳐냈다. 리본즈는 그의 손에 죽었고, 그와 뜻을 같이 하던 이노베이드들도 전부 죽은 지 오래였다. 설령 누군가가 솔레스탈 비잉에 이노베이드들을 잠입시키려 했더라도, '저런 얼굴'로 만들지는 않았을 거라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청년이 웃음을 터트렸다. 기이하게 경쾌하고 청량한 소리가 어두운 허공을 울리며 번져 나갔다. 결국 세츠나는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지?" 청년은 느리게 웃음을 그쳤다. 그러나 여전히 둥글게 휜 그의 입술엔, 지금 상황이 즐겁단 기색이 역력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청년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밝은 갈색의 피부 위로 아무렇게나 휜 백색의 머리칼이 덩달아 흘러내렸다. 세츠나는 그 모양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억지로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는 그 생김새를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웃음을 머금은 청보라빛의 눈동자도, 그 색은 낯설지언정 눈매만큼은 무섭도록 익숙했다. "세츠나 F. 세이에이." "아니야." 그럼에도, 청년이 이름을 말한 순간, 세츠나가 급히 내뱉은 건 부정이었다. 고개를 바로 한 청년이 다시금 소리 내어 웃었다. 어느새 말아쥔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머리색이 다르다. 눈 색이 다르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 ㅡ 세츠나 F 세이에이와 동일인이라는 것을 세츠나는 부정하고 싶었다. 난 저렇게 웃지 않아. 단 한 번도, 저런 표정 같은 걸 지어본 적이 없어. 세츠나가 바닥을 툭 찼다. 세츠나는 그제야 그가 선 곳이 엉망임을 알았다. 색색으로 핀 꽃들이 구둣발에 엉망으로 짓이겨져 있었다. 몇 송이는 손으로 잡아뜯었는지 고스란히 드러난 뿌리가 앙상했다. 세츠나의 시선을 깨달은 세츠나가 피식 웃곤 보란 듯이 손을 털었다. 새카만 장갑에 묻어 있던 꽃잎이 비틀거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아니야. 난 너야." "그렇지 않아. 똑같은 사람이 둘 씩이나 존재한다는 건 말도 안 돼." "이제 와서 현실적인 척하는 건 그만둬. 우습잖아. 같잖은 이상론자가." 죽 유쾌해 보이던 입술이 비틀렸다. 사나운 조소였다. 세츠나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떨었다. 증오와 비난이 뒤죽박죽 섞인 눈빛이 지독히도 소름끼쳤다. 분명히 그는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도. 세츠나가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섰다. 세츠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생각해 봐. 알렐루야도 둘이었잖아? 너라고 그러지 말란 법 있어?" "그는 인체 실험을 당해서 그렇게 된 거였어. 나는," "너는 실험을 안 당한 것 같아? 최초의 이노베이터. 뇌양자파를 써서 사람과 의식을 공유하는 존재. 너는 모르모트가 아니었을 것 같아, 세츠나?" 세츠나의 말이 끊겼다. 어느새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세츠나가 툭 덧붙였다. 웃음기가 사라진 음성이 거짓말처럼 무미건조했다. "농담이지만." "……." 충격과 경악으로 떨리던 적갈색의 눈이 멍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세츠나가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금방이라도 바닥을 구를 듯 배를 쥐고 웃는 웃음엔 거짓이 없었다. 세츠나가 눈가를 찡그렸다. "너…" "너무 멍청해서 불쌍하기까지 하네, 너." 세츠나의 말을 끊은 건 어느새 날카롭게 갈린 조롱이었다. 푸르게 물든 보라색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한쪽만 삐뚜름히 올라간 입꼬리도 바늘처럼 삐죽했다. "하긴, 그러니까 지금까지 속고만 살았지. 안 그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그냥 감상이야. 순해빠지다 못해 어리석은 나에 대한 한탄이랄까?" 세츠나가 뚜벅뚜벅 다가섰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섰지만, 그의 손이 세츠나를 붙드는 게 더 빨랐다. 갈퀴처럼 다가온 양 손이 그의 팔을 덥썩 움켜쥐었다. 그 자신의 것이 맞나 싶을 만큼 거친 악력이었다. "알리 알 서세스에게도 속아서 사람을 쏘아죽였지. 테러도 일으킬 뻔했지. 솔레스탈 비잉에 들어와 건담을 탔지, 그리곤 인간도 아닌 변종이 되어버렸지!! 모두 속아넘어간 것 투성이야. 그렇지 않아?" "틀려! 나는 내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의지로 한 건 날 억누르고 숨기는 일 뿐이었지. 입에 발린 말은 집어치우자, 세츠나.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하는 건 나한테 너무하잖아." 칼날 같은 비난이 세츠나를 난도질했다. 나? 너는 내가 아니었나? 내가 나를 억눌렀다고? 아냐. 나는. 입술에서만 빙글빙글 도는 목소리에 시야까지 어지러운 듯했다. 세츠나가 붙잡힌 채로 비틀거렸다. 겨울서리처럼 차게 얼어붙은 시선이 그를 놓지 않고 있었다. "생각하기 싫어? 그럼 생각하게 해줄게. 왜 나는 날 선택하지 않았지? 왜 내 행복을 저버리고 세상의 행복을 쫓았지? 그게 뭐라고? 내가 세계의 평화를 바랐는데, 왜 그 안에 나는 없지?" "그만해." "당연하지!! 그건 나를 위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야 부모님과 닐의 가족을 죽인 죗값이 덜어진다고 믿었으니까. 그렇게 모두가 믿게 만들고, 나를 속였으니까. 그들이 만든 세계의 구원자에 나를 끼워맞춰야 내 존재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만해!!" "그래서 끝까지 나를 속이고, 이 지경까지 도달하게 만들었잖아! 나 때문에 죽은 록온에게 망상까지 뒤집어씌우면서!!" "아니야!!" 외침과 절규가 짐승처럼 뒤엉켰다. 그를 맹렬히 뿌리친 세츠나가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세츠나가 훨씬 빨랐다.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힌 세츠나에게서 신음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마저도 길진 못했다. 그를 밀어넘어뜨린 세츠나가 미친 듯이 웃으며 세츠나의 목을 움켜잡은 탓이었다. 인정사정 없이 조여오는 손가락이 제복을 구기고 살갗을 세게 눌러왔다. "컥…!" "진짜 바보 아냐? 내가 너고, 네가 나인데, 그것 하나 생각 못했을까봐? 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온 거야? 응? 이렇게까지 멍청해서?" "커헉, 컥……!" "차라리 죽지 그랬어. 그래, 차라리 그때 록온의 총에 맞아 죽기라도 했다면 동료가 죽는 험한 꼴도 안 봤을 텐데. 응? 왜 지금까지 살았어?" 세츠나가 괴롭게 버둥거리며 그를 밀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우위가 확실한 상황이었다. 커다랗게 뜨인 세츠나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에게서도, 하다못해 알리에게서도 본 적이 없는 오싹한 눈이었다. 목이 졸린 채로도 느껴지는 살기에 세츠나의 몸이 덜덜 떨렸다. 지금까지 그가 쏟아부은 말들이, 폭설이, 그와 같은 무게로 세츠나를 짓눌러왔다. 도망칠 수 없는 무거움이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면서 사람을 죽일 거야. 남들보다 더 오랜 수명으로, 죽이고, 죽는 걸 보면서 살 거야. 너무 지독해. 이걸 너는 삶이라고 부를 수 있어? 난 아닌데." "아…… 윽… 큭……" "난 아니라고. 세츠나. 난 싫어." "……윽……." "이렇게 살 바엔 그냥 죽는 게 좋지 않을까? 응? 세츠나. 아니, 소란 이브라힘." 열 개의 손가락이 거미발처럼 오므라들며 숨통을 조여왔다. 세츠나가 애써 눈에 힘을 주었다. 겨우 바라본 그의 얼굴은 이제 알 수 없는 감정들로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슬픔인가, 아니면 역시 증오인가. 죽 웃음이 걸려 있던 눈가마저도 서럽게 찡그려졌다. 그를 겨우 붙들고 있던 세츠나의 손에서 차츰 힘이 빠져갔다. 눈앞이 느리게 흐려져갔다. 의식이 멀어져 가는 중에 그의 목소리만이 유독 선명했다. "우리 자살하자." 대답하지 못하는 입이 뻐끔거리다 조용해졌다. 세츠나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세츠나는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열려 있던 귀가 차츰 물을 먹은 것처럼 조용해져갔다. 이제야 그의 목소리가 자신의 것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죽, 세츠나 F 세이에이였을 텐데도. "이대로 죽어버리자. 어디서도 행복하지 못하다면, 차라리 그게 나을 거야. 응. 그렇지, 세─" "──츠나!!" "……!" 세츠나는 퍼뜩 눈을 떴다. 갑자기 물 밖으로 끌어올려진 물고기마냥 퍼덕이는 손을 누군가 잡아챘다. 그러고도 한참 숨이 가쁘고 시야가 어두워, 세츠나는 그를 부른 이가 누군지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가쁘게 숨을 쉬는 입을 누군가 막았다. 행여 그가 놀랄 것을 걱정했는지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깨면 과호흡 온다고! 천천히, 천천히 숨 쉬어!" "─, …… ──, ……" "그래. 옳지… 나참, 갑자기 이게 뭔 일이야, 대체." 투정과 걱정이 반쯤 섞인 목소리가 끊길 즈음, 입을 막았던 손이 떨어졌다. 겨우 숨이 트인 세츠나가 목을 쓸어내리며 눈을 깜빡였다. 라일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코 닐을 떠올렸던 세츠나가 제 목을 꾹 잡았다가 느슨히 손을 늘어뜨렸다. 식은땀이라도 흘린 건지 옷이 젖은 솜처럼 축축했다. 한참 호흡을 고르던 세츠나가 입을 열었다. 갈라진 입술을 타고 나온 목소리가 이상하게 쉬어 있었다. "…여긴 무슨 일로…." "하로가 갑자기 깨워서 말이야. 뭔 일이라도 있나 한바퀴 죽 돌았는데 당신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잖아. 평소엔 죽은 듯이 잘 자더니만." 죽은, 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세츠나가 어깨를 움찔거렸지만 라일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가위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세츠나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의 윤곽이 뚜렷했다. 역시 그건 꿈이었나. 느리게 한숨을 내쉬는 그를 라일이 눈빛으로 슬 살폈다. "이제 좀 괜찮은 거야?" "아아…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다." "뭐 어려운 일도 아니니 미안할 건 없지만, 깜짝 놀랐다고. 요근래 피곤할 일도 없었던 것 같은데." 라일이 어깨를 으쓱이곤 농담처럼 덧붙였다. "그래도 당신도 가위를 눌리긴 하네. 이노베이터는 그런 거 안 눌릴 줄 알았는데." "…나도 지금 처음 알았다." "뭐야. 장난에 진지하게 대답하지 말라고. 재미없게시리." 라일이 입을 비죽거렸다. 일부러 분위기를 바꾸려 했던 그의 본심을 뒤늦게 안 세츠나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직 완전히 진정된 건 아니었지만 그에게 더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젖은 앞머리를 대강 쓸어넘긴 세츠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의식이 또렷해질수록 아까 있었던 일이 안개에 가려지듯 흐려지고 있었다. 바로 몇 초 전까지도 자신의 목을 제 손이 졸라왔었는데. "…정말 괜찮아. 당신도 돌아가서 자, 라일 디란디." "……." 라일이 눈을 꿈뻑였다. 그 침묵이 꽤 길었음에도, 세츠나는 자신의 말을 깨닫지 못한 듯했다. 느리게 눈길을 거둔 라일이 읏샤, 가벼운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덩달아 옆에 딸려 있던 하로가 눈만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의 등 뒤로 따라 붙었다. "그럼 난 진짜 간다. 당신도 좀 더 자둬. 피곤해 보이니까." "그래. 고맙다." "만약 더 못자겠으면 부르라고. 자장가 정돈 부를 수 있으니까." 꿋꿋이 농담을 던진 라일이 손을 흔들었다. 차마 더 웃을 기운이 없던 세츠나가 손만 마주 들어보였다. 양쪽에 달린 날개를 열심히 파닥이며 하로가 라일을 따라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기계음이 울려퍼지다 스러졌다. 혼자 남겨진 어둠엔 고요 뿐이었다. 천천히 숨을 내뱉은 세츠나가 제 목을 문질렀다. 광기어린 손길은 당연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싶었던 압박감도 더 남아 있지 않았다. 세츠나는 벌써 아득해진 기억을 억지로 더듬어보았다.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멀끔해진 뇌리엔 이제 그의 형상만이 얼룩져 있었다. '무슨 대화를… 나눴더라.' 세츠나는 빠르게 포기했다. 금방 잊혀질 것이었다면 그리 중요한 꿈도 아니었을 터였다. 쓰러지듯 침대에 누운 세츠나가 천장을 올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아마 앞으로도 영영 지금의 밤을 떠올리지 못하겠지. 지금껏 스쳐지나간 무수한 나날이 그러했듯이. 어느덧 무미건조해진 감상을 되뇌며 세츠나는 언제 악몽을 꿨냐는 듯 온순히 잠들었다. 모든 것을 망각한 의식에 더 이상 세츠나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끝까지 나를 잊어버리는구나. 잔인한 위선자.' 그리 저주하고, 악에 받친 울분을 쏟아내며 조각난 꽃밭을 쥐어뜯어도. 자신에게 닿지 않는 분노가 저를 죽이고 있음을 알아차릴 새도 없었다. 그가 남긴 붉고 선명한 손자국이 눈물처럼 그의 목에 남아 있었음에도. 어두운 침묵이 깊었다. 무언가를 묻고 만 고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