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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 ~ 2기 사이를 시점으로 두고 있으나 더블오 전체 내용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캐릭터 디자인을 담당해주신 코가윤의 단편 만화 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라일의 시점에서 전개됩니다.
형의 죽음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가족 셋을 한꺼번에 떠나보냈던 라일에게 하나는 그리 버겁지 않은 수였다. 게다가 함께 했던 것은 어렸을 때뿐, 둘다 머리가 굵어진 뒤로는 연락도 거의 두절되다시피 한 사이였다. 쌍둥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형제는 각자의 길을 살았다. 가끔 먼저 떠난 이들의 무덤에 놓이는, 이름표도 달리지 않은 꽃다발을 보며 서로의 안위를 짐작했을 따름이었다. 라일은 구태여 닐을 찾지 않았다. 닐도 마찬가지였다. 라일에게는 열등감이나 반 국가 활동에 가담하게 되었다는 개인적인 이유가 더 컸지만, 아마 형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라고 라일은 지레짐작했다. 둘만 남은 뒤로는 끔찍이도 동갑내기 동생을 챙기던 그였다. 그런 그가 자세한 설명 없이 저를 떠나버린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라일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거울만 봐도 그가 나이를 먹어가는 모습을 쉬이 알 수 있었던 터라 그리워한 적도 없었다.
그를 떠올리는 일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지던 어느날이었다. 갑작스럽게도 그의 형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말도 없이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부모님과 동생과 똑같은 차갑고 딱딱한 묘비가 되어서. 라일은 울지 않았다. 덤덤히 바칠 꽃이 하나 더 늘었구나, 중얼거렸을 따름이었다. 가끔 묘지에 혼자 서 있을 때면 이유 모를 서러움과 쓸쓸함이 솜에 배는 물처럼 무겁게 스미기도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라일은 쉽게 닐의 죽음에 적응해갔다. 형의 사인이나 행적을 찾아보지도 않았다. 그의 묘비 앞에 처음 섰던 날 던졌던 답 없는 질문이, 라일이 닐에게 보인 유일한 관심이었다.
"형, 행복했어?"
비와 섞인 물음은 묘비 아래까지 스며들었지만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라일은 덤덤히 걸음을 돌려 앞을 떠났다. 그 뒤로 한동안 라일은 그곳을 찾지 않았다. 라일이 네 개의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수 개월이 지난 후였다.
"오늘도 비냐…. 하여간 날씨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맞춰준다니까."
우산 너머로 흘긋 보인 하늘을 올려다보며 라일은 혀를 찼다. 방금 불 붙인 담배가 눅눅해질 만큼 습기가 가득한 날이었다. 꽃다발을 살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던 라일은 결국 빈 손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우산을 든 손으로도 꽃다발 몇 개쯤이야 거뜬히 들 수 있었지만 어쩐지 영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어차피 기일을 챙기는 건 산 자들의 기만이잖아. 씁쓸히 자위하며 라일은 담배를 깊게 빨았다가 숨을 내뱉었다. 일렬로 쏟아지는 거센 빗줄기에선 희뿌연 연기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상하게 그 사람 기일에만 비가 오는 것 같단 말이지…."
대충 골라잡은 것치고는 정곡이었나. 라일은 끝에 새카맣게 고인 담뱃재를 톡톡 쳐서 떨어트렸다. 어떻게 죽었는지조차도 알지 못하다 보니, 라일이 명목상 붙인 기일은 그가 닐의 묘비를 처음 발견한 날이었다.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더 가족을 보러 가자는 마음에서 혼자 정해버렸을 뿐이지만, 늘 이 날만 되면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자니 라일도 기분이 미묘해지곤 했다. 눈썹을 조금 찡그린 라일이 코너를 돌며 다시금 담배를 물었다. 입을 가득 채운 담배가 오늘따라 쓰고 맛이 없었다.
"하늘도 그 사람이 죽은 건 슬퍼한다 이건가…… 음?"
라일은 반사적으로 멈춰 섰다. 닐의 묘지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실루엣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라일이 빗줄기 너머를 한참 응시했다. 낯선 방문객은 아직 라일의 존재를 눈치 못챈 듯했다. 라일이 꽤 멀리서 멈춰버린 탓도 있었지만, 주변을 인식할 상황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입에 문 담배로 가까워지던 손이 느리게 멈추었다. 유독 커진 빗소리가 우산을 마구 두들기며 시끄럽게 울었다.
'저 사람은…'
아무리 봐도 그보다 다섯은 더 어릴 듯한 소년이었다. 끝이 제멋대로 말린 흑발은 물에 푹 젖어 있었고, 아무렇게나 걸치고 왔을 하얀 후드도 보기 안쓰러울 만큼 축축했다. 라일이 오기 한참 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라일은 저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여 몇 걸음 다가섰다. 그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닐의 묘비에 손을 얹고 있었다. 푹 숙인 이마를 그 옆에 맞대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소년이 가져왔으리라 추측되는 꽃다발에 그의 팔꿈치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부딪혀 부서졌다. 혹시 울고 있는 걸까, 무심코 생각했지만 라일은 어쩐지 그 의심을 지워버렸다. 그러고도 그는 한참 정체 모를 소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어쩐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라일의 입에서 담배가 맥없이 떨어져 웅덩이에 느리게 가라앉았다.
"……."
소년은 쭉 말이 없었다. 그저 묘비에 제 몸을 기댄 채 망부석처럼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잠들거나 기절한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건드리거나 말을 걸면 그대로 허물어질 것만 같아, 라일은 제 위치에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인형? 아니면 환영? 그만큼 위태로운 뒷모습이었다. 차라리 누가 저건 유령이라고 말해주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고 라일은 생각했다. 저렇게까지 지치고 무거워 보이는 육신으로, 이 비를 짊어지고 묘지를 지키고 있었다는 걸 알아버리는 것보다 그게 더 나을 듯했다. 돌아가. 돌아가. 문득 귓가에서 희미하게 울리던 소리가 비에 눌려 지워졌다. 그건 자신의 마음의 소리였을까. 아니면. 라일은 무심코 우산 손잡이를 꽉 쥐었다. 소년의 늘어진 머리 끝에 달려 있던 물방울이 연달아 떨어지며 눈물처럼 바닥에 자국을 그렸다.
얼마나 오래도록 있었을까. 라일이 보고 있는 동안 소년은 아주 느리게 일어섰다. 얼굴을 자세하게 알아볼 거리는 아니었지만 라일은 그가 울지 않았다고 어렴풋하게 추측했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도 차마 그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소년의 눈이 고요하게 묘비를 응시했다. 기이하게도 생기가 없는 동공이었다. 차라리 눈물이라도 흘리면 좀 나았을걸. 라일은 무의식중에 입술을 깨물었다. 새하얗게 질린 손끝이 묘비를 쓸었다. 파르스름한 입술이 열리며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또 올게."
그는 몸을 돌렸다. 라일과 반대 방향이었다. 희미하게 멀어지는 발소리로 제 형체를 증명하며 소년은 느리게 사라져갔다. 그가 오랜 시간을 들여, 완전히 어둠에 녹아들 때까지 그 걸음을 지켜보던 라일이 비로소 형에게로 눈을 돌렸다. 발은 아직도 한참 떨어진 곳에 머무른 채였다.
"……이봐, 형."
소년의 것보다 훨씬 탁한 울림이 떨렸다.
"행복했어?"
거세진 빗줄기가 지면을 튀어올라 라일의 구두와 바짓단을 적셨다. 미간을 구긴 라일이 소년이 두고 간 꽃을 보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줄곧 뿜던 담배 연기보다 더 깊은 탄식이었다. 차마 소년이 두고 간 자리를 침범치 못하고 라일은 제자리에서 서성이다가 큭,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무언가를 내뱉으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혼자서 흘리듯 삭였던 질문들이 지금만큼은 괴로웠다. 왜 늘 고통은 산 자들의 몫인지. 어째서 엉뚱한 제가 홀로 남겨진 이를 보며 가슴이 미어져야 하는지. 그리도 잘난 형은 왜 저 이름 모를 아이를 두고 떠나야 했는지. 딱딱하게 새겨진 이름을 훑는 허망한 눈에, 작은 손가락에, 자신이 사랑 받았고 사랑했음을 여실히 새겨넣은 저 작은 소년을.
적어도 지금은 행복하지 못하겠다. 형. 그치. 자조하듯 중얼거리며 라일은 어린애처럼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아직도 퍼붓는 비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닐이 가여웠다. 홀로 남겨진 소년도 가여웠다. 제가 모르는 이유로 엇갈린 둘의 가련함이, 비로소 서러워진 형의 죽음과 겹쳐져 라일은 쉬이 일어서지 못했다. 안고 가기 어려운 마음이었다.
라일은 끝끝내 그 날 닐의 묘지 앞에 서지 못하고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마저 마냥 길었던 하루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