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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오 1기 초반의 시점입니다.
개인적인 해석이 담겨 있습니다.
록온은 커피를 좋아했다. 식사 전후든, 일을 끝낸 뒤든, 동료들과 간단하게 담소를 나눌 때든 그는 늘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세츠나가 그걸 물끄러미 보고 있거나, 크리스가 쓴 걸 왜 마시냐고 진지하게 물어올 때면 그는 여유롭게 어른만이 이해할 수 있는 깊이가 있다고 장난기를 담아 대꾸하곤 했다. 지나가듯 말을 들었던 티에리아로서는 그 말조차도 납득키 어려웠지만 마음에 오래 담아두지 않았다. 별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른'과 '입맛'은 과학적으로 연결 고리가 없고, 그건 단순한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걸 머릿속에 입력된 지식으로서 판단하고 정리해온 그에게 록온의 말은 어디까지나 어린애에게 건네는 농담일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거기에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뭣보다 세츠나나 그녀 같은 어린애가 아니니까. 오늘, 아무 생각 없이 들이켠 커피 한 모금과 마주하기 전까지의 티에리아는 늘 그리 자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
화끈거리는 입가를 손등으로 꾹 누르고서, 티에리아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제가 마신 잔을 내려다보았다. 잠깐의 뜨거움은 곧 가셨지만 그가 더욱 당황한 건 혀부터 입 안쪽까지 진하게 맴도는 쓴맛 때문이었다.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독한, 나무껍질을 생으로 씹어먹은 듯한 식감이었다. 얼얼한 입안을 훑으며 티에리아는 독사라도 본 눈으로 잔을 응시했다. 나무껍질을 진하게 우린 듯한 흑갈색의 빛깔하며, 희뿌옇게 솟는 김과 함께 올라오는 향은 분명 록온이 즐겨마시던 커피가 맞았다. 이렇게까지 쓴 걸 일부러 마신다고? 록온 스토라토스는 마조히스트인가? 지나친 당황이 부른 억측에 스스로도 놀란 티에리아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겨우 진정한 시선이 이유 모를 불안과 불안을 품고 도로 잔에게 향했다. 잔은 여전히 다를 바 없는 진한 향을 풍기며 티에리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자주 즐기던 사내마냥 웃고 있는 듯했다.
"…너무 뜨거워서 놀란 건가?"
티에리아는 다시 잔을 들어 입술에 갖다댔다. 고양이가 뜨거운 걸 혀에 대듯, 조심조심 기울여 입을 적시는 모습이 평소의 그와 달리 날이 곤두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티에리아는 오만인상을 쓰며 잔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맛없어. 그 남자는 이게 뭐가 좋다고 그렇게 마셔대는 거지…?"
궁금함을 넘어 속은 것만 같은 분함이 밀려와 티에리아는 눈썹을 삐딱히 우그러뜨렸다. 이런 걸 그렇게 맛있다고 달고 사니까 마셔도 되겠다고 오해하는 사람이 생기잖아. 괜히 록온에게 쓸데없는 화풀이를 하고 나자 그제야 기분이 가라앉는 듯했다. 혀를 맴돌던 쓴 기운도 좀 가셔서, 겨우 침착을 되찾은 티에리아가 난감한 눈으로 커피잔을 흘긋 보았다. 고작 두어 모금(정확하게는 한 모금 하고도 두어 방울)을 마셨을 뿐인 커피를 그냥 버리기엔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양을 다 마실 엄두는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떻게 하면 될까. 망친 요리를 앞에 둔 초보 요리사처럼 티에리아는 전에 없이 초조해하며 시선을 내려뜨렸다. 어지간한 지식은 머릿속에 다 넣어두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대책은 마음처럼 쉽게 떠올라주지 않았다.
"오, 좋은 향기가 나는데… 음? 티에리아잖아. 여기서 뭐하고 있어?"
티에리아는 움찔 튀어오르려는 어깨를 겨우 누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록온이 젖은 머리를 말리며 주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부드럽게 끝이 말리는 머리 끝을 수건으로 꼭꼭 누르는 커다란 손등에 핏줄이 드러날듯 말듯 희미하게 꿈틀이다가 멎었다.
"…당신이야말로. 물기도 제대로 안 닦고 주방에 들어와도 되는 건가?"
"미안, 미안. 방이 아니라 공용 샤워실에서 씻었거든. 그보다 커피 끓였어? 네가 커피를 찾다니 별일이네."
말을 매끄럽게 늘어놓는 그의 입술엔 가벼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록온에게 가졌던 괜한 심술이 멀끔히 지워져버려, 티에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슬 피하며 고개를 약간 돌렸다. 코끝을 찌를 듯하던 짙은 커피향이 꽤 옅어져 있었다.
"그냥… 딱히 마실 게 보이질 않아서."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괜찮다면 나도 한 잔 부탁해도 될까?"
태연히 말하며 록온이 걸어와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의 머리칼이 흔들리며 떨어져 나온 물방울들이 티에리아의 옷에 동그랗게 스며들었다. 그러나 커피에 정신이 팔려 있던 티에리아에겐 그것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혹시 내가 커피라는 걸 잘못 내려서 썼던 걸 수도 있잖아. 록온도 써서 못 마시겠다고 하면 어쩌지? 그런 고민이 잠깐 머릿속을 스쳤을 때였다.
"티에리아?"
티에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록온이 고개를 바짝 들이밀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물기가 배어 있는 뺨 위로 갸름하게 자리한 녹음의 눈동자가 티에리아를 담고 부드럽게 휘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해?"
"…읏"
황급히 몸을 뺀 티에리아가 대답도 없이 커피 포트부터 움켜잡았다. 손잡이를 딱 맞춰 잡은 게 놀라울 정도였다. 이유도 모르고 쿵쾅대는 가슴을 꾹 누르며 티에리아가 컵에 커피를 대충 따라 내밀었다. 손이 떨리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영문을 알 수 없는 박동이 시끄러웠다.
"갑자기 얼굴을 들이대니까 놀라지 않나! 빨리 이거나 받아."
"아, 그랬어? 미안. 어째 아까부터 실수만 하네."
날이 선 대꾸에도 록온은 사람 좋은 웃는 얼굴이었다. 손을 숨기듯 팔짱을 끼고 선 티에리아가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슬쩍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스스럼 없이 커피를 두어 번 홀짝인 록온은 티에리아처럼 눈을 찡그리지도, 지독한 맛에 혀를 내두르지도 않았다.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즐거운 어조로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이안이 주는 커피보다 훨씬 맛있는걸. 고마워, 티에리아."
"……."
정말로 마조히스트인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지만 티에리아는 입 밖에 내지 않기로 했다. 연신 커피를 홀짝이던 록온의 시선이 문득 식탁에 놓인 다른 잔에 가 닿았다. 올라오던 따끈한 김은 일찍이 식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넌 안 마시는 거야? 손도 별로 안 댄 것 같은데."
이번엔 어깨의 동요를 피할 수 없었다. 머리를 굴리던 티에리아가 대충 변명거리를 짜냈다.
"너무 뜨거운 건 좋아하지 않아서. 조금 식혀서 먹을 거다."
"다 식은 것 같은데? 너무 식히면 맛없어질걸?"
"……."
안 그래도 맛없는데 더 맛없어진다니 최악이다. 역시 저 남자가 가버린 뒤에 버리는 게 나을까. 어느샌가 진지하게 고민하며 티에리아는 대꾸도 않고 잔만 흘긋거렸다. 안경테가 없는 유리알 속의 눈이 꽤 바쁘고 심각해보였는지, 덩달아 진지하게 그를 바라보던 록온이 문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커피를 마시는 걸 본 적이 없던 티에리아와, 양이 조금도 줄지 않은 잔. 거기에 록온이 제일 좋아하는 설탕도 시럽도 넣지 않은 쓰고 진한 맛의 커피. 록온은 추리를 즐겨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의 단서로 유추도 못할 바보도 아니었다.
"혹시 티에리아 너… 써서 못 마시는 거야?"
"아니야!!"
과민반응이었다는 걸 깨닫기엔 대답의 속도나 크기가 평소의 배 이상이었다.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던 록온이 풋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티에리아의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왜 웃는 거지? 아니라고 했잖아!"
"아, 그랬, 푸훗, 그랬지, 아하하, 미안, 미안. 설마 이런 귀여운 반응일 줄은 몰라서… 아하하."
"귀, 귀여… 뭐?"
티에리아가 주먹을 꽉 움켜쥐곤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귀끝까지 붉어진 채로는 성을 내도 무용지물이었다. 다행히 오래 웃지 않고 일어선 록온이 반쯤 식은 잔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웃음 소리는 그쳤다지만 여전히 그의 입가엔 가시지 않은 미소가 고여 있었다.
"그럼 귀여운 동료님이 쓴맛을 극복하실 수 있도록 마법을 좀 부려볼까~"
"그러니까 난 귀엽지 않다! 전부 마실 수 있어! 그거 내놔라, 록온 스트라토스!"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마법 같은 거 필요 없다니까!"
애초에 당신은 마법사도 아니잖아! 짜증스레 반박해도 록온은 요지부동이었다. 주방 한켠에서 뭔가를 달그락거리던 그의 뒷모습을 불만스럽게 노려보던 티에리아가 결국 록온에게 다가왔을 때였다. 타이밍 좋게 상체를 튼 록온이 티에리아에게 잔을 내밀었다. 얼결에 그의 손과 부딪힐 뻔했던 티에리아가 제게 건네진 잔을 내려다보았다. 올라오지 않는 김과 흑갈색의 액체. 아까 티에리아가 보았던 것과 변한 게 없었다.
"……?"
"괜찮으니까 마셔봐."
록온이 다정히 말하며 티에리아의 손을 끌어다 잔을 쥐어주었다. 거절할 새도 없이 둘러진 손바닥에 옅은 온기가 느리게 스몄다.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티에리아가 록온을 올려다 보았지만 그는 이제 말없이 웃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조심스럽게 다시 한 모금 들이켜며, 티에리아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만약 아까와 같은 쓴맛 그대로라면 록온에게 잔소리를 한 웅큼 퍼부어주리라 다짐하면서─
"…아…?"
티에리아는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커피를 다시 살피는 그는 제게 일어난 일을 영 못 믿겠단 얼굴이었다. 록온이 결국 소리 내어 웃는 것도 아랑곳않고, 티에리아는 커피를 또 한 모금 마셨다. 달았다. 처음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달고 맛있었다.
"내가 마법 부려준댔잖아. 마음에 들었어?"
록온이 몸을 굽혀 속삭였다. 장난기 반, 온화함 반이 두루뭉실하게 섞인 미소가 소년처럼 환했다. 연거푸 커피를 홀짝이던 티에리아가 뒤늦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럴 때도 도움이 되긴 하는군."
"그거 칭찬이지? 그런데 이럴 때도라니, 다른 때에도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
"전투중이나 다른 마이스터들을 통솔하는 것이나."
"거기에 커피를 맛있게 만드는 능력까지 추가야? 설마 이게 그런 것들과 같이 평가될 줄 몰랐는걸."
웃으며 턱을 괸 록온이 연거푸 커피를 마시는 티에리아를 바라보았다. 고민이 해결된 것에 대한 안도감인지, 쓴맛 뒤에 맛본 달콤함 때문인지 티에리아는 빠른 속도로 잔을 비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저를 보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마지막 한 모금을 남겨둔 티에리아가 록온을 향해 눈을 옮겼다. 짜증이나 불만은 어느새 말끔히 가셔 있었다.
"당신은 언제쯤 마법 없이 그걸 마셨지?"
"그건 비밀."
"…재미없군. 록온 스트라토스."
"너무하네. 평가 올려주는 것 아니었어?"
버려져 있던 자신의 컵을 도로 쥔 록온이 그를 입가에 가져가다 말고 빙그레 웃었다.
"나중에라면 가르쳐줄 수도 있는데."
"나중에?"
"그래. 또 나랑 커피 마셔줘. 그때도 마법 부려줄 테니까. 티에리아 네가 먹기 좋을 만큼 달달하게 만들어줄게."
그러니 약속이야. 짐짓 어조를 깔아 나직히 읊조린 록온이, 이내 티에리아와 눈을 맞추고 빙긋 미소했다. 곱게 휜 녹음을 빤히 들여다보던 티에리아가 남은 커피를 전부 들이켜곤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나쁠 건 없는 이야기였다. 커피란 것에 좀 관심이 생기기도 했고, 뭣보다 그가 만들어준 '마법의 커피'는 우유나 주스보다 훨씬 맛있었으니까. 어느 것 하나 달지 않은 게 없었다. 그런 것들을 가늠해보며 티에리아는 이번엔 입을 열었다. 아직 단맛이 배어 있는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조금 들떠 있었다.
"그래. 약속이다, 록온 스트라토스."
"오케이~ 그런데 그 호칭 말이야, 어떻게 안 될까? 록온쪽이 훨씬 정감가잖아."
"이건 약속 밖의 이야기다. 기각하겠어."
"깐깐한 녀석."
사이좋게 빈 두 개의 잔이 이마를 맞대고 놓였다. 시시콜콜하게 이어지는 말들이 아스라이 남은 커피향에 얽혀 소복하게 담기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