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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로만)이기와 이타
Caption 1부 종장 관련 중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네타를 원치 않으신 분께 권장하지 않습니다. 멀린과 로만이 사귀는 사이는 아닙니다. 로만의 멀린 취급에 주의해주세요. 로만은 지금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바쁜 토요일, 쉬는 시간도 삼십 분밖에 없는 빡빡한 날에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철저하게 기재를 점검하고, 지금까지의 현황을 토대로 작전을 짜고, 스태프들의 상태 확인 겸 지친 이들의 스케쥴을 재편성해주고, 리츠카의 건강을 체크하는 중요한 업무까지 있는 날에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말았어야 했다. 분노를 주체 못한 손가락이 기어이 바닥에 핀 꽃을 한 웅큼 뜯어선 냅다 집어던졌다. 구겨진 채로 흩어지는 꽃잎들이 청명한 바람을 타고 어지러이 춤을 추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리츠카나 마슈가 보았으면 놀랐을 만큼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래도 맞은편에 앉은 이는 얄밉도록 즐거운 웃음만을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로만이 잇달아 꽃을 뜯어 그에게 던졌다. 연한 분홍의 꽃잎이 둘 사이에 금세 수북히 쌓였다. "마력 좀 공급해주면 다야? 더 거들어줄 것도 아니면서 날 이렇게 방해해!" "하하하. 화난 고양이 같네~" "말을 하면 들어!!" 로만의 손에서 성나게 내쳐진 꽃잎이 멀린의 발치에 떨어졌다. 화풀이가 굉장하네. 여전히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멀린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어느새 새파란 풀포기만 남아 있던 로만의 주변이 삽시간에 흐드러지게 핀 꽃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훨씬 풍성하고 화려하게 핀 꽃들은 향기도 어지럽도록 짙었다. 그제야 손을 멈춘 로만이 멀린을 노려보았다. 험한 말도 폭력도 휘두르지 않았지만, 멀린을 향한 눈빛엔 미워 죽겠다는 속내가 또렷히 배어 있었다. 멀린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오랜만에 만난 건데, 계속 그런 태도면 상처받는다구?" "받든가." "너무하네." "나 바쁜 거 몰라? 지금도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사람을 강제로 꿈 속으로 끌고와놓고, 좋은 말 듣기를 기대했다니 어이가 없네!" 로만이 기어이 꽃을 또 뜯어내 그에게 던졌다. 어차피 맞아봤자 아프지도 않을 물건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화풀이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마냥 입 꼬리를 둥글게 말아올리고 있던 멀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쁜 줄 알아서 데려온 거야." "뭐?" "이렇게까지 안하면 안 쉴 거잖아?" 로만이 불만스러운 눈길로 제게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거리를 걸어, 로만의 바로 옆에서 멈춘 멀린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긴 옷자락이 펄럭이며 일으킨 바람에 마구잡이로 뜯어졌던 꽃잎이 다시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유독 멀리까지 흩어진 꽃잎 한 장이 로만의 손등을 간질이듯이 내려앉았다. 그 감촉에 무심코 움직였던 시선이 다시 돌아왔을 즈음엔, 멀린의 얼굴이 코 끝에 닿을 듯 가까워져 있었다. "잠도 안 자고 일에 몰두하다니, 잠의 여신이 슬퍼할걸. 혹사당한 네 육신도." 낮고 감미로운 음성엔 아직도 가벼운 웃음기가 배어 있었건만, 로만을 비추는 눈빛만큼은 진지하고 깊었다.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만큼. 저도 모르게 말문을 잃었던 로만이, 그 시선을 거절하듯 휙 고개를 돌렸다. "인류의 앞날이 걸린 일이야. 잠으로 허비할 시간은 없어." "허비라니 너무하네. 잠이 얼마나 생산적이고 중요한 일인데." "사람의 꿈에 들어가서까지 공부를 시킨 너한테는 듣고 싶지 않아. 아무튼 난 정말 바쁘니까, 알아들었으면 놔줘." "으음~? 못 알아듣겠는걸~" "멀린!" 로만의 울분 섞인 외침이 쩌렁쩌렁 울려퍼졌을 때였다. 갑자기 그를 뒤로 당기는 힘에 끌려간 상체가 천지에 핀 꽃에 푹 파묻혔다. 얼결에 내뻗은 팔이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맥없이 허공만 휘저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건만, 억센 팔이 다가와 그를 와락 끌어안기까지 하자 로만은 그대로 사고가 정지해버렸다. 그의 목에 코를 파묻은 멀린이 강아지마냥 풍성한 머리칼을 그의 목덜미에 마구 비벼왔다. "안 놔줄 거야. 오늘 하루가 다 가면 보내줄게." "악마냐!" "몽마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을까?" "웃기지 마! 빨리 놔! 난 지금 정말 바쁘다고! 듣고 있어!?" 로만이 바락바락 소리 지르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마술사이기 전에 기사왕의 검술 스승인 그의 완력을 당해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저항을 멈춘 로만이 지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끝까지 멀린의 얼굴은 보기 싫다는 듯, 고개만큼은 반대쪽으로 돌린 채였다. 그가 그러건 말건 말없이 웃어보인 멀린이 로만을 좀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선선히 지나가던 바람이 다시금 꽃잎을 불어 로만과 멀린의 위에 흩뿌렸다. "…하여간 제멋대로야." 로만이 맥없이 중얼거렸다. "난 그래서 네가 싫어." "응. 알아."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뭐든 해버리지. 그런 목표마저 없을 땐 자기 좋을대로 사람을 휘둘러대기만 하고." "그럴 지도 모르지.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까." 태연히 말하며 멀린은 손을 올려 로만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환한 분홍빛의 머리칼이 부드럽게 그의 손가락에 휘감기다가 물처럼 흐르며 빠져나갔다. 로만이 몸을 돌려 누운 탓이었다. 훨씬 멀어진 곳에서 로만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기적이야." "넌 너무 이타적이고." "너보단 훨씬 나아. 사람 감정은 이해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그저 흉내만 내면서 들쑤시는 너보단 내가 더 나아." 멀린이 고개를 조금 들었다. 코 끝만이 겨우 보일 뿐인 윤곽으로는 로만의 표정을 조금도 읽을 수가 없었다. 무표정하게 눈만 깜빡이던 멀린이, 곧 편히 누우며 다시금 로만을 꼭 끌어안았다. 이번엔 로만도 그를 뿌리치지 않았다. 칼라 위로 드러난 뒷목에 살짝 입맞춤을 한 멀린이 입술을 댄 채로 속삭였다. "그래. 그렇다고 해. 나보다 네가 훨씬 낫고, 나는 악질이고, 네 일을 내멋대로 방해해버린 못된 악마야." "……." "그러니까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놓아주지 않을 거야. 네가 뭐라고 하건, 나는 네가 쉬기를 바라고 잠깐이라도 편하길 바라니까. 내 이기로 네게 잠을 밀어넣고, 어떤 걱정도 보이지 않는 꿈을 꾸게 할 거야. 못됐다고 말해도 돼. 욕을 해도 돼. 이건 전부 나를 위한 거니까. 그러니까 로만." 커다란 손이 로만의 손 위에 조심스럽게 겹쳐졌다. "잠시만 자자." "……." "쉬자. 조금만."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로만이 힘겹게 눈을 내리감았다. 떨리는 숨이 잘 가다듬어지지 않았다. 멀린이 너무 세게 끌어안아서. 멀린이 피운 꽃 향기가 너무 진해서. 멀린에게 안긴 몸이 더워서. 멀린이 이상한 말을 해서. 그의 이기가 싫을 만큼 숨이 막혀서. 멀린이, 멀린이, 멀린 때문에. 더 뿌리칠 수도 없는 견고한 품 안에서, 로만은 잠이 들 때까지 가쁜 숨을 작게 작게 잘라 내뱉어야 했다. 안에서 피어나는 감정을 조각내어 내뱉는 것처럼, 셀 수도 없이 몇 번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