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로 돌아가기
멀린리츠)Its a dream
코끝에서 살랑거리는 향기가 달콤하고 간지러웠다. 리츠카가 잘 알고 있는 꽃내음이었다. 싱그럽고, 향긋하고, 한 번쯤은 코를 박고 푹 취해보고 싶을 만큼 달게 스미는 향기. 저도 모르게 두어 번, 크게 숨을 들이켜던 리츠카가 문득 눈을 떴다. 하얀 구름 몇 조각이 떠 있는 파란 하늘이 어지럽도록 높았다. 칼데아가 아닌가, 무심결에 중얼거린 리츠카가 고개를 약간 흔들었다. 뭔가에 푹 파묻혀 닿은 양뺨과 손이 간지러웠다. "깼나?" 경쾌한 물음과 함께 인영 하나가 그의 위로 드리워졌다. 하얀 어깨에서 흘러내린 백발의 머리칼이 리츠카에게 닿을 듯한 거리에서 멈추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시종일관 코를 간지럽히는 향이 어째서 이토록 짙었는지 리츠카는 그제야 이해했다. 하하, 실없는 웃음을 흘린 리츠카가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멀린이 예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응. 안녕, 멀린. ...좋은 아침, 이라고 해야 하나?" "그 인사는 아직 이르지. 아직은 꿈속이거든." 모양 좋은 입술을 부드럽게 휘어 웃은 멀린이 상체를 좀 더 숙였다. 긴 머리카락과 함께 늘어진 꽃잎의 귀걸이가 은은한 선을 그리며 흔들렸다. 그걸 빤히 바라보자니 최면에라도 걸릴 것 같아, 리츠카는 다시 멀린의 눈을 찾았다가 후회했다. 반인 반몽마라 했던가. 귀걸이의 단조로운 움직임보다 이쪽이 더 쉬이 취할 듯했다. "꿈? 누구의?" "글쎄. 맞춰봐. 그럼 일찍 나가게 해주지." 맑게 웃은 멀린이 몸을 좀 더 틀어선 완전히 리츠카의 위로 올라탔다. 드높던 하늘이 가려진 시야엔 장난기 많고 짓궂은 서번트의 눈빛만이 마법처럼 가득했다. 리츠카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아직은, 그를 밀치고 빠져나갈 수 있을 터였다. 멀린이 눈빛으로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츠카는, 지금껏 제 손등을 간지럽히던 애꿎은 꽃잎만 꼭 움켜쥐었다. 밀어낼 수 있을 리없었다.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안 나가면, 어떻게 되는데?" "흐음~ 글쎄?" 멀린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숨결이 스칠 거리에서 먼저 내려앉은 머리카락들이 꽃잎처럼 간지러웠다. 리츠카는 다시금 마른 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뜨거웠다. "위험한 장난을 당할지도 몰라." 선명하고 나직한 속삭임. 그 울림이 끝나기도 전에 리츠카의 입술 위로 그의 입이 겹쳐졌다. 동그랗게 뜨인 눈이 멀린을 담으며 바쁘게 깜빡거렸다. 혈색 좋은 뺨이며 이마, 곱게 내리감긴 속눈썹이 너무 가까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리츠카의 것보다 조금 낮고 서늘한 숨결이 스며들어 둥근 입안에 고였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듯해, 리츠카는 꽃들을 한 가득 움켜쥔 손을 움찔거렸다. 생애 첫키스였다. "읍……." 가늘게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키듯, 입을 더 바짝 맞물린 멀린이 능숙하게 혀를 얽었다. 괜찮아. 착하지. 그래, 좀 더 내 쪽으로 다가와도 돼. 옳지. 상으로 전부 어루만져줄 테니까. 들릴 리 없는 음성이 이상하게도 또렷하게 뇌리를 맴돌며 미묘한 감각을 흩어놓았다. 어설프게 혀를 움직이던 리츠카가 다시금 힘겨운 신음을 흘렸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살덩이가 훑고 간 곳마다 타액으로 온통 젖어 흥건했다. 겨우 뜨고 있던 시야는 눈물인지 산소부족인지 모를 이유로 몽롱하고 흐릿했다. 꽃내음이 밴 손이 멀린의 로브를 더듬거리다 겨우 붙들었다. 새하얀 옷자락에 손톱 자국과 함께 배는 분홍 꽃물이 선연했다. 마지막으로 아랫입술을 장난스레 깨문 멀린이 고개를 들었다. 가쁜 숨을 고르는 리츠카의 뺨이 온통 붉었다. 다정한 눈길로 그를 보듬다, 쿡쿡 웃은 멀린이 그의 눈가에 쪽 입술을 떨어트렸다. "키스할 땐 눈을 감아야지, 마스터군."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처음이었다고." 리츠카가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나름의 항변도 마냥 귀여워, 장난꾸러기처럼 웃어버린 멀린이 리츠카를 덥썩 끌어안았다. 잠깐, 스탑. 곧바로 튀어나오는 당황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래서, 답은 생각해봤어? 뭘 것 같아?" "…생각할 겨를도 안 줬으면서." "그럼~ 장난엔 빈틈이 없어야 곯리기 재밌거든." 태연히 대꾸한 멀린이 뺨을 부벼왔다. 리츠카가 그를 밀어낼듯 어깨에 손을 올렸지만 결국 그 이상으로 멀린을 거절하진 못했다. 역시 약하다니까. 나도. 한숨을 길게 내쉰 리츠카가 힐끔 멀린을 보았다.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눈이 여전히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눈이었다. 바라는 걸 다 들어주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그가 자신보다 더 가진 게 많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꿈에 취한다는 게 딱 이런 기분일까. "그럼 답을 맞출 때까지 나랑 또 놀아줘야겠어, 마스터." 나랑, 에 힘을 주며 멀린이 활짝 미소 지었다. 사방엔 아직도 만개한 꽃내음이 한창이었다. 결국 못 이기고 웃고 만 리츠카가 손을 올려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그와 자신, 둘만에게 허락된 정원이었다. 한 번쯤은 푹 빠져 있어도 될 듯 싶었다. 꿈이 깨기 전까지. 강하고 아름다운 몽마가 저를 놓아줄 때까지는. "마음대로 해." 다시금 내려온 입술이 따뜻하게 포개어졌다. 이번엔 둘 다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