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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8화: 유토슌)소나기공포증
Caption 아크파이브 55화 감상 후 쓰는 글입니다. 55화 이후로 밝혀졌을 내용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는 걸 미리 밝혀둡니다. 21화 이후의 내용 날조입니다. 슌은 눈을 떴다. 뺨에 닿는 공기가 서늘했다. 저 멀리 무너진 천장 언저리에서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닥에 고인 웅덩이가 연신 둥근 원을 그리며 찰랑거렸다. 지난밤부터 지금까지 죽 내린 듯 했다. 잠에 잠겨 흐릿하던 금안의 초점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밤새 눌려 있던 등이 조금 뻐근했다. 팔장을 끼고 있었던 팔도 뻣뻣이 굳어 있었다. 짧게 숨을 내뱉으며, 눈을 한 번 더 깜빡거린 슌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자욱한 하늘이 무겁고 흐렸다. '비는 싫은데.' 습관처럼 미간이 모아졌다. 하트랜드가 습격으로 무너진 후로, 그 상처를 조롱하듯 곳곳까지 스며드는 축축함이 슌은 싫었다. 루리가 사라진 후로는 더 그랬다. 잃어버린 이의 자리가 음습한 자국으로 그려지는 듯한 감각. 이것이 울적하다 못해 진저리가 쳐져, 유토에게 울분에 찬 목소리로 내뱉었던 날도 있을 정도였다. 비가 수없이 쏟아지던, 루리를 잃은 지 얼마 안 되던 날의 기억. 무심코 그 날을 되새기려던 슌은 인상을 쓰고 고개를 흔들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매번 비가 올 때마다 트라우마에 시달릴 순 없었다. 이제 슬슬 일어나야지. 나가야 해. 지친 눈가를 느리게 쓸어내린 슌이 막 일어서려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 어디선가 날아온 낡은 모포 하나가 그를 감싸듯이 내려앉았다. 의아함을 품고 기울어지던 눈이 위를 향했다가, 이내 옆으로 돌아갔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이가 슌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익숙한 인영이었다. "깼네. 좀 더 일찍 올걸." 유토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슌이 잠든 뒤로도 계속 돌아다녔던 모양이었다. 슌은 대답 대신 유토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유토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눅눅한 어둠 속에서도 회색빛의 눈동자가 또렷했다. "덮어줄 필요 없었는데." "내가 추워서." 변명이라고 슌은 생각했다. 망토 하나 빼곤 반소매의 셔츠 하나만 입은 유토를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코트 단추 하나 푸는 일도 없이 꽁꽁 싸맬 만큼 추위에 약한 슌을 배려한 일이었음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잠시 눈을 내리깔았던 슌이 도로 입을 열었다. "나갈 거야." "비 많이 와. 나중에 같이 나가자." "혼자 갈 거다만." "비 오잖아. 내가 싫어." 이번에도 변명이었다. 비 오는 날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건 분명 유토가 아닐 터였다. 슌은 말없이 유토를 바라보다, 결국 포기하곤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죽죽 그어지는 빗줄기가 통통 고인 물을 두드리며 한기를 퍼트렸다. "아파?" "어디가." "배." 슌은 낮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아픔은 진작에 가셔 있었지만, 나온 말은 그것과는 조금 엇나간 대꾸였다. "때린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유토가 난감한 듯 웃음을 옅게 흘렸다. "미안하다." "……." "화났어?" "안 났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중에 상황 설명도 들었거니와, 유토가 슌을 위해서 그랬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심술이 나는 것도 사실이라, 슌은 대뜸 유토가 덮고 있던 모포를 끌어당겼다. 삽시간에 밖으로 밀려난 유토가 금세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미안해." "아까 말했어. 그리고 아프지도 않으니까. 이제 이 얘긴 그만하지." 슌이 태연히 모포에 제 입가를 푹 묻었다. 눈을 깜빡이던 유토가 희미하게 웃곤 슌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았다. 고인 물 웅덩이는 잠깐 새에 많이 불어나 있었다. 그나마 건물 가운데에 바닥이 있어, 물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는 흘러오지 않을 듯 싶었다. 다른 곳에 있을 동료들은 뭘 하고 있을까. 비는 잘 피하고 있는 걸까.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슌의 표정이 돌연 어두워졌다. 팔을 쓸던 유토의 손도 멈추었다. 같은 걸 생각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괜찮겠지." 못 견디고 먼저 입을 뗀 건 슌이었다. 유토가 한숨을 조용히 흘렸다. 이어지는 대답에도 주어는 없었다. 차마 부르지 못한 이름이었다. "괜찮을 거야." "비가 계속 오고 있어." "언젠간 그칠 거야. 그러면 햇살도 나올 거고." "…그게 언제일까." "언젠가. 꼭." 대화가 끊어졌다. 팔을 매만지던 유토의 손이 모포 안으로 들어갔다. 슌은 달리 말이 없었다. 따뜻한 손이 슌의 손을 찾아 감싸듯 덮었다. 유토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보다 한참은 큰, 하지만 미미하게 무른 어깨에 머리가 포개지듯 닿았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믿어. 우린 반드시 해낼 거고, 이 자리에 함께하게 될 거야." "……." "그러니 좀 더 힘내자. 슌." 슌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얗게 맺혔다 흩어지는 탄식에, 얼굴로는 읽히지 않는 떨림이 있었다. 슌도 가만히 머리를 기울여 유토에게 기댔다. 내내 얌전하던 손이 움직여 저를 덮은 손을 맞잡았다. 언젠가 이 손을 잡을 때, 잡지 못했던 소중한 혈육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녀만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비가 너마저 쓸어내리지 않기를 바란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슌이 눈을 내리감았다. 두려움을 혐오로 포장한 내심은 아직 전할 수 없었다. 그저, 바람을 담아 말을 되풀이하는 것밖에는. "그래. 함께." 그칠 줄을 모르는 비가 여전히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