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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5화: 춘삼레븐 커맨레븐 모음
01.춘삼레븐 "니는 발목이 와 그리 얇노?" 베일 같은 연기로 몇 번이고 이지러지는 달이 문득 그에게 말을 던졌다. 꿈이라도 꾸는 걸까, 얕은 잠에 취해 있던 눈이 긴 속눈썹을 떨며 느릿하게 꿈뻑거렸다. 익숙한 듯 익숙지 않은 그 목소리가, 달이 아닌 제 옆에서 들려온 것을 금방 알아채지 못한 것도 그 탓이었다. 맨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이불을 당기며 레이븐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두툼한 자락을 말아쥔 가느다란 손가락 위로 결 좋은 은발이 달빛처럼 걸렸다. "무슨 소리야?" "니 발목 말이다. 가시내도 아닌 것이 우째 이리 가늘고 얇노. 톡 치면 딱 뿌러질 것처럼 생겼구마." 걸죽한 어조와 함께 대뜸 다가온 손이 그의 발목을 쥐고 잡아당겼다. 아플 정도의 힘은 없었지만, 방심하고 있던 탓에 넘어질 뻔한 레이븐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불을 더 끌어당겼다.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던 허벅지가 달이 구름 속에 숨듯 얄밉게도 모습을 쏙 감추었다. "부러진 적은 없고 남의 걸 부러뜨려본 적은 있는데. 그나저나 왜 갑자기 그러는 거야? 넘어질 뻔했잖아." "아, 기랬나. 미안타. 좀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그란 기니 너무 화내지 마라." 가는 호선을 그리며 휜 검은 눈동자가 다시 그의 발목으로 향했다. 이미 눈으로 봐서 알고 있었지만, 그가 실제로 잡아본 레이븐의 발목은 성인 남자의 손에 다 잡힐 정도로 얇았다. 복사뼈부터 아킬레스 건까지, 어느 곳하나 뼈가 도드라지지 않은 곳이 없는 발이었지만 동시에 흉터 하나 없이 매끄럽게 뻗은 선이 마치 잘 깎아 다듬은 듯 우아한 멋이 있었다. 그래서 샌들을 신고 다니는 건가? 예쁘니까 자랑하려고?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검지로 복사뼈를 무심히 쓸어내렸다. 둥근 선이 그대로 드러난 부위가 검지에 더덕더덕 붙은 굳은 살에 쓸려 아픈 듯이 작게 떨렸다. "...이제 다 봤지? 놔." "아, 짜슥. 많이 보면 닳나? 닳아? 잠깐을 못 보게 하네." "닳아! 닳는다고! 그러니까 놔!!" 레이븐이 버둥거리며 자유로운 한쪽 다리로 냅다 그의 팔을 걷어찼다. 아파하지도 않는 그의 입에 되레 서글서글한 웃음만 달빛처럼 걸렸다. 레이븐의 어두운 구릿빛 살갗 위로 흐릿한 홍조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야, 김춘삼!! 빨리 안 놔?!" "아따, 이럴 때만 그 이름으로 부르더라잉. 알았다, 이제 놓아줄텐게 그만 퍼드득거리라잉." 작게 웃은 그의 입술이 문득 아래로 향했다. 잔뜩 약오른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레이븐의 눈이 일순 커다랗게 뜨이며 잘게 흔들렸다. 꽃잎이 스친 듯, 간지럽고 희미한 감각을 새기는 것처럼 한동안 그의 복사뼈에 머물러 있던 입술이 조심스럽게 떨어졌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그저 환히 웃는 그의 얼굴엔 누군가 흘린 듯한 봄이 묻어 있었다. "됐다. 내 볼일은 이걸로 끗. 놀라게 해서 미안했대이." "......" "아, 이제 슬슬 자야것구만. 시간이 와 이리 빨리 지났노. 잘 자래이, 까마귀. 낼 보자잉." "......아아, 너도." 허공에 들려 있던 발을 끌어당기며 레이븐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는 벌써 돌아누워서는 제 몫의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늘어진 곱슬머리 옆으로 드러난 탄탄한 어깨선을 말없이 바라보던 레이븐이 조심스럽게 제 발목에 손을 가져갔다. "......" 그가 장난처럼 입술을 맞추었던 곳에 손가락이 스쳤다. 가벼운 접촉이 남긴 온기를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븐의 손가락은 자꾸만 그 복사뼈에서 뭘 찾듯이 헤매었다. 느릿하게, 길을 잃은 것처럼 그저 정신 없이 살 위를 헤집던 레이븐이 한참 뒤에야 손을 거두었다. 달빛을 등진 방엔 그의 따뜻한 숨소리만이 고요히 울리고 있었다. "......바보." 세운 무릎 사이로 감춘 얼굴 아래로 눈물처럼 말이 흘렀다. 02.커맨레븐 "가끔은 이해가 안 돼." 뜬금없는 발언이 무슨 뜻인지 유추하기도 전,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 손이 입술에 물려 있던 담배를 앗아갔다. 눈을 있는대로 찌푸린 레이븐이 고개를 휙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가벼운 셔츠조차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앉아 있던 커맨더가 태연하게 담배를 창틀에 지져껐다. 담담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실린 담배 연기가 아쉽게 흔들리다 사그라들었다. "아무리 내가 고용주라고 해도, 이런 요구에 일일이 응해주는 게 말이지." "입이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라. 응하는 게 아니라 네놈이 강제로 하는 거겠지." 파란 하늘빛에 어스름하게 비친 커맨더의 옆얼굴에 낮은 미소가 걸렸다. "글쎄. 침대 위에서 귀엽게 구는 걸 보면 강제는 아닌 거 같던데. 아까도 말이야, 허리 살랑살랑 흔들면서ㅡ" "그 혓바닥에 구멍내기 전에 닥쳐, 색마새끼." 레이븐은 평소에도 말투가 조신한 편이 아니었다. 거기에 진심까지 깃들어 더 살벌해진 음성에, 커맨더는 알겠다는 듯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그 여유로운 동작마저 마음에 들지 않은지, 한참 그를 노려보던 레이븐이 몸을 돌려 누웠다. 끈적하게 젖은 다리 사이가 불쾌해 당장 몸을 씻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커맨더가 쓰는 침대는 그런 찝찝한 욕구까지 덮어 재울 정도로 푹신하고 아늑했다. 고급 린넨 천으로 만든 하얀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긴 레이븐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커맨더는 그가 편히 자도록 내버려둘 위인은 못되었다. "어이. 까마귀." "......" "내 질문엔 대답해줘야지? 의문형으로 물어야 대답해줄 건가?" 동근 머리만 겨우 내놓은 레이븐은 말이 없었다. 잠시 그를 응시하던 커맨더가 아직도 손에 들려 있는 꽁초를 입에 넣고 잘근 씹었다. 축축하게 젖은 끝에선 그와 키스할 때 종종 나던 알싸한 맛이 났다. 그 맛을 음미하듯 혀를 굴리던 커맨더가 빙긋 웃었다. "역시 내 물건이 좋아서 안기는 건가? 내가 테크닉이 좀 좋긴 하지." "정말 죽여버리겠어. 그 입에서부터 바람 구멍을 내버릴 거야." 그의 예상대로 레이븐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무섭도록 빠르게 몸을 일으켜 자신을 노려보는 레이븐을 보며, 커맨더가 예의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능글거리기보단 정말 재미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렇기에 레이븐은 그의 웃음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게 진작 말해주면 되었잖아. 내가 어떻게 나올지, 이제 파악할 때도 되지 않았나?" 진저리쳐질 만큼 뻔뻔스러운 발언에 이젠 화낼 기운도 안 날 지경이었다. 역겨움과 혐오를 가득 담아 그를 노려보던 레이븐이 결국 머리를 쓸어넘기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까 갑작스럽게 일어난 탓에 허리가 제법 아팠지만, 그걸 커맨더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네놈은 나를 이용하겠다고 말했다. 부대의 승리를 위해." "그랬지." "그러면 답은 나온 것 아닌가? 나 역시 널 이용하기 위해 어울려주는 것뿐이다. 네놈의 그 지독한 성욕만 떠올리면 지금이라도 미간을 은탄으로 쏴버리고 싶지만, 네놈이 죽어버리면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지장이 생기니까." 벗을 앗아간 자. 꿈이 아니더라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들을 처단하려면, 다른 어떤 것보다 커맨더의 지위가 가진 힘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자유롭게 정보를 모아도 의심받지 않고, 누군가를 죽인다고 해도 크게 주목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레이븐에게 필요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커맨더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반항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이븐은 이 모든 것까지 그에게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빌미가 있다면 그는 단숨에 레이븐의 날개를 잘라내어 자신만의 공간에 가두어둘 것이 뻔했다. 누구에게나 상냥하지만,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철두철미하기에 더 무서운 남자. 그것이 그간 커맨더를 살펴왔던 레이븐이 내린 감상이었다. 그에게는 어떠한 것도 자세히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재밌는 대답이군." 연기도 나지 않는 담배를 문 입술이 가늘게 휘었다. 상념에 빠져 있어 그것을 미처 보지 못한 레이븐이, 뒤늦게야 푸른 눈을 돌려 어둠을 더듬었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온 건 창을 등지고 앉은 그의 상반신이 아니라 코앞까지 다가와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동요한 레이븐이, 곧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뒤로 빼려 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은발을 휘어잡은 커맨더가 손을 더 끌어당기며 거리를 좁혔다. 매의 발톱처럼 오므라든 억센 손이 머리칼 사이로 매섭게 파고들었다. "윽..." "정말 고분고분할 줄을 모르는 새라니까. 그래서 더 재미 있는 거지만." 꽁초를 미련없이 던져버린 커맨더가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인정하기 싫을 정도로 매끄러운 웃음이 악기 소리처럼 흐르다 천천히 잦아들었다. "뭐, 궁금증은 풀렸으니 됐어. 피차 서로 이용하는 것, 서로의 가치를 백 퍼센트 활용해줘야겠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머리를 놓으면서 어깨를 잡아챈 커맨더가 그대로 그를 밀어 넘어뜨렸다. 아파하지도 않고, 그저 증오만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그와 시선을 맞춘 커맨더가 빙글 웃었다. 레이븐이 제일 싫어하는 웃음이었다. "앞으로도 열심히 이용해보라고. 나도 얼마든지 이용해줄 테니까." 웃음기 어린 말과 함께 다가온 손이 자국이 울긋불긋하게 남은 피부를 농밀하게 쓸어내렸다. 지난 며칠 간 수없이 겪었던 그 손길의 뜻을 레이븐은 이미 알고 있었다. 보기 싫다는 듯 눈을 내리감으며, 레이븐이 살기가 가득 담긴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용건만 끝나면 네놈의 그 아랫도리 라이플에 제일 먼저 총탄을 박아주겠어." "그거 무섭군. 각오하고 있겠다." 전혀 무섭지 않은 어투로 대꾸하며, 그의 손목을 잡아 누른 커맨더가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행위의 시작을 알리는 총탄 같은 자극에, 한 차례 몸을 떤 레이븐이 이내 몸을 늘어뜨렸다. 끔찍하게도 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