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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6화: 테츠쿠로)자각
"음… 필요한 건 이걸로 다 샀군." 값을 치른 실패를 조심히 챙겨담은 쿠로가, 가방끈을 어깨에 걸치곤 다른 손으로 남은 바구니를 챙겨들었다. 모처럼의 외출이었던 지라, 옷감과 장식을 욕심껏 쓸어담고 보니 양이 생각보다 많고 무게도 꽤 있었다. 가라테를 하는 쿠로에게 그렇게까지 버거운 짐은 아니었지만, 일부러 좋은 재료를 사기 위해 멀리 나온 탓에 돌아가고 나면 팔이 제법 뻐근할 듯싶었다. '테츠 녀석, 함께 왔다면 자기가 들겠다고 한바탕 난리였겠군.' 하필 오늘 볼일이 잡혀서 같이 갈 수가 없다며, 제게 손을 싹싹 빌던 테토라를 떠올리며 쿠로는 작게 웃음지었다. 간만에 나가는 것이니 데이트 기분이라도 내볼까 해서 가볍게 권했던 건데도, 테토라는 그렇게도 미안해하고 어쩔 줄 몰라했었다. 꼭 이날 가야 하는 거냐며, 왜 하필 자기는 볼일이 생겨버린 거냐며 눈물을 한 병은 매달고 부들거리던 테토라를 떠올리니 조금 더 즐거워져서, 쿠로는 일층에 내려서며 재차 미소지었다. 지금쯤 뭘하고 있을까. 오랜만에 맛있는 거라도 잔뜩 먹으면서 휴일을 만끽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도 자신을 생각하면서 함께하지 못한 시간을 아쉬워하고 있을까. 한 살 어린 연인을 생각하는 걸음이 어깨를 당기는 무게에도 작은 소리 없이 가벼웠다. 오늘 돌아가면 분명히 또 사과하고 속상해할 테니까, 먼저 찾아가서 잘 놀았냐고 물어봐줘야지. 지워지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드리우고서, 쿠로가 건물 현관에 막 내려서던 참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그를 덮치듯 밀려온 찬 바람이 그의 볼을 쓸며 스쳐지나가, 쿠로는 손을 멈추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장대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지고 있었다. "비?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맑았는데…." 저들끼리 경주라도 하는 양, 땅에 부딪혀 부서지는 빗방울들이 놀랍도록 크고 굵었다.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는 얘기는 없었던 것 같은데. 혀를 찬 쿠로가 고개를 좀 더 들었다.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하늘을 사정없이 덮은 구름이 장막처럼 짙고 검었다. 아무래도 당장 그칠 것 같진 않았지만, 근처 편의점을 찾아 무작정 뛰기에는 들고 있는 짐이 마음에 걸렸다. 한숨을 내쉰 쿠로가 짐을 발치에 내려놓고는 팔짱을 꼈다. 제가 비를 맞는 건 어쩔 수 없다쳐도, 어렵게 공수한 수예 재료들이 망가지는 건 그로선 참을 수 없었다.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아, 맞다. 그거 알아?" "어떤 거?"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쿠로가 흘끔 눈을 굴렸다. 그 또래로 보이는 여학생 둘이서,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과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린 쿠로가 비를 퍼붓는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남의 대화를 엿듣는 취미는 없었지만, 곧장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기엔 현관은 너무 좁고 고요했다. " '내가 저 사람을 많이 사랑하는구나'보다, '저 사람이 정말로 나를 많이 사랑하는구나'를 느낄 때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래." "엑, 보통은 반대 아냐?"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자기가 주는 것보다 남이 주는 것이 보이게 되면 그게 진짜라던데?" "어려워~ 그냥 내가 좋으면 된 것 아닌가?" "나도 모르겠어. 사랑을 해봤어야 알지~" "흐응? 왜? 너 저번에 3학년 A반의 그 선배 좋아한다고 막…" "아, 아니야! 얘가 못하는 말이 없어!!" '남이 주는 것이 보이게 되면 그게 진짜 사랑…이라.' 투닥대며 걸음을 옮기는 여학생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서, 쿠로가 조용히 손가락으로 팔뚝을 두드렸다. 다시 그만 남겨진 현관을 맴돌던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흔들다가 차가운 싫증을 남기고 쌩하니 건물 안으로 흘러가버렸다. 적막을 채우는 빗소리가 유유히 쿠로에게서 테토라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제 얼굴보다 훨씬 낯익은 이목구비와 머리칼이 사진을 보는 양 시야에 선명했다. 테토라와 연애를 시작한지 어언 석 달째, 고백을 받은 쿠로가 사랑에 대해 고민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받아들인 뒤로는, 한 번도 둘의 관계나 그의 연심을 의심해본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 테토라는,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온 몸짓과 말로 다 표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쿠로 자신도, 그런 그를 분명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 공부를 하다가도 숨쉬듯 자연스럽게 그를 떠올린다. 사랑에 관한 노래를 듣다 보면 그의 얼굴이 스쳐간다. 용건이 없는데도 괜히 이름을 한 번 더 불러보고, 그렇게 불린 그가 제 옆에 앉아 '부르셨슴까!'하고 외치기라도 하면 웃음부터 난다. 종종 낯간지럽고, 이런 게 다 뭐람 싶으면서도 분명 그를 떠올리면 슬금슬금 입꼬리가 올라가는 신기한 기분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호감을 확실히 알고, 표현에 거리낌이 없다. 그걸 알고 있다면, 그녀들의 말대로 자신은 그를 진짜로 사랑하고 있는 거겠지. 태연히 이어지던 사고가 부끄러운 결론에 도달해, 쿠로는 헛기침을 하며 입가를 가렸다. 남이 볼 일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볼이 화끈거리는 것이 유난히 신경 쓰였다. 비는 언제쯤 그치려나. 의식의 방향을 돌리려 애쓰며, 쿠로가 현관 밖으로 상체를 조금 내밀었다. 그것만으로도 뺨에 이슬처럼 들러붙어 오는 공기가 서늘하고 맑았다. "대장!"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쿠로가 앞을 보았다. 환청이라도 들었나 했지만, 저 먼 길에서부터 쿠로를 향해 달려오는 건 분명 그가 줄곧 생각하고 있던 테토라 본인이었다. 그가 제가 만들어낸 환영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서야, 벌어진 쿠로의 입에서 비로소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당황이 잔뜩 묻은 어조가 드물게 높았다. "테츠?" "후아! 다행임다! 늦었을 줄 알고 엄청 걱정했슴다!" 그의 앞에 턱 멈춰선 테토라가 기운차게 제 이마를 닦곤 활짝 웃었다. 한참을 뛰어온 건지 그의 뺨이며 눈가에 땀이 비처럼 어려 있었다. 말도 못 잇고 멍하니 있던 쿠로가 무의식중에 그의 어깨를 털어주었다. 재킷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구슬처럼 굴러 떨어져내렸다. "갑자기 여기는 왜 온 거냐?" "당연히 대장에게 우산 갖다드리려고죠! 오늘 여기에 가신다고 저에게 말씀하셨잖슴까!" "그래도 그렇지… 설마 학원에서 여기까지 뛰어온 거냐?" "에이, 별로 안 멀었슴다! 대장이 비 피하느라 못 오실 거 생각하니까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슴다! 전부 사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어서 가서 쉬셔야 하지 않겠슴까?" 테토라가 천진하게 웃었다. 차마 그의 말에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도, 천천히 와도 되었을 거란 말도 할 수 없었던 쿠로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에게 커다란 우산을 내미는 테토라의 바짓단은 고인 흙탕물이라도 밟았는지 흠뻑 젖어 있었다. 바지를 버려가면서도 오직 저만을 위해 필사적으로 빗속을 뛰었을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보답을 할 수 있을지 짐작조차도 가지 않았다. 쿠로의 침묵이 길어지자 테토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장?" "…설마 이렇게 한 방 먹을 줄이야." "예? 무슨─" 쿠로가 돌연 테토라를 끌어당겼다. 강한 악력에 반항 한 번 못하고 끌려온 테토라가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한 팔로는 다 안을 수 없는, 저보다 작아도 마냥 듬직한 어깨에 뺨을 댄 쿠로가 눈을 감았다. 조금 젖어 있는 옷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이 다정하게 따뜻했다. "너 진짜로 나를 좋아하는구나." "예? 예. …예?" "고맙다. 테츠." 쿠로의 팔이 풀렸다. 얼이 빠진 얼굴로 서 있던 테토라가, 곧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이며 입을 떡 벌렸다. 지금 벌어진 상황에 대한 혼란과 부끄러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눈빛이 정신없이 부산하고 붉었다. 그가 그러건 말건, 짐까지 다 챙겨든 쿠로가 그의 손에서 우산을 낚아채며 씩 웃었다. 드물게도 개운해보이는 미소였다. "그래도 다음엔 반드시 되갚아줄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있어라. 정신 바짝 들게 해주지." "예, 예? 예!!" "그럼 가자. 너도 힘들었을 텐데 가서 쉬어야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눈을 깜빡이며, 테토라가 뜨거워진 뺨을 몇 차례 문질렀다. 그러는 사이 쿠로는 그를 지나쳐 태연히 밖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테츠, 가자. 덤덤히 덧붙여진 말에, 그제야 겨우 의식을 붙든 테토라가 허둥지둥 쿠로의 뒤를 따랐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한기의 변덕을 단숨에 날려보내는 외침도 함께임은 물론이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명심하겠슴다! 대장!!" 기운이 넘치는 테토라의 대답에 쿠로가 다시금 소리없이 웃으며 나아갔다. 나란히 펴진 우산,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온전한 사랑이 여물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