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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토니)창공의 폴라리스 .05 (完)
책을 내는 걸 허락해주신 지크프리트의 오너 단테님과, 파에톤의 오너 눙님에게 감사드리며 ☆★명예지크토니러 바침★☆ Caption ※n차 창작된 지크토니와 그 등장인물들 지크프리트 사룡 파프닐을 쓰러트리고, 그의 힘을 흡수한 사검 발뭉을 손에 넣은 전설의 기사. 파프닐의 피를 뒤집어 써서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 불사의 몸이 되었으나, 등의 일부는 피가 묻지 않았다. 자기 희생 정신이 강하고 배려심이 깊지만 예외인 상대가 있다. 단 한 명.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나 감정을 깨닫는 일에 둔한 면이 있다. 어떤 적을 앞두고도 물러서지 않는 무모함은, 이런 자기애가 부족한 부분에서 기반한 것일지도 모른다. 왕에게 충성하며 동료를 믿고 함께하는 전형적이고 고지식한 성격. 하지만 아내 크림힐트와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다. 파에톤 별을 읽는 자의 말에 따르면, 이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되는 운명의 주인공. 정체는 이 우주와는 전혀 다른 시대에서 온 태양신의 아들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태양 마차를 몰았지만 말의 고삐를 놓치고 하늘과 땅을 불태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 후 최고신 제우스가 던진 벼락에 맞아 죽었어야 했지만,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지크프리트의 세계에 떨어져 목숨을 건졌다. 매일 지크프리트랑 투닥거리며 그를 싫어하는 듯이 굴지만…….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성격으로, 남을 구하거나 지키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이 좀 더 소중한 어린 소년. 호기심이 많고 자기 감정에 솔직하며, 이를 숨기는 일에 서툴다. 어머니가 바다의 님프로, 귀가 평범한 사람보다 뾰족한 편이다. 에스니 성별 불명, 나이 불명, 종족 불명. 목소리만 들으면 10대 중반의 중성적인 느낌이 난다. 별을 읽고 룬 마법을 구사한다. 군터에게 여러가지 조언을 해주고 지크프리트나 하겐과도 안면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하겐 지크프리트의 동료 기사. 하지만 자신보다 더 뛰어난 지크프리트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다. 크림힐트 지크프리트가 모시는 왕 군터의 여동생이자 지크프리트의 아내.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브륜힐트 군터의 아내.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군터와의 혼약은 그의 기사 지크프리트에 의해 이루어졌다. 본 정체는 전사의 혼을 발할라로 인도한다는 신의 사자 발키리. 05. 악의는 창이 되어서 05. 악의는 창이 되어서 운명의 별은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나는 법을 모를진대, 인력人力은 그를 밀고 당기며 최후의 최후까지 간섭하고 방해한다. 그것의 선악과 정의를 기리고, 감정에 이름을 붙이며 궤적을 더듬는 것 또한 인간의 사정. 그렇기에 별을 아무리 읽고 경계하였어도 예언자는 알지 못하였고, 지크프리트는 깨닫지 못하였다. 크림힐트가 군터의 아내 브륜힐트를 조롱하고, 군터와 지크프리트 사이에 오갔던 은밀한 거래를 밝혔을 때의 파장을. 시기. 모략. 경외. 애증. 순수. 그 온갖 감정이 뒤섞인 비극의 수렁이 영웅을 끌어내릴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응?” 파에톤이 귀를 쫑긋거리며 창밖을 흘긋거렸다. 에스니는 그가 꺼내놓았던 책을 정리중이었다. “에스니, 손님들이 찾아온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지크프리트 님이 아니시고요?” “네. 하겐이랑 처음 보는 여자가 같이 있는데… 인간이 아니네요? 지크프리트는 신의 사자와도 인연이 있나요?” 에스니가 정리하던 책을 떨어트렸다. 하겐과 동행하는 ‘신의 사자’. 에스니는 번거로운 질문을 하지 않았다. 파에톤이 들려주었던 이야기, 그가 신의 핏줄을 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므로. 에스니가 빠르게 방문을 잠그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어리둥절해하는 소년과 커다란 벽장이 눈에 들어왔다. “에스니?” “어서 저곳에 숨으십시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밖으로 나오시면 안 됩니다.” “왜… 왜 그래요? 위험한 녀석들이에요? 에스니는요?” “어서요!!” 파에톤을 벽장에 밀어넣은 에스니가 의자를 휘둘러 창문을 깨부쉈다. 저택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듣고도 남을 소리였다. 유리가 날카롭게 내지르는 비명에 벽장에서 나가려던 파에톤이 입을 틀어막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로선 알 수가 없었다. “도망간 건가? 쳇, 문이 잠겨 있어…!” “비켜라. 방해된다.” 아주 멀게 들리는 하겐의 중얼거림 이후, 그에게 명령하는 딱딱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지끈, 이나 콰직, 같은 둔탁한 소음이 아닌, 날카로운 무언가가 두부를 자르듯 예리하고 손쉽게 문을 가르는 소리가 또렷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 파에톤은 아까 보았던 ‘신의 사자’를 떠올렸다. 인간도 아니고, 신도 아니나 그에 걸맞은 신성의 흔적을 띠고 있던 여인. 파에톤은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있는 검을 꽉 쥐었다. 차가운 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겐 님, 브륜힐트 님. 어서 오십시오.” “아까의 소음은 뭐지? 그 소년인가?” “예. 갑자기 뛰쳐나가시는 바람에 당황하던 차였습니다만…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거짓을 전하는 에스니의 목소리엔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하겐이 호통치듯 소리쳤다. 지크프리트를 상대로도 종종 시기와 빈정거림을 숨기지 않았던 자였다. “네가 도망시킨 게 아니고? 보나마나 지크프리트로부터 그녀석을 지키란 명령을 받았을 테지!” “그분께선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거니와, 그 소년은 아무것도 모릅니─” 날카로운 것이 사람의 몸을 꿰뚫는 소리가 들렸다. 말을 끝맺지 못한 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였다. 파에톤은 숨을 멈췄다. “됐다, 하겐. 여기에 그가 없는 건 확인했으니.” 여인의 목소리는 죽음을 고하는 신처럼 냉랭하게 울렸다. 무언가가 가구에 여러 번 부딪히며 쏟아지고 넘어졌다.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하나. 그자의 죽음이다.” “지… 당하신 말씀입니다, 왕의 아내, 고귀한 왕비시여. 근처의 사냥터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공포와 아첨이 교묘하게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임무가 없는 날에는 근처에서 잡은 토끼나 멧돼지 등을 가져오던 지크프리트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파에톤은 소리없이 몸서리쳤다. 그에게 알려야 한다. 구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이 저들을 막을 수 있을까? 반은 신이고 반은 요정이라 할지라도 신성을 사용하는 자와 맞붙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룡의 피를 뒤집어쓰고 불사의 몸이 되었을 텐데. 방법이 있는가?” “극히 좁은 부위지만, 피가 묻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제가 크림힐트에게 미리 표시를 해두라 일러두었으니, 그곳을 찌르면 천하의 영웅이라 해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자신의 말실수가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을까봐 걱정하는 여인을 속여넘겨, 그곳을 반드시 막아주고 가려주겠노라며 알 수 있게 표시를 해달라고 해두었다는 잔혹한 이야기. 파에톤은 몰려오는 욕지기를 간신히 참았다. 지크프리트는 그가 겁이 많아도 충성심이 깊은 사내라며 높이 평가했었는데. “난 이 일을 길게 끌고 싶지 않다. 하겐.” “알겠습니다! 서둘러 찾아내겠습니다.” 사내가 뛰어나가는 발걸음, 그 뒤를 무심히 따라 걷는 가죽신 소리가 점차 멀어져갔다. 한참 뒤에야 떨리는 손으로 벽장문을 밀어젖힌 파에톤이 굴러떨어지듯 내려가 에스니를 찾았다. 그는 급소를 찔려 절명해 있었다. 무수한 이의 운명을 점치고 길을 일러주었던 이의 허망한 죽음이었다. 눈물을 삼킨 파에톤이 반쯤 벗겨져 있던 후드를 덮어주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주었다. 그동안 자신을 돌봐준 것, 지켜준 것에 대해 충분히 애도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미안… 미안해요. 고마워요….” 피투성이 손을 한 번 꽉 잡았다 놓는 것으로 마음을 전한 파에톤이 입술을 꾹 깨물고 일어났다. 지크프리트를 찾아야 했다. 파에톤은 망설이지 않고 달려나갔다. * “흠… 완벽하게 허탕이군.” 어째선지 토끼도 새도, 너구리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숲이었다. 지크프리트는 아까 놓친 순록을 떠올리며 조금 후회했다. 묘하게 털이 노란빛이 도는 게 신기해서, 무심코 바라보고 있던 사이에 놓쳐버리고 만 것이었다. 어렸을 때도 안 하던 실수를 하다니, 확실히 최근 많이 해이해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역시 빈 손으로 돌아가기엔 아쉬운데…” 평소에 쓰던 검 대신 창을 두어 번 돌리던 지크프리트는 갑옷이 묘하게 덜그덕거리는 느낌에 이음새를 매만졌다. 역시 크림힐트가 갑옷을 매주는 걸 사양해야 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자신의 실언으로 군터와 브륜힐트의 관계에 금이 가고, 불똥이 지크프리트에게까지 튈 거라는 불안감에 떠는 그녀의 부탁을 그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좀 더 제대로 된 남편이었다면, 아내가 진정할 때까지 곁에 있어주거나 위로해주는 게 맞겠지만.’ 끝끝내 지크프리트는 그녀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도,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그의 왕 군터의 명예는 실추되었고, 브륜힐트는 자신을 속인 두 사내를 향해 분노와 저주를 퍼부었다.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며, 실망과 증오로 얼룩진 눈으로 노려보던 얼굴이 지금도 잊히지 않았다. 한 치의 미안함도 없다 하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돌이키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지크프리트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왕의 청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옳고 그름을 넘어 그저 후회하지 않기에. ‘당신의 삶의 미련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지크프리트는 문득 깨달았다. 미련을, 삶의 애착을, 지크프리트란 존재의 삶을 말하던 아이. 그는 마차를 몰게 해달라고 졸랐던 과거를 반성한다 했지만,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도전했던 것 자체에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계속해서 고민하고, 실수하면 또 후회하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그것은 존재 증명에 대한 욕망이며 파에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 말했다… 그렇기에 죽는 것이 무섭다고 했던가. 그런 호된 일을 겪고도 미련과 아쉬움이 잔뜩 남아서. 그러고도 살아남았다면 이 미래에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가면서. “미련… 이라.” 지금도 그에겐 잘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그것이 없는 게 그렇게 나쁜 것인가.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고,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다면, 공포를 모르는 짐승이라 불린들 자신에게 아쉬움도 후회도 없다. 크림힐트도 군터도 하겐도, 그 누구도 지크프리트의 미련이 될 수는…… ‘이렇게 스스로한테도 무책임할 거면서, 왜 날 구했어요?’ “……!” 지크프리트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가지가 부딪히는 수군거림이 들리다 사그라들었다. 지크프리트가 빈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수한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어도, 검의 묵직함과 살갗에 녹아들듯 스미던 용의 피의 뜨거움만을 기억하던 손이었다. 어느 것 하나 쥐려 하지 않았던 손바닥 위에 작고 여린 손의 환영이 얹힌다. 길게 땋은 금발은 태양처럼 밝고, 눈부시고, 마음먹은 대로 자유롭게 뛰는 발은 날개 달린 말과 같다. 유치하게 싸우고, 웃고, 화내고, 시시콜콜한 말마다 트집을 잡고 으르렁거리고. 지크프리트는 불현듯 깨달았다. 파에톤을 만난 후의 기억에 색채가, 눈부신 빛이 깃들어 있음을. 그 이전의 시간은 남의 것처럼 흐리고 투박함에도, 오로지 그 아이만이 오롯이 선명함을. “…….” 비교할 것이 생겼을 때, 비로소 무슨 색이었는지 알게 되는 것처럼. 미련이라곤 조금도 모르는 삶에서 빛을 느꼈다면, 그건……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들었다. 꾹 다문 입술은 전에 없이 결연했고, 뒤돌아서서 내딛는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힘찼다. 용 파프닐을 상대하러 갈 때보다도 진지하고, 마침내 실의와 소유의 차이를 알게 된 자의 도약이었다. 그렇게 되었어야 할 터였다. 푸욱 “─!!” 지크프리트는 등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림을 믿을 수 없었다. 알 길이 없기에 무뎌졌던 거대한 고통이 화염처럼 온 신경을 타고 퍼져나갔다. 벌어진 입에서 소리를 갖지 못한 신음이 뒤틀려 흘러나왔다. 갑옷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떨어져 시뻘건 자국을 남겼다. “이, 무, 슨…” 지크프리트가 뻣뻣해져가는 목을 필사적으로 돌렸다.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하겐의 눈엔 공포와 경악이 뒤섞여 있었다. 확실히, 급소였다. 그의 몸엔 평범한 칼날은 들지 않으니까. 이미 걷는 것조차 불가능해진 몸이지만, 그에겐 ‘이걸로도 죽지 않는 괴물’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와… 왕의 손을 더럽힐 가치도 없는 자여!! 브륜힐트 왕비를 모욕한 죄, 그리고 왕의 명예를 더럽힌 죄! 그 죽음으로 갚아라!!” “하, 겐…!” 시야가 자꾸만 흐려졌다. 안에서 치밀어오르는 것을 게워내자 선홍색의 핏물이 턱과 입술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당당한 외침이 무색하게도 결국 하겐은 지크프리트에게 더 다가오지 못했다. 마지막 저주를 퍼부은 등이 멀어지고 있었다. 휘청거리던 지크프리트가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으려 애썼지만 빠르게 젖어가는 등이 너무나 무거웠다. ‘멍청이 지크!’ 정체 모를 잡음이 나부끼는 귓가에 유독 선명한 부름이 메아리쳤다. 우스운 이야기다.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것이 제대로 된 이름도 아니고 그가 토라져서 부르던 호칭이라니. 지크프리트는 후들거리는 손을 등 뒤로 뻗었다. 모든 감각이 흐려져가는 순간에도 그의 목소리만이 거짓말처럼 또렷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사나요?’ 모르겠어. ‘정말로, 내일 죽어도 상관없어요?’ 모르겠어. 하지만, 이젠 궁금해졌어. ‘어떤 걸요?’ 정말로, 지금 죽어도 괜찮은 건지. 기어이 뽑아낸 창이 바닥에 내던져졌다. 일순 피가 솟구침과 동시에 완전히 쓰러진 사내가 잔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냈다. 무언가를 보려는 듯 필사적으로 초점을 잃지 않으려 하는 눈이 어설프게 깜빡거렸다. ‘이제야 후회되는 게 있어요?’ 그건, 모르겠어. ‘그럼 원하는 게 생겼나요?’ 그럴지도 몰라. ‘정말 뭐든지 모른다고만 하고. 바보예요.’ 그렇군. 맞아. 너는 늘 옳았어. ‘바보 지크.’ 그래. 파에톤. “─지크프리트!!” 그래… 듣고 있어…… 천천히 굳어가던 손이 움찔거렸다. 저 멀리서부터 쏜살같이 뛰어오는 금발이 마치 태양이 내뿜는 빛살 같았다. 식은 피로 뒤덮인 입술이 빠끔거렸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자신을 안아든 소년이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 ……, …!!”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군. 지크프리트는 무심결에 생각했다. 그때도 그는 자신이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했었지. 어이없게도 웃음이 나왔다. 줄곧 몸을 붙들고 있던 긴장이 빠져나갔다. 파에톤이 자신을 필사적으로 끌고 가고 있음을 겨우 알고 있을 뿐이었다. “…제발, 정신 차… 지크……직, 안……” 이상하군. 네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아. …아아, 그랬지. 네가 우리 말을 배운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던가. “용서 안 할 거예요. 제발… …내가, ……. 그러니까…” 너의 말도 많이 배웠었는데. 지금 해줄 수 있는 것들이… ‘걱정 마’라든가, ‘난 괜찮아’라든가. ‘울지 마’라든가. ‘미안해’라든가. “제발, 지크……” 파에톤의 품에 목석처럼 기댄 고개가 기울어졌다. 흙과 피로 얼룩진 밀발에 매달려 있던 핏방울이 진득하게 떨어져내렸다. -언제부터였을까. 네가 내 미련이 되어버린 건. 어둠이 내렸다. 이젠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 소년은 달렸다.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하고, 누군가의 분노를 대신하듯 번개가 연달아 내리쳤다. 피투성이가 된 옷이 하늘에서 하나 둘 쏟아지는 물방울에 젖기 시작하더니 금세 물에 흠뻑 젖어 무거워졌다. 거센 빗줄기가 퍼붓는 시야가 어두웠다. “헉, 헉……!” 폐가 터질 것 같다.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처럼 다리가 무겁고 근육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그래도 파에톤은 멈추지 않았다. 숲 안의 동굴에 겨우 옮겨둔 지크프리트의 상처는 심각했다. 독이 발라져 있지 않음에 안심했지만 보통 인간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치명상이었다. ‘의사는 믿을 수 없어. 누구도, 믿을 수 없어.’ 파에톤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도 없어.’ 자신을 몇 번이고 다독이고 잡아주었던 손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벼락을 맞아 떨어지면서 수없이 하늘을 휘저어도 아무도 잡아주지 않았던 손을, 그를 받아주고 지금까지 곁에 있어주었던 온기를 기억했다. 이미 죽었어야 했을 운명이라고 했다. 소멸하는 것이 당연했어야 하는 삶이라고 했다. 파에톤 본인도 그리 생각했다. 하늘을 어지럽혔다. 무수한 생명을 죽게 만들었다. 별을 불사르고, 오만한 욕심에 따른 대가를 치렀다. 그 이후의 시간들은, 과분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언제 막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꿈 같은 나날이었다. 우르르릉 “아악!!” 반사적으로 주저앉은 파에톤이 귀를 틀어막았다. 전신이 기억하는 공포가 고통으로 되살아난다. 두 다리가 칼로 난도질하는 것처럼 욱씬거렸다. 심장이 따끔거렸다. “헉… 허억……” 눈물로 흠뻑 젖은 푸른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깨질 유리처럼 위태롭게 요동쳤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동굴로 돌아갈까.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는데. 최소한 지크프리트의 곁에서 그 마지막이라도 지켜보는 게 낫지 않을까. 나아갈 용기를 잃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가진 것이 없으니 집착하지 않는 걸지도 모르지.’ 가쁜 숨을 내뱉던 입술이 흠칫 떨렸다.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사내의 얼굴이 눈가에 어른거렸다. “…….” 웅크려 있던 소년이 아주 느리게,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다시 번개가 내리치고 천둥으로 땅이 울렸다. 등이 재차 움츠러들었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알려주지 않겠나.’ 발이 땅을 내디뎠다. 한 번, 그리고 두 번, 처음엔 위태로운 걸음이었을 간절함이 점차 속도를 올리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나도 볼 수 있도록.’ 주고받았던 약속이, 그 날의 손처럼 귀를 막아주었다. 천둥이 그를 쫓아와도 이젠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태양신의 신전으로 달려가던 그날처럼. 조금만 더 가면 에스니가 일전 가르쳐주었던, 약초가 잘 핀다던 들판이 나온다. 옷으로 묶어 최대한 지혈을 해놓고 나왔고, 숨이 붙어 있는 것도 확인했다. 자신이 망설이지만 않는다면, 멈추지만 않는다면. 제 속도를 찾은 신발이 물이 고인 땅을 박차며 달려나갔다. “기다려요, 지크프리트…!!” 눈물이 멈춘 눈은 이제 빗줄기에도 굴하지 않고 앞을 보고 있었다. * 피가 멎은 후에도 지크프리트는 의식을 빠르게 회복하지 못했다. 목숨을 건진 것만도 기적인 부상이었다. 밖에는 비가 끊임없이 내렸고 사람은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에스니의 사후, 연고 하나 없어진 파에톤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다가도 오한으로 낯빛이 새파래지기를 반복하는 지크프리트에게, 파에톤은 계속해서 물을 먹여주고 약초를 붙이며 상처를 감싼 천을 갈아주었다. 피로 범벅이 된 옷으로 몸도 감쌀 수 없을 정도가 된 뒤에는 자신의 옷을 찢어 상처를 동여매고, 빗물을 받아 식어가는 입술에 흘려넣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지크프리트의 적이 건사하므로 파에톤은 종종 그의 상태가 괜찮아지면 뜬 눈으로 보초를 서곤 했다. 금빛이 감돌던 머리칼은 낡은 밧줄처럼 거칠어지고, 희고 부드러웠던 뺨은 지크프리트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창백하고 병색이 완연했다. 그래도 파에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아직도 숨을 쉬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가치는 충분했다. “나한테는 이복 누이들이 있었어요. 양아버지도 계셨죠. 누구도 저를 친가족이 아니라고 홀대하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어요. 저는 그들과 완전히 같지 않고, 인간도 아니라는 걸. 어머니는 바다의 신들의 딸이었으니, 아마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에게서 신의 피를 강하게 물려받은 거겠죠.” 피곤이 몰려오는 날엔 지크프리트의 곁에서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두 개의 언어가 섞여 뒤죽박죽이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뭘 말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알고 싶어했던 것.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것들. “차라리 님프로 - 요정 같은 걸로 태어났다면 아버지를 만나러 가지 않았을까요? 인간이랑 어울려 살지 않았더라면요. 그럼 누구도 제 이름을 놀리지 않았을 거고, 나와는 다르다고 무서워하거나 싫어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파에톤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한때 완전히 굳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겁먹었던 손엔 이제 미세하게나마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결국엔 아버지를 만나러 갔을 것 같아요. 당신이 말했죠. 너는 너를 증명하기 위해서 사지로 뛰어든 거라고. 맞아요. 평범한 님프였다면 태양신의 신전에 올라간 것만으로도 말라죽었을 테니까. 그러면 마차는 안 몰았을 테니 적어도 폐는 안 끼칠 수 있었을까요? 이런 가정은 어렵네요. 당신은 이런 고민을 해본 적 있어요?” 며칠을 퍼붓던 빗줄기는 이제야 조금씩 가늘어지고 있었다. 피로가 짙게 쌓인 눈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던 파에톤이 버릇처럼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안 해봤을 거야. 당신은 바보니까. 내가 아니었다면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그런가보군, 하고 살았겠죠?” “…………” “…하지만 사실,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가끔은 부러웠어… 나도 당신처럼 살 수 있었다면, 그때 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의 것보다 훨씬 크고 굵은 손가락이 느리게 흔들렸다. 파에톤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그래도, 그런 말을 했던 건… 당신이 너무, 공허해 보였으니까.” “채워주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이것도 욕심인가요?” 파에톤이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고요한 동굴에 소년의 혼잣말만이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내가 아니더라도… 내 기억이 아니더라도… 비어 있는 그릇에 물을 담듯, 꽃에 물을 주듯… 그저 그렇게.”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나한테 어울려줄 때만, 그때만큼은 당신이 무척 즐거워 보였으니까.” “그런 모습을 더 자주 보고 싶어지는 게, 이상한가요?” “이상한 거라면, 어째서일까요?” “나는 왜… 당신에게……” 천장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때였다. 내내 늘어져 있던 손이 파에톤을 잡아끌은 것은. 파에톤이 퍼뜩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지크?” “......” “지크, 지크프리트. 정신이 들어요? 나 알아보겠어요?” 손을 꼭 감싸쥔 파에톤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 내내 잠을 자듯이 잠들어 있던 눈이 아주 느리게, 천천히 뜨였다.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파에톤이 돌처럼 굳어선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말을 쏟아내던 입은 무언가에 막힌 듯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역시… 진작, 말을 배워둘 걸 그랬어.”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하나도 못 알아들었잖아.” “…….” “아니… 그래도 마지막 말은… 조금 알아들은, 것 같은데.” 지크프리트가 그의 손을 끌어 뺨에 가져다댔다. 수척해진 살갗에 닿아오는 체온이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상, 하지. 정말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의 모습이 보고 싶어지는 건, …분명, 평범한 일은 아닐 거야.” “…….” “너의 언어로는… 잘 모르겠지만… 내 언어로, 전하기도 낯간지럽지만.” 지크프리트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초점이 한층 선명해진 눈은 분명히 파에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색 눈동자에 고여 있던 눈물이 느리게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먼저 넘친 감정이 꽉 잡은 손 틈 사이로 뜨겁게 스며들었다. “확실히, 전하고 싶은 건 있다.” 파리한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파에톤. 네가 지금의 나를 채워줬다고.” 파에톤은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침내 비가 그친 하늘에 동이 터 오고 있었다. EP. 나의 이정표, 나의 증명 영웅 지크프리트는 죽었다. 그의 검이었던 발뭉은 유품이 되어 그의 아내 크림힐트의 손에 넘어갔고, 브륜힐트는 지크프리트가 없는 땅을 돌아보는 일 없이 하늘로 돌아갔다. 이후 하겐이 어떻게 되었는지, 군터와 그의 나라가 어떻게 되었는지 인간 지크프리트는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운명의 궤도를 벗어난 별들은 함께 여행을 떠났다. 누구도 그들을 알아보지 않는 먼 곳으로. 별조차도 읽을 수 없는 너머의 미지로. “지크!! 큰일났어요!!” 그렇게 새로운 삶에 익숙해진 것도 이제 며칠째. 지크프리트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무엇이 말이지?” “아까 장에서 아주머니가 주셨던 사과가 보이지 않아요! 분명 요리에 넣자고 같이 얘기했었는데!” “그랬지. 네가 도중에 만난 사슴에게 빼앗기기 전에는 말이야.” “뭐야!? 언제요!? 지크가 지켰어야죠!!” “이게 다 네가 신나서 뛰어다니다가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려서 그런 거잖나. 그걸 풀어주느라 놓쳐버린 걸 내 탓으로 돌리다니─” “바보 지크! 켄타로우스의 발굽 떼!” “……이 피톤의 꼬리비늘 같은 녀석이!! 시비도 정도껏 해라!” 창 너머까지 들리는 소리에 길가를 지나던 사람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방에서 온 두 사람이 하루가 멀다하고 유치한 말다툼을 주고받는 건, 이제 마을 내에서도 널리 알려진 소문이었다. 기어이 한바탕 투닥댄 파에톤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씩씩거렸다. 지크프리트는 흐트러진 옷의 끈을 바로매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랑 싸우면 매일 뇌세포가 반씩 줄어드는 것 같다.” “어차피 뇌에 근육밖에 없잖아요.” “매일 발전이 없는 너보단 낫지.” “말 다했어요!?” 발끈한 파에톤이 버럭 소리를 질렀을 때였다. 누군가가 벽 너머에서 크게 외쳤다. “거, 사랑 싸움도 좋지만 적당히 하쇼! 지붕 날아가겠구만!”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런 거 아니다!” 동시에 외친 지크프리트와 파에톤이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번엔 의외로, 먼저 시선을 피한 쪽은 파에톤이었다. 또 한바탕 드잡이를 예상했던 지크프리트는 뜻밖이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흠. 흠.” “……?” “…우리… 그… 남들이 보기엔, 확실히… 사귀는 것처럼 보이…나 봐요? 그쵸?” 무슨 말을 하나 싶어 눈을 깜빡이던 지크프리트는, 문득 뺨이 훅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금발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파에톤의 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괜히 헛기침을 한 지크프리트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가 보군. 대놓고 말하고 다니긴 힘들겠지만…” “하? 그건 무슨 말이에요? 이미 소문 다 퍼진 마당에, 나랑 사귄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워요?” “왜 그렇게 되는 거냐? 아니, 그전에 넌 그렇게 알려져도 상관없는 건가? 물론 여기에 아는 사람은 없지만, 난 결혼도 했었고…”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나 좋아하잖아! 좋다고 했잖아!! 책임질 생각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아니, 그러니까… 대화를 좀 이성적으로 들어!!” 재차 옥신각신하던 파에톤이 그에게 달려든 참이었다. 파에톤이 밟아서 뜯어진 커튼이 다리에 엉키고, 이내 그의 위로 햇빛처럼 쏟아져내렸다. 버둥거리던 파에톤을 반사적으로 받으려던 지크프리트가 그대로 엎어지는 그의 밑에 깔렸다. 엉성하게 짜인 모직물이 마치 베일처럼 둘을 덮었다. “……커튼을 괜히 큰 걸로 샀군.” 파에톤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지크프리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 말하려던 파에톤이 문득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숨결이 스칠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밀어낼 생각도 않던 지크프리트는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와 처음 눈이 마주쳤던 그 날도, 그는 저렇게 푸른 눈을 반짝이며 저를 보고 있었더랬다. “……하지만,” 그리고 이젠, 익숙해진 언어로 속삭이며 품에 바짝 눕듯이 다가붙는다. 가까워진 거리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렇게 덮으면 아무한테도 안 보일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럼요. 태양도 못 볼 걸.” “교활한 녀석.” “이럴 땐 똑똑하다고 하는 거예요.” 혀를 낼름 내민 소년이 쿡쿡 웃었다. 결국 숨기지 못한 웃음이 그를 따라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난 평생 가도 너는 못 이기겠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지크프리트가 파에톤을 끌어안았다. 언젠가의 그 날, 떨어지는 별을 품에 안았던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