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내는 걸 허락해주신 지크프리트의 오너 단테님과,
파에톤의 오너 눙님에게 감사드리며
☆★명예지크토니러 바침★☆
Caption
※n차 창작된 지크토니와 그 등장인물들
지크프리트
사룡 파프닐을 쓰러트리고, 그의 힘을 흡수한 사검 발뭉을 손에 넣은 전설의 기사. 파프닐의 피를 뒤집어 써서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 불사의 몸이 되었으나, 등의 일부는 피가 묻지 않았다.
자기 희생 정신이 강하고 배려심이 깊지만 예외인 상대가 있다. 단 한 명.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나 감정을 깨닫는 일에 둔한 면이 있다. 어떤 적을 앞두고도 물러서지 않는 무모함은, 이런 자기애가 부족한 부분에서 기반한 것일지도 모른다.
왕에게 충성하며 동료를 믿고 함께하는 전형적이고 고지식한 성격. 하지만 아내 크림힐트와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다.
파에톤
별을 읽는 자의 말에 따르면, 이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되는 운명의 주인공. 정체는 이 우주와는 전혀 다른 시대에서 온 태양신의 아들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태양 마차를 몰았지만 말의 고삐를 놓치고 하늘과 땅을 불태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 후 최고신 제우스가 던진 벼락에 맞아 죽었어야 했지만,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지크프리트의 세계에 떨어져 목숨을 건졌다. 매일 지크프리트랑 투닥거리며 그를 싫어하는 듯이 굴지만…….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성격으로, 남을 구하거나 지키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이 좀 더 소중한 어린 소년. 호기심이 많고 자기 감정에 솔직하며, 이를 숨기는 일에 서툴다.
어머니가 바다의 님프로, 귀가 평범한 사람보다 뾰족한 편이다.
에스니
성별 불명, 나이 불명, 종족 불명. 목소리만 들으면 10대 중반의 중성적인 느낌이 난다. 별을 읽고 룬 마법을 구사한다. 군터에게 여러가지 조언을 해주고 지크프리트나 하겐과도 안면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하겐
지크프리트의 동료 기사. 하지만 자신보다 더 뛰어난 지크프리트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다.
크림힐트
지크프리트가 모시는 왕 군터의 여동생이자 지크프리트의 아내.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브륜힐트
군터의 아내.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군터와의 혼약은 그의 기사 지크프리트에 의해 이루어졌다. 본 정체는 전사의 혼을 발할라로 인도한다는 신의 사자 발키리.
02. 막다른 곳에서
모두의 걱정과 달리, 그들의 일상엔 갑작스러운 커다란 굴곡이 닥치거나 심각한 변화가 생기진 않았다. 지크프리트의 보살핌 아래 소년의 부상은 빠르게 회복되었으며, 난폭하게 날뛰거나 방을 뛰쳐나가는 행동도 점차 줄어들었다. 자신을 돌봐주는 이들이 적이 아니라는 나름의 믿음이 쌓인 모양이었다. 언제까지 그 아이를 ‘소년’이라 부를 수 없었기에, 지크프리트는 임시로 그에게 ‘토니’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가 종종 자신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서 따온 별명이었다. 물론 소년은 전혀 못 알아듣는 듯 했지만.
“날이 흐리네요. 비가 오겠어요.”
지크프리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지기엔 이른 시간이건만, 먹구름은 완연히 검게 보일 만큼 짙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온 크림힐트가 말의 고삐가 잘 매어져 있는지 확인했다.
“천둥이 칠 것 같으니, 행여 말이 놀라거나 안 움직이거든 무리하지 말고 별장에서 쉬고 오세요.”
“걱정해주어 고맙소. 상황이 안 좋으면 그리 하지.”
크림힐트가 뒤로 물러나며 눈을 내리깔았다.
“뭘요. 요즘 별장에 머무시는 일이 많으니, 그쪽이 편하지 않으실까 했답니다.”
지크프리트는 흘긋 크림힐트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녀의 오라비인 군터보다도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포장하자면 왕의 여동생다운 포커페이스, 나쁘게 말하자면 음침한 구석이 있다고 해야 할까. 결혼한 후에도 지크프리트는 그런 점이 신경 쓰여 별장으로 나돌아다니곤 했다. 군터가 둘의 사이를 걱정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왕의 뜻대로 충직히 따를 수가 없었다.
‘눈을 보아도 생각이 읽히지 않으니, 신뢰할 수 없어.’
지크프리트는 말을 타고 내달리며 생각했다. 군터는 그가 마땅히 따라야 할 왕이었고, 하겐도 신뢰해마지 않는 동료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오가고 있음도 지크프리트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하겐이 이미 크림힐트에게 토니의 일을 말했을지도 모른다. 군터의 귀에까지 닿았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차라리 오해가 생기기 전에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그 모든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지크프리트는 그녀와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알면서도 별장에 가기를 권유한 거라면 더더욱 그녀가 꺼려질 것 같았다. 지금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지크프리트는 진실을 뒤로 밀어놓기로 했다.
‘…새삼스럽지만, 곁에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자가 없군.’
말을 재촉하던 손이 느려졌다. 에스니가 있었지만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는 이유도 그의 협박 때문이 아닌, 그저 중립을 유지해도 되는 상황이어서임을 모르지 않았기에.
‘그 아이와 다름없는 처지인가.’
토니를 떠올리던 지크프리트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고향을 잃은 아이와 처지를 비교하다니, 배부르고 오만한 생각이다. 지크프리트는 재차 고삐를 당겼다. 처리해야 하는 마물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고 했다. 빠르게 끝내고 별장에서 쉬는 상상을 하자 그나마 기분이 나아지는 듯했다.
*
예상대로 전투는 길지 않았다. 발뭉을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범인은 마물도 아닌, 숲에서 마을 어귀까지 내려와 소란을 피우는 요정들이었다. 녹아내리는 피부를 지닌 노파들이 소름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눈물로 젖은 뺨을 쥐어뜯었다.
“죽음이 다가온다…!! 오오, 안식의 황혼이여…! 망자가 돌아오는 밤이여……!!”
“두려워하라! 빛을 죽이고 생명을 삼키는 암흑을 경외하라…!”
긴 손톱으로 돌을 긁어대는 듯 날카롭고 끔찍한 외침이었다.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의 가족과 연인을 앗아간다고 알려진,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저주의 오열과 한탄. 말에서 내린 지크프리트가 천을 찢어 두 귀를 틀어막았다. 허공을 마구잡이로 할퀴고 찢는 비명을 완전히 차단하긴 역부족이었으나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호수의 반대편으로 날듯이 뛰어간 지크프리트가 품에서 뿔피리를 꺼내 입에 물었다. 헤르모드의 가호가 깃든 뿔피리가 발걸음처럼 일정한 박자로 울려퍼졌다.
“……!!”
노파들이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돌렸다. 나무 뒤에 모습을 숨긴 채 지크프리트는 계속 피리를 불었다. 반복되는 소리에 이윽고 몸을 일으킨 요정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호수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죽음을 부르는 그녀들에게 저승길을 걸었던 신의 발소리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인도하소서! 오오…! 인도하소서…!!”
“모든 죽음이 고이는 바닥을 걷게 하소서!”
노파들이 차례로 호수로 뛰어들었다. 물 위를 걷는 권능도, 소리 너머의 생명을 알아차릴 감각도 없는 그들의 옷이 무거운 솜처럼 주인을 끌어당겼다. 마지막까지 환희에 젖은 마른 손이 가라앉아가면서도 승자의 깃발처럼 흔들거렸다.
“죽음의 끝에 마침내 생이 오게 하소서……”
마지막 파문이 넓게, 호수 끝자락까지 닿을 듯 퍼지며 스러졌다. 서늘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 요정들을 배웅했다. 귀를 틀어막았던 천을 빼낸 지크프리트가 귀를 기울였다.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주변에선 작은 속삭임도 훌쩍거리는 구슬픈 울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나저나 요정들이 이렇게 많이 뭍으로 올라오다니… 예삿일은 아니군.”
본디 요정은 동물처럼 떼를 지어 다니는 존재도, 인간들의 눈에 곧잘 띄는 흔한 생물도 아니었다. 단순한 이변으로 치부하기엔 분명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지크프리트로서는 그들이 나타난 이유를 짐작키는 어려웠다.
‘이것도 토니가 나타난 영향인가… 에스니에게 물어볼까.’
말에 올라타는 지크프리트의 어깨에 무언가 떨어졌다. 고개를 드는 사이에 떨어진 물방울이 하나, 둘 그의 밀발을 적시기 시작했다. 올려다본 하늘의 구름은 당장이라도 번개를 뱉어낼 듯 꿈틀대고 있었다.
“…서둘러야겠군.”
우르르릉
너머에서 천둥이 울었다. 지크프리트는 후드를 당겨 쓰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빠르게 젖어가는 땅을 말이 빠르게 질주했다.
‘, -!’
알아듣지 못할 말로 조잘대던 토니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비록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긴 해도, 지크프리트는 그가 떠드는 걸 보는 게 좋았다. 어찌나 표정이 풍부한지, 내용은 몰라도 그가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는 건 모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에스니와도 제법 친해진 모양이라, 그는 조만간 토니에게 문자와 글을 가르쳐볼 거라고 얘기했었다.
‘여전히 나는 싫어하는 것 같았지만.’
지크프리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첫 단추를 단단히 잘못 끼운 모양이었다. 한동안은 그가 방에 있으면 밥도 못 먹고 불안해하기도 했다. 침대 근처까지 가도 그를 노려보지 않게 된 게 고작 며칠 전의 이야기였다. 그러고도 경계심은 여전해서, 그를 흘겨보는 눈빛이 딱 길이 안 든 야생 고양이 같았다. 경계심, 짜증, 친해지고 싶지 않음, 아무튼 싫음! 한 번은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었다가 손을 깨물린 적도 있었다. 전설의 용 파프닐을 잡은 기사가 고작 소년에게 손이 물리는 걸 다 본다며 하겐은 숨기지도 않고 박장대소했었다. 물론 지크프리트도 지지 않고 토니의 뺨을 꼬집어댔으므로 아쉬움은 없었다. 비록 어른이 어린애를 상대로 뭘 하느냐며 에스니에게 잔소리를 듣긴 했다만.
그렇게 유치하게 투닥댄 건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쟤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며, 아무튼 난 잘못이 없다고 뻔뻔하게 우겨본 것은?
일찍이 용사로서, 신하로서, 제 아무리 어렵고 위험한 부탁이라도 거절하지 않고 그저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누군가는 칭송했고, 누군가는 어리석다 비웃었으며, 누군가는 이용할 의도를 숨기지 않고 접근하기도 했다. 알면서도 마다하지 못한다. 그러지 않은 삶을 한 번도 선택해보지 않았으니까. 아내를 맞이하는 일도, 용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마저도─
쿠르르릉!!
“……!!”
지크프리트는 가까스로 고삐를 잡았다. 놀란 말이 앞발을 두어 번 들고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진정했다. 잠깐 상념에 잠겨 있던 사이에 비는 이제 시야를 완전히 가릴 만큼 퍼붓고 있었다.
“…곤란한걸…”
크림힐트가 조언해주지 않았더라도 저택으로 돌아가기는 글른 날씨였다. 지크프리트는 말머리를 돌렸다. 주변을 보건대 그나마 별장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곳이었다. 후드 끝에 주렁주렁 달린 빗방울을 한 번 훔쳐낸 지크프리트가 재차 고삐를 당겼다.
‘저번에 주전자가 떨어져 깨지는 일이 있었는데, 토니가 소리에 크게 놀라더군요. 진정시키느라 고생했습니다.’
‘소리?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나?’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요. 자세한 건 그가 말을 배운 후에 물어보려 합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자꾸만 머뭇거리는 말을 억지로 몰며 지크프리트는 속도를 올려 내달렸다. 가까스로 도착한 별장의 불은 전부 꺼져 있었다. 이 궂은 날씨에 에스니가 와주기를 바라는 건 무리겠지만, 그래도 안에는 사람이 있을 텐데. 말을 마구간에 대충 매어둔 지크프리트가 급히 토니의 방으로 향했다.
“토니!”
대답은 없었다. 아무리 싫어도 부르면 내다보는 정도의 반응은 해주던 아이였는데. 지크프리트가 문을 열어젖혔다. 촛불 하나 밝히지 않은 방에서 번개가 일순 번쩍이며 방을 비췄다. 침대 구석에 누군가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린 형상이 그 찰나에 잔상처럼 박혔다.
“토니! 괜찮나?”
“…….”
토니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지크프리트가 이불을 잡아당겼다. 억센 손길에 무력하게 천이 끌려간 것도 잠시, 토니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그것을 잡아끌었다. 어둠이 무색할 만큼 새하얗게 질린 안색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
몸 상태가 안 좋았을 때조차 기운차게 지크프리트에게 대들던 아이였다. 죽을 고비를 막 넘겼다는 게 안 믿겨질 정도로. 그는 아까 보았던 요정들을 떠올렸다.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의 두려움, 의지나 노력으로는 벗어나지 못하는 거대한 힘에 대한 공포. 당장이라도 깨어질 듯 세차게 떨리는 눈에 어린 감정들. 지크프리트는 말을 잃었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기억을 달래줄 만큼 그는 섬세하지 못했다.
콰르르릉!!
“아아아악!!”
토니가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았다. 지크프리트보다 작은 몸뚱이가 한껏 웅크러들었다.
“자… 잘못했어요… 제우스님…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
“용… 용서해주세요… 어머니… 어디 계세요… 누나… 도와줘…”
여전히 그는 알아듣지 못할 말들이 엉망으로 쏟아졌다. 커다란 눈망울에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뾰족하게 솟은 귀가 떨리는 손바닥 안에서 볼썽사납게 우그러들었다. 창 밖이 다시금 희게 물들었다. 천둥의 징조였다.
순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지크프리트가 그의 머리에 이불을 씌웠다. 정확하게는, 이불을 덮어씌운 채로 꽉 끌어안았다.
“!!”
소년이 전기라도 맞은 양 어깨를 퍼득 떨렸다. 당연하게도 그를 밀어내려 마구 발버둥치는 몸을, 지크프리트는 필사적으로 안고 버텼다.
“뭐야!! 이거 놔! 싫어!!”
“…….”
“놓으란 말이야!!”
콰르르릉!!
기어이 떨어진 천둥이 거세게 포효했다. 지크프리트의 가슴을 마구 때리던 손이 멈추었다. 천 너머로도 다 들리도록 내뱉는 호흡은 거칠었으나, 얌전해진 건 천둥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크프리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자. 이제 크게 안 들리지?”
“…….”
“이러고 있으면 괜찮다. 그러니까 비가 그칠 때까지만, 이러고 있어.”
토니는 늘 그렇듯이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확실히, 그의 품에서는 질책하듯이 울려퍼지던 천둥이 멀게 들리는 건 알았다. 돌처럼 굳어 있던 소년이 꾸물꾸물 지크프리트의 품으로 기어들었다. 낮게 한숨을 쉰 지크프리트가 작은 등을 토닥거렸다.
“그래. 착하지.”
“…….”
“괜찮다. 계속 곁에 있을 테니까.”
품 안에서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천둥과 번개가 번갈아 내리치며 몇 번이고 눈과 귀를 어지럽혔지만 지크프리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 품에 들어오고도 남는, 간간히 떨리는 작은 체구를 그저 지키듯이 안고 있을 뿐이었다. 비가 잦아들고, 아이가 겁먹지 않는 시간이 찾아올 때까지.
*
밤새도록 하늘을 내달리던 천둥과 번개는 아침이 될 즈음에야 잠잠해졌다.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던 빗줄기도 겨우 가늘어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만약을 위해서 좀 더 머물다 왔다는 좋은 핑곗거리는 되어줄 정도였으므로, 지크프리트는 마음 놓고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어쨌든 크림힐트가 있는 저택으로는 곧장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다행히 별장에는 예비용으로 마련해둔 식료품들이 있었다. 토니가 온 후 들여놓은 말린 과일과 육포도 충분했다. 마구간의 건초에 사과 몇 개를 얹어 말에게 준 지크프리트가 걸음을 옮겼다. 작년 겨울에 모아두었던 장작들이 다행히도 아직 남아 있었다. 마른 것들만을 골라 거뜬히 집어든 지크프리트가 그제야 안으로 들어섰다. 혼자였다면 잠깐의 추위는 못 견딜 것도 아니었으나, 동거인은 아무래도 온기가 필요할 테니까.
“토니. 들어간다.”
문을 가볍게 두드린 지크프리트가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에 앉아 있던 토니가 후다닥 일어서서는 아래로 내려가 쪼그려 앉았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만 빼꼼히 내놓고 살피는 모양이 비가 오기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지크프리트가 들고 온 나무 토막을 난로에 던져 넣었다. 반쯤 꺼져가던 불길이 샛노랗게 살아나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
쉼없이 깜빡대는 눈이 그를 흘끔거렸다. 불이 붙은 나무를 태연하게 뒤집고 밀어넣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평소라면 눈이 마주치자마자 숨어버렸을 하늘색 눈이 오늘은 그를 피하지 않았다.
“……별일이군. 배고파서 그러나?”
“…….”
“난 요리는 할 줄 모르니까 기대는 마라. 대충 과일 몇 개만 씻어서 가져오마. 날씨가 이래서 사냥도 못 가니 어쩔 수 없어.”
“…혼자서 뭐래.”
토니가 툭 내뱉었다. 물론 말을 못 알아듣기는 지크프리트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멋대로 이어갔다.
“불평해도 소용없다. 아니면 네가 잡아오든가. 그 몸으로 토끼는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알겠어요, 알겠어. 비가 계속 온다는 거잖아요. 나는 뭐 같이 있기 좋은 줄 아나? …그래도 천둥 번개는 안 치는 거죠?”
“토끼를 모르나? 그럴 수도 있지. 귀가 길쭉하고 엄청 잽싸게 뛰는 동물인데… 나참. 말도 안 통하는 녀석한테 뭐라는 거람. 나도 참 어지간하군.”
“따, 딱히 무서워서 물어본 거 아니거든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 어쨌든… 그런데 그… 어디 안 갈 거죠? 아이참, 말이 안 통하니까 은근 귀찮네…”
토니가 투덜거리며 습관처럼 머리를 긁적이다 손을 멈췄다. 어느새 말을 멈춘 사내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토니는 반사적으로 움찔거렸지만 이번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불만이 가득한 아이처럼 입술은 삐죽 내민 채였지만, 이전처럼 도망치려 하지도 날을 세워 으르렁거리지도 않았다.
“뭐…야? 왜?”
“…….”
말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던 지크프리트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토니는 이번에도 티나게 어깨를 떨었지만 되레 해보라는 듯 눈에 바짝 힘을 주고 있었다. 손이 가까워졌을 땐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고 말았지만-
“…아?”
커다란 손은 그의 머리를 때리지도, 언젠가처럼 그의 뺨을 꼬집지도 않았다. 다만 부스스한 금발을 두어 번, 정돈하듯 쓰다듬고서 손을 떼었을 따름이었다. 토니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뭐예요…?”
“친해진 김에 쓰다듬어봤다.”
“…아니… 그러니까… 뭐냐고요, 진짜…”
“그래, 그래. 다음엔 안 하마.”
이제는 익숙해진 혼잣말 같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지크프리트가 몸을 돌렸다. 하룻밤을 꼬박 같이 보낸 게 나름의 계기가 된 걸까. 어느 쪽이든 지크프리트는 그의 변화가 싫지 않았다. 연기도, 억지로 가장한 것도 아닌 곧이곧대로의 반응. 숨통이 트인다는 게 이런 걸까. 지크프리트는 어쩐지 후련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막 문 손잡이를 잡아당길 즈음엔 입가에 미소마저 띠고 있었다.
“-?”
옷자락이 당겨졌다. 아주 미약한 힘이었지만 뒤를 돌아보기엔 충분했다. 그를 붙잡고 선 채로 당황해하는 토니가 눈에 들어왔다. 본인도 무의식중에 저질러버린 모양이었다.
“……뭐지?”
“어… 그러니까, 그게…”
토니가 우물쭈물거렸다. 기다린다고 알게 될 일은 아니었지만, 지크프리트는 인내심을 갖고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조금 머뭇거리던 토니가 두 손을 자기 귀에 올렸다.
“귀, 막아준 거요. 천둥칠 때, 귀 막아줬잖아요.”
“…….”
“그거, 고맙다고요. 고, 마, 워, 요. …제대로…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창밖의 하늘과 자신의 귀를 가리키던 토니가 양손을 조심스레 모아 잡았다.
“…정말 고마웠어요.”
아주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하는 것들을 듣고 있던 지크프리트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토니보다 낮아진 눈높이로, 투명한 하늘빛을 띤 눈동자를 바라보던 지크프리트가 천천히 밖을 가리켰다.
“밖의, 비.”
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를 막아줘서.”
지크프리트가 자신의 귀를 가리는 시늉을 했다. 재차 끄덕이는 토니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다음 말은, 어떻게 이해했다고 전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지크프리트는 양손으로 천천히 토니의 손을 감싸쥐었다. 토니가 물끄러미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지크프리트를 보았다.
“……고맙다고. ……이게 맞나?”
짧은 침묵이 흘렀다. 역시 이게 아니었나. 끙 목을 울린 지크프리트가 손을 거둔 순간이었다.
“-풋.”
“…….”
“풋… 푸흡… 하하하.”
처음 들어본 토니의 웃음 소리는 명랑하고 밝았다. 그 나이 또래다운, 티끌의 어둠이나 거짓이 없는 그저 맑은 음색. 지크프리트는 그저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고서 토니가 손사래를 쳤다.
“푸하, 미안, 미안해요. 아니, 엄청 진지하게 따라해주니까 웃기잖아… 그런 거 하나도 안 받아줄 거 같이 생겨선.”
“…다시 말이 길어지니 하나도 못 알아듣겠군… 내가 잘못 이해한 건가? 아니, 전달 방식이 잘못됐나…”
“잘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름 노력해준 거죠? 고마워요.”
한참 웃던 토니가 손가락을 펼쳐 자신을 가리켜보였다.
“내 이름, 파에톤이에요. 토니 말고. 파, 에, 톤.”
“음? ……아, 이름을 알려주는 건가? …하이썬?”
“파, 에, 톤.”
“프아… 아니, 파…에… 파에던… 파덴…”
“파에, 톤!”
“파에…톤. 파에톤.”
소년의 얼굴이 환해지며 몇 번이고 끄덕거렸다. 정말 발음하기도 어렵군. 작게 투덜거리긴 했어도 지크프리트도 어느새 웃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내 차례군. 자, 지크프리트다. 말해봐라.”
“…마래, 브아라?”
“…거기가 아냐. 지크, 프리, 트.”
“시그… 휘릭!! 시구휘릭!”
“완전 틀렸어. 자, 다시……”
“아, 어려워! 안 할래요! 내 이름 알려주느라 지쳤으니까 다음에 해요! 배고파!”
“이녀석, 또 뭐라고 하는 거야? 나한테는 죽어라 시켜놓고 너는 내빼겠다고? 어딜 도망가! 이리 와!”
쏜살같이 문을 열고 도망가는 파에톤의 뒤를 황급히 지크프리트가 뒤쫓았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방은 더 이상 어둡지도 싸늘하지도 않았다. 시끌벅적한 소음이 별장의 적막을 깨우며 한참을 조잘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