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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토니)창공의 폴라리스 .01
책을 내는 걸 허락해주신 지크프리트의 오너 단테님과, 파에톤의 오너 눙님에게 감사드리며 ☆★명예지크토니러 바침★☆ Caption ※n차 창작된 지크토니와 그 등장인물들 지크프리트 사룡 파프닐을 쓰러트리고, 그의 힘을 흡수한 사검 발뭉을 손에 넣은 전설의 기사. 파프닐의 피를 뒤집어 써서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 불사의 몸이 되었으나, 등의 일부는 피가 묻지 않았다. 자기 희생 정신이 강하고 배려심이 깊지만 예외인 상대가 있다. 단 한 명.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나 감정을 깨닫는 일에 둔한 면이 있다. 어떤 적을 앞두고도 물러서지 않는 무모함은, 이런 자기애가 부족한 부분에서 기반한 것일지도 모른다. 왕에게 충성하며 동료를 믿고 함께하는 전형적이고 고지식한 성격. 하지만 아내 크림힐트와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다. 파에톤 별을 읽는 자의 말에 따르면, 이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되는 운명의 주인공. 정체는 이 우주와는 전혀 다른 시대에서 온 태양신의 아들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태양 마차를 몰았지만 말의 고삐를 놓치고 하늘과 땅을 불태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 후 최고신 제우스가 던진 벼락에 맞아 죽었어야 했지만,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지크프리트의 세계에 떨어져 목숨을 건졌다. 매일 지크프리트랑 투닥거리며 그를 싫어하는 듯이 굴지만…….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성격으로, 남을 구하거나 지키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이 좀 더 소중한 어린 소년. 호기심이 많고 자기 감정에 솔직하며, 이를 숨기는 일에 서툴다. 어머니가 바다의 님프로, 귀가 평범한 사람보다 뾰족한 편이다. 에스니 성별 불명, 나이 불명, 종족 불명. 목소리만 들으면 10대 중반의 중성적인 느낌이 난다. 별을 읽고 룬 마법을 구사한다. 군터에게 여러가지 조언을 해주고 지크프리트나 하겐과도 안면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하겐 지크프리트의 동료 기사. 하지만 자신보다 더 뛰어난 지크프리트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다. 크림힐트 지크프리트가 모시는 왕 군터의 여동생이자 지크프리트의 아내.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브륜힐트 군터의 아내.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군터와의 혼약은 그의 기사 지크프리트에 의해 이루어졌다. 본 정체는 전사의 혼을 발할라로 인도한다는 신의 사자 발키리. 사룡이 영웅이 든 마검에 목이 베여 피를 쏟으며 죽어가고, 용감한 영혼이 신의 사자의 보호를 받으며 발할라로 인도받는 세상. 그러던 어느 날, 밤이 아닌 시간에 해가 뜨지 아니하고 늑대는 울부짖고 까마귀가 낮게 날며 인간들에게 경고하니, 별을 읽는 자가 '없어야 할 것이 생겨났다'고 이르자 왕 군터가 하겐과 지크프리트에게 이변을 확인하고 없애라 명령하였다. 01. 별이 떨어진 밤 그리하여, 하늘이 어둡게 뒤덮인 숲에 두 기사가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끔찍하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먼저 경악에 찬 외침을 터트린 건 하겐이었다. 온통 새카만 어둠이었으나, 어긋난 조각처럼 균열이 생긴 하늘이 인간의 눈으로도 똑똑히 잘 보였다. 검은 두건으로 가린 것처럼 빛이 사라진 곳과, 붉게 일그러지고 녹아내리는 용암처럼 기괴하게 일그러진 곳. 그 틈바구니에서 긴 꼬리를 그으며 쏟아져내리는 불씨들이 나무와 숲을 불태웠다. “히히힝!!” 말들이 앞발을 높게 쳐들며 연거푸 고개를 돌렸다. 나는 듯이 말에서 뛰어내린 지크프리트가 고삐를 낚아채며 말을 진정시켰다. 그와 비슷하게, 하지만 반쯤 굴러떨어지듯이 착지한 하겐이 제 말을 잡아끌며 불안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끔찍하군… 저것이 에스니가 말한 ‘없어야 할 것’인가? 하지만 저걸 어떻게 처리한단 말이야?” 지크프리트는 대답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계선을 따라 점점이 떨어진 흔적이 마치 발자국 같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마법사를 부르는 것이… 어이, 지크프리트!” “왕께서 명하신 일이다. 아무 것도 모른 채로 갈 수는 없어.” 발뭉을 뽑아든 지크프리트는 평소와 다름 없는 고요하고도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간으로는 도저히 감당 못할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데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말하는 건가. 하겐은 자신은 용의 피를 뒤집어쓰지도 않았고 그런 것과 대적할 용기도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혼자 돌아갔을 때의 뒷일을 감당할 배짱도 없었다. 입 속으로 조용히 욕설을 중얼거리며 하겐이 검을 뽑고 앞서가는 지크프리트의 뒤를 따랐다. “저 끝에 도달한다 치자, 그 다음엔 어쩔 거지? 아무리 너라도 금이 간 하늘을 붙일 수는 없어. 얼음의 거인이나 룬의 통달자가 아니고서야 그런 건 불가능하다구.” “그렇겠지. 난 마법을 부릴 줄 모르니까.” “알면서도 가겠다니, 이건 바보나 하는 짓이야. 네가 아무리 고집불통이어도, 목숨 아까운 줄은 알아야지! 그러다 언젠가─” ──!!! 순간 무언가가 하늘을 갈랐다. 시야가 온통 희게 멀어버릴 만큼 강력한 빛이었다.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앞을 가렸던 지크프리트가 필사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문지르면서 비명을 지르는 하겐은 무시한 채였다. “대체 무슨 일이….” 하늘 너머, 아주 먼 곳에서부터 일그러짐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마치 남은 얼룩이 지워지듯, 누군가가 얼기설기 꿰매고 있는 것처럼 거칠고도 빠른 속도였다. 지크프리트는 점차 선명해지는 시야에 힘을 주었다. 마법에 정통하지도, 점성술이나 하늘의 이치에 밝지도 않았지만 이것이 인간이 간섭할 영역이 아님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왕에게 돌아가 전할 말이 아무것도 없으리란 것도. 그때였다. “……!?” ‘별’이 떨어진 것은. 지크프리트가 반사적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거의 닫혀가는 일렁임 속에서 무언가가 빛나고 있었다. 거대한 씨앗, 부서진 파편, 혹은 일그러진 공간에서 녹아내린 운명의 잔상. 그러나 그 정체를 완전히 알아차리기 전에, 그것을 향해 날아오는 재빠른 빛이 지크프리트의 시야에 들어왔다. 땅으로 속절없이 낙하하는 그것과 달리, 신의 힘을 담은 ‘번개’는 느리지만 정확하게 정체불명의 물체를 노리고 있었다. 영영 흔적을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이. 두 번의 기회도, 뿌리를 내릴 일말의 가능성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지크프리트는 달려나갔다. 용의 피를 뒤집어썼던 발뭉의 칼날이 본래의 사악한 기운과 지크프리트의 고결한 기운을 동시에 발하며 어둠 속에서 강렬한 빛을 뿜었다. 이미 한참 멀어진 하겐이 무어라 외치고 있었지만 지크프리트는 듣지 않았다. 처음부터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 멈출 거라면 검을 뽑지도 않았을 터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시야에 마침내 신의 번개에 노려지는 그것의 형태가 보였다. 사방으로 길게 흩어진 금발이 빛무리처럼 나풀거렸다. 무심코 크게 뜬 눈동자에 추락하는 소년의 모습이 찰나의 그림처럼 내리박혔다. 발뭉의 날카로운 끝이 허공을 갈랐다. 형태 없는 칼날은 이윽고 뚜렷한 검기로 바뀌어 소년을 노리는 번개에 적중했다. ─!!!!!! 신의 빛과 사검의 검기가 허공에서 폭발했다. 전례없는 충돌에 천지가 진동하며 사납게 포효했다. 가까스로 소년을 낚아채는 데에 성공한 지크프리트가 그를 감싸안고서 땅에 데굴데굴 굴렀다. 강렬한 빛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부딪힌 몸의 충격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지크프리트를 둘러싼 세상이, 그가 느끼는 모든 감각들이 폭발에 휘말려 사라져가는 듯했다. 부숴져라, 부숴져라, 죽어라, 사라져라, 없어져라, 없어져라, 거부한다… 머리에 조금씩 들려오던 목소리는 순식간에 뇌리를 찌르는 소음과 비명으로 바뀌었다. 이를 악문 지크프리트가 소년을 힘주어 끌어안으며 바닥에 발뭉을 꽂았다. 사방을 뒤덮은 새하얀 빛을 사검이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 짧고도 긴 파장과, 빛의 뒤섞임. 세상이 아주 천천히 고요해졌다. 뺨에 스치던 바람도, 멀리서 스산히 울던 나무들도 숨을 죽이고 침묵했다. 사룡의 눈처럼 시뻘건 불빛을 발하던 발뭉도 이윽고 잠잠해졌다. “…끝났나…?”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들며 눈을 깜빡였다. 균열이 사라진 하늘에 점점이 박힌 별들이 반짝거리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변은 그가 아는 변방의 숲 그대로였다. 불비가 떨어져 타버린 나무들과 엉망이 된 땅이 그가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지크프리트가 몸을 일으켰다. “지크프리트! 살아 있나!?” 하겐이 멀리서 소리쳤다. 검을 검집에 꽂으며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얼굴엔 경악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발뭉을 땅에서 뽑으며 지크프리트가 대답했다. “무사하다. 이녀석도.” “젠장, 제정신이냐고! 누가 봐도 위험한 상황이었잖아! 저게 번개의 신이 내린 천벌이었으면 너는 진작 죽었을 거다!” “그랬겠지. 그 정도의 위력이었지만… 차마 가만히 보고 있을 순 없었다.” 맞았다면 생사는 고사하고 뼛조각도 남지 않았을 테니까. 지크프리트는 그제야 품에 줄곧 안고 있던 자를 내려다보았다. 많아봐야 십대 후반, 어리게는 초반까지도 볼 수 있을 소년은 그 난리통에도 눈을 감고 축 늘어져 있었다. 미약하게나마 울리는 박동만이 그에게서 들려오는 전부였다. 가까이 다가온 하겐이 소년을 흘끗거렸다. “살아 있긴 한 거지?… 엄청난 몰골이군. 용의 불길에 쫓기기라도 한 건가.” 하겐의 말마따나, 그의 옷은 형체를 알 수 없이 그을리고 몸 여기저기엔 긁히거나 부딪힌 멍과 흉터가 가득했다. 허벅지까지 내려올 듯한 길고 아름다운 금발은 재로 뒤덮여 엉망이었고, 양손엔 무엇을 잡았던 것인지 새빨갛고 굵은 상흔이 깊게 패여 있었다. 말없이 그를 살피던 지크프리트의 미간이 구겨졌다. “…….” “이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데려가야지.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다.” “너라면 분명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만약에 이녀석이 ‘없어야 할 것’이라면 어떻게 하려고?” 하겐이 혀를 차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까의 재앙이 꿈속의 일처럼, 밤이 찾아온 하늘은 더없이 고요하고 맑았다. “…분명 죽이려 했던 걸 텐데.” 목적어를 말하지 않았다고 모를 지크프리트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크프리트는 묵묵히 망토를 벗어 소년의 몸에 감아주곤 좀 더 편하게 안아들었다. 소년의 고개가 기울어 그의 품에 툭 닿았다. * “살려두실 생각이십니까.” 지크프리트는 미간부터 구겼다. “환자를 앞에 두고 할 소리는 아닌 것 같군.” “왕의 형제시여, 용감한 기사 지크프리트시여.” 에스니가 머리를 깊이 숙였다. 성별 불명, 나이 불명에 룬 마법과 점성술에 능통한 신비한 존재. 지크프리트의 반도 안 되는 작은 체구와 후드 아래로 보이는 입술로 그가 십대 소년이거나, 혹은 그 나잇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인외의 존재일 거라 추측하는 자들이 많았다. 왕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중립을 표명하고 있어, 지크프리트가 이 사태를 알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립이라는 것은, 절대로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왕께 알리지 않고 저를 부르신 까닭은, 필히 당신께서도 느껴지는 바가 있어서가 아닙니까?” 에스니의 목소리는 지극히 사무적이고 담담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크프리트도 눈썹 하나 깜짝 않고 대답했다. “그의 부상은 단순히 약초나 성수로는 낫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그것 뿐이야.” 지크프리트가 침대로 시선을 옮겼다. 붕대로 몸을 칭칭 감싸고, 이불에 폭 파묻힌 소년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숨을 필사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소년을 불태운 것은 그야말로, 하늘을 녹이고 일그러뜨렸던 태양 그 자체. 그로부터 살아남은 것은 신의 가호 덕분이나, 그를 불태우고 영원한 상흔을 남긴 것 또한 신이 내린 분노입니다. 그 신이 어떤 분이신지, 소년이 누구인지는 저로서도 알 수가 없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지크프리트는 말을 자르며 팔짱을 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약자다. 더군다나 어린아이고. 운명이니 신의 분노니 이런 건 알 바 아니야. 알고 싶은 건 자네가 이 아이를 치료할 수 있는가다.” “…….”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환자를 내치는 무고한 짓이야말로, 신의 분노를 사기에 마땅한 행위라고는 생각지 않는가?” 지크프리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에스니는 한참 말이 없었다.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 불편하고도 팽팽한 분위기가 길어졌다. “멍과 손의 흉터는 이미 때를 놓쳤습니다만,” 먼저 고개를 숙인 건 예언자 쪽이었다. 정중하고도 평온한 어조가 이어졌다. “열기를 가라앉히는 약초를 바르면 통증은 완화될 것입니다. 당장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군. 서둘러주게.” 다시금 머리를 숙여보인 에스니가 곧 방을 나섰다. 지크프리트는 그제야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짙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이름은커녕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이방인을 보호하겠답시고 예언자를 협박하는 날이 올 줄이야. ‘…하지만 납득할 수 없어.’ 어린 아이. 실려온 후로도 눈 한 번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하루를 지샜고, 그러고도 몸이 낫질 않아 의식도 없으면서도 병든 강아지처럼 끙끙대며 앓는 아이. 이름도, 고향도, 이리된 연유도 짐작할 수 없는 존재라지만, 어떻게 모른 척하고 내치란 말인가. 지크프리트는 그럴 수 없었다. 소년을 노리고 떨어지는 번개를 본 순간부터 그리 다짐하고 있었다. ‘…단숨에 목숨을 끊으려 했다. 부상자, 하물며 그대로 땅에 떨어져도 즉사했을 아이를.’ “……그런 일을 당해도 괜찮은 생명 같은 건 없어.” 지크프리트는 물수건을 집어 소년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재로 뒤덮였던 머리칼은 이제 진한 황금빛으로 푹 젖어 새하얗게 질린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 -……” 갑자기 신음하며 소년이 뒤척였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지크프리트가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음?” 그리고, 거짓말처럼 코 앞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 “…….” 처음 본 눈동자는 세공을 막 끝낸 보석처럼 투명하고 밝은 푸른빛이었다. 그 영롱한 원 안에 비친 자신을 발견한 순간, 지크프리트는 마법에 걸린 듯 우뚝 멈추었다. 도중에 애매하게 들린 손도, 호흡도, 심장 박동도 얼어붙은 듯했다. 어떤 저주가 이토록 강력하며 어떤 마법이 이토록 매혹적일까. 영겁에 갇힌 찰나에서 오로지 소년만이 살아 있었고 찬란히 빛났다. 지크프리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다급하게 튀어나간 건 분명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으아아악!! 이거 뭐야!!!” 알아듣지 못할 말과 함께 날아든 주먹은 제법 매웠다. 지크프리트는 뺨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볼썽사납게도 나가떨어졌다. 방심했다, 환자가 이렇게 힘이 셀 줄 몰랐다… 온갖 변명과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를 날려버린 정체불명의 소년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떠들고 있었다. “헉, 헉...! 얼굴에 홀려서 신계에 끌려온 줄 알았네! 대체 뭐야!? 인간!? 아니, 평범한 인간이 이렇게 잘생길 리 없어! 요물이구나! 요물이야!” “……대체 무슨 말을… 으, 골 울려…! 조용히 좀 해!” “뭐라는 거야!? 사람 말로 해! 그보다 여기 어디야!? 날 왜 데려온 거야!” “귀청 떨어지겠군…” 소년의 목소리는 환자답지 않게 엄청 크고 시끄러웠다. 흡사 성난 앵무새와 같은 외침이었다. 당연하게도, 지크프리트의 말을 이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온갖 인상을 다 쓰고 귀를 문지르던 지크프리트는 소년이 침대를 뛰쳐나가자 화들짝 놀라며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잠깐! 아직 치료가 안 끝났다!” “이거 놔! 집에 갈 거야!!” “아니, 잠깐 이야기를… 윽, 환자가 왜 이렇게 힘이 세!? 말 좀 들어!” “집에 갈 거라고!! 으악!! 아버지 도와주세요! 어머니!!” 당연하게도 대화가 안 통하는 두 사람의 몸싸움은 점점 격해졌다. 하지만 혼수 상태에서 겨우 깨어났을 뿐인 소년이 평생을 기사로 살아온 사내를 이길 리 만무했다. 커다란 방에 둘이 뒤엉켜서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마침 별장으로 들어서던 하겐이 기겁하며 달려와 방문을 열어젖혔다. 약초를 가지러 갔던 에스니도 함께였다. “지크프리트! 대체 무슨 일이…” 하겐은 말을 멈췄다. 당황한 그들의 시야에 펼쳐진 건, 성난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는 상처투성이 소년을 지크프리트가 온 몸으로 누르고 버티고 있는 광경이었다. “…….” “뭘, 빤히 보고 있는 거냐…!! 와서 빨리,” “아니, 난 소년에 부상자인 애랑 하는 취미는 없으니까… 그냥 가겠다…” “그런 거겠냐!!!” “집에 보내줘어어어억!!!!!!!” 여전히 한 마디도 서로에게 닿지 않는 절규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 지크프리트의 진심 어린 해명과, 더 비명을 지를 힘이 없어 나가떨어진 소년의 치료가 한참 이어진 뒤에야 상황은 진정되었다. 유독 후드를 깊게 당겨 눌러쓴 에스니가 잠든 소년의 머리에 몇 가지 룬 문자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옆에 앉은 지크프리트는 아까의 소동으로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피로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역시 알 수 없군요.” “뭐가 말인가?” “이 소년이 넘어온 근원 말입니다.” 하겐이 눈썹을 찡그렸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에스니.” 특유의 건방지고 깔보는 어투에도 중성적인 음색은 흔들림 없이 단조로웠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크프리트도 에스니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풀이하자면, 그의 운명은 이 땅… 정확하게는,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운명과 시간을 지나는 세계선에서 왔다고 해야겠죠. 그것이 어디인지는 말씀드린대로 저로서도 짐작키 어렵습니다. 적어도 그가 본래 있던 세계에서는, 이 소년의 운명은 완전히 소멸했거나 삭제되었을 겁니다.” “운명의 소멸… 삭제… 무시무시한 이야기군.” 하겐이 혀를 찼다. 지크프리트는 말없이 잠든 소년을 보았다. 적어도 지크프리트의 세계에서는 성인으로 취급도 받지 않을 외모였다. 그런데 소년이 태어난 곳에선 이미 죽은 몸일 거라니. 상처를 치료하면 어떻게든 돌려보낼 방도를 찾아볼 생각이었건만, 발할라나 헬라에도 그가 있을 장소가 없다는 건 예상밖이었다. “적어도 신의 후손, 혹은 그들이 창조한 요정이 아닐까 했는데… 말이 안 통하는 건 그것 때문이었군. 이거야 원, 설명하기도 어렵겠는걸.” “그래서 덮치려고 했냐.”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고… 됐다.” 한숨을 푹 내쉰 지크프리트가 화제를 돌렸다. “그럼 앞으로 이 소년은 어떻게 되는 거지?” “…….” 에스니는 침묵했다. 하겐과 지크프리트 전부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말씀드렸듯이, 그는 원래 이곳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운명의 별. 하지만 하늘을 뚫고 들어온 생명은 궤도에 올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이 세계에 얽혀버렸단 뜻이죠.” “흠… 여기서 사는 수밖에 없단 건가. 골치아프군.” “그리 간단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턱을 매만지던 하겐이 눈을 찡그렸다. 에스니가 허공에 원을 그렸다. 신비한 마력을 띤 원들이 제각각의 색과 크기를 뽐내며 느리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 별로 인해 누군가의 운명이 어떻게 영향을 받을지, 얼마나 바뀌게 될지. 그것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중심으로 많은 것이 변화하고 있죠.” 원들의 중심에 커다란 황금빛이 번쩍였다. 그 화려한 빛에 떠밀리듯 차차 색을 잃어가는 원들과, 도리어 팽창하듯 커지는 색채에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래도 지크프리트는 눈을 떼지 않았다. 별과 운명, 생명, 지식과 한계를 초월하는 마법과 신비. 지크프리트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그것들을 한낱 인간이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지, 상상도 못할 참극을 가져올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완전히 나쁜 소식이잖아!” 질색을 하는 하겐과 달리 지크프리트는 말이 없었다. 그의 진지한 눈을 본 하겐이 경악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설마 살려놓을 생각은 아니겠지, 지크프리트?” “…완전히 나쁜 영향을 가져올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반드시 좋다고 할 수도 없다잖아! 아니, 우리끼리 이럴 때가 아니지. 왕께 말씀드려야겠어. 그러면 이녀석의 처우도-” “하겐.” 지크프리트가 하겐의 손목을 붙들었다. 하겐이 인상을 구기며 손을 떨치려 했지만 곧 포기했다. 애초에 그의 악력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에스니는 그저 관조자처럼 둘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크프리트가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말을 던졌다. “그의 상태는 어떤가?” “흉터는 거의 남지 않을 겁니다. 재생력이 평범한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나군요. 그만큼 범상치 않은 존재란 거겠지요.” “알겠네. 일이 있으면 또 부르지. 오늘 이 방에서 한 이야기는 절대로 함구하게.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되네.” “지크프리트!” “명심하게. 밖으로 새어나가면 내 검이 즉시 자네 목을 칠 거야.” 에스니는 겁 먹은 기색도 없이 그저 고개만 정중히 숙여보였다. 하겐만 속이 터져 죽을 것 같단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방을 나서서 완전히 별장을 나간 뒤에야 지크프리트는 하겐을 놓아주었다. 짜증스럽게 손목을 털어댄 하겐이 삐딱하게 서서 팔짱을 꼈다. “내가 왕께 말씀드리겠다면 어쩔 작정이지?” “부탁 좀 하자. 아직 어린 아이야. 다른 세계에서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갈 곳을 잃은 녀석이 불쌍하지 않나?” “운명을 바꾸는 존재는 불길하고 사악해!” 당연한 반응이다. 지크프리트는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물러설 생각도 없었다. “그때는 처리하면 그만이야. 파프닐도 베어버린 검이다. 저렇게 작고 얇은 목이라면, 다 휘두를 필요도 없이 잘려나가겠지.” 단순명료한 대답에 하겐은 말을 잃었다. 지크프리트는 살벌한 말과 달리 진중하게 그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그 까닭을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아까 마주쳤던, 세상의 사악이나 불운, 고행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보이는 눈동자가 자꾸만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위험을 가져오니까, 그럴지도 모르니까 없애야 한다고 감히 단정치 못할 맑은 색채가. “…네 맘대로 해. 책임은 전부 네가 지는 거다.” “고맙다.” 제 말만 던지고 나가버린 하겐에게 그의 인사가 닿았을 지는 알 수 없었다. 거친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을 등지고 서서, 긴 한숨을 내뱉은 지크프리트가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비 풀린 망아지 같던 소년은 한결 안색이 나아진 모습으로 태평하고 고른 숨을 내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