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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엠블루)곁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엘소드는 결국 일어나 앉았다. 잠자리가 불편하진 않았으나 마음이 문제였다. 낮게 한숨을 내쉰 엘소드가 옆을 돌아보았다. 아인이 옅은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자고 있었다. 루의 말마따나 마계로 넘어온 뒤로 그는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웃는 얼굴로 가리고 내색은 안 했으나 모를 리가 없었다. 헤니르의 기운으로 고생한 게 바로 며칠 전이었는데, 이런 곳으로 데려오다니 제가 무심한 탓이 컸다. 조심히 머리칼을 쓸어넘겨준 엘소드가 다시금 소리 없이 한숨을 내뱉었다. 가슴에 응어리가 진 양 답답하고 묵직했다. 역시 누나에게 말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레이븐 형? 아이샤도 좋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엘소드는 쓰러지듯 도로 누웠다. 자신이 본 불길한 환상에 대해 어떻게든 털어놓고 싶었다. 그건 다 꿈이라고, 무시해버려도 된다는 말을 듣기 전까진 안심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불을 쥔 손가락이 꿈지럭거렸다. 아인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지치고 피곤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리더인 자신이 일행을 불안하게 만들어도 되는 걸까. 나이는 어리고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그래도 일행은 엘소드의 뜻을 따르고 존중해주고 있었다. 이제 와서 어리광을 부리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다든가,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에게 걱정을 털어놓아서, 그 누군가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 바라지 않을 뿐…… 이불이 부스럭거렸다. 옆을 돌아보려던 엘소드를 흰 팔이 붙들어 잡아당겼다. 버틸 새도 없이 끌려간 품에서 따뜻하고 좋은 향이 났다. 아인. 고개를 겨우 든 엘소드의 머리를 부드러운 손이 느리게 쓰다듬었다. “잠이 안 와요?” 아인의 목소리는 반쯤 잠겨 있었다. 머뭇거리던 엘소드가 두어 번 끄덕거렸다. “미안. 나 때문에 깼구나.” “괜찮아요. 무슨 고민 있나요? 아까 말하려던 그것?” “…….” 엘소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를 응시하던 푸른 눈동자에서 점점 졸음이 가셨다. 아냐.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 풀이 죽은 목소리도 더 또렷하게 들렸다. 아인은 엘소드를 더 꼭 끌어안았다. 저보다 마르고 늘씬한 품에 얼굴을 파묻은 엘소드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감싸안은 등이 길고 넓었다. “아직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거죠?” “응.” “오히려 남에게 털어놓다보면 정리되기도 한다던데. 그건 싫은가요?” “싫은 건 아니지만……” 말끝을 흐리던 엘소드가 아인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엘 수색대의 리더니까.” “그렇죠.”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 우리 동료들을 위해서 말이야. 아인이 지금, 우리가 걱정하지 않도록 피곤함을 참고 따라주는 것처럼.” 아인이 가만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말을 안 하기로 한 건가요?” “음… 당장은. 이 힘든 시기가 지나가면… 그때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돌연 눈앞에 그때의 환상들이 스쳐지나갔다. 쓰러진 동료들.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 어둠. 절망. 싸늘하게 얼어붙은 감각. 비명을 지를 뻔했던 엘소드는 가까스로 아인을 부여잡았다. 아인은 놀라지도 않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요. 내가 옆에 있어요. 겁내지 말아요. 다 좋아질 거에요. 거친 숨을 몰아쉬던 엘소드의 눈이 조금 젖어 있었다. 가만히 그를 들여다보던 아인이 그의 눈가를 쓸어주었다. “그래서 그때까진, 혼자서 짊어지기로 한 거고요?”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판단은 네 몫이지만……” 아인은 말 끝을 흐렸다. 사실 어떤 조언을 할 수 있을지 아인도 감이 서지 않았다. 엘소드에게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엘소드는 자신이 혼자 하겠다 마음 먹은 건 반드시 해내야 했다. 설령 그걸로 자신이 희생하여 목숨을 잃는 결과가 생긴다고 해도. 아인은 그런 엘소드가 사랑스러웠다. 애틋하고, 애잔하고, 때때로 안쓰러웠으나 믿음직하기도 했다. 헤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너의 세상에 기억되고 싶었다. “ㅡ엘소드.” “응?” “엘소드가 엘을 복원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나요?” 안 날 리 없었다. “싫다고 했어. 잊히기 싫다고.” 아직도 엘소드는 그가 무슨 말을 했던 건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들었던 비통한 어조와 눈물이 어린 듯한 호소는 어젯밤의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아인의 손이 엘소드의 뺨을 어루만졌다. “너는 그때 뭐라고 했었는지 알아요?” “……다 잘 될 거라고……” “네. 지금까지 잘해왔으니까 문제 없을 거라고. ” 쪽.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어둑한 시야 속에서 아인은 홀로 빛나는 듯이 웃고 있었다. “지금 내가 그 말을 돌려드릴게요.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지금까지 잘해왔으니까요.” “…아인…” “전부 말하지 않아도 돼요. 그래도 얼마든지 말해줄 수 있어요. 괜찮을 거예요. 엘소드는 늘 잘하고 있어요. 믿음직스럽고 든든한 리더죠. 그러니까 혼자 끌어안고 있는 것도 까닭이 있을 거예요. 너무 지치면 품을 빌려드리고 자장가를 불러드릴게요.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날엔 누구도 찾지 못하게 숨겨놓을게요. 그러고 나면 거짓말처럼 고민이 해결되어 있을지도 모르죠. 나랑 너만 아는 비밀로 말이에요.” 엘소드가 입술을 떨었다. 아인은 여전히 따스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푹, 아인에게 돌진하듯 머리를 파묻은 엘소드는 한참 말이 없었다. 마치 이제야 제 나이가 열여덟이라는 걸 알아버린 것처럼. “……고마워.” “난 아무것도 안했는걸요. 들은 만큼 돌려줬을 뿐이랍니다.” “그래도 정말정말 고마워. 진심이야.” 엘소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이 오랜만에 반짝거렸다. 작게 소리 내어 웃은 아인이 그의 거칠한 뺨에 입술을 부볐다. “늘 네 곁에 내가 있음을 잊지 말아요.” “……응.” 나직한 대답을 흘리며 입술이 닿아왔다. 아인은 거절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아인만이 받아줄 수 있는, 두 사람만의 비밀. 약속이라도 한 듯 웃음이 서로에게 번져갔다. 오늘은 간만에 평온한 밤이 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