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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아니라 썰로 이어집니다. 주의해주세요.
리랴님(@ryria_HQ)의 허락을 받고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성관계 묘사가 있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와 성인의 관계를 다루는 트리거 요소를 기반으로 합니다.
썰의 특성상 이하는 반말로 진행되므로 양해바랍니다.
세츠나는 햇빛에 눈을 떴음. 미리 얘기하는 걸 깜빡했는데 이 세계관의 뱀파이어들은 햇빛에 닿는다고 불타죽거나 하지 않음. 물론 관에서 자지 않아도 되며 마늘에 퇴치당하지도 않음. 혼혈인 뱀파이어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세츠나가 자는 방은 늘 커튼이 열려 있었음. 세츠나가 주변을 둘러보는데 그라함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음. 어젯밤부터 한숨도 안 자고 세츠나의 곁을 지킨 것.
"잘 잤나?"
"응... 그라함은,"
말을 잇다가 세츠나가 도중에 끊고 자리에 벌떡 일어나 앉음. 그라함의 소매가 팔뚝까지 완전히 찢겨나가서였음. 물론 그때 찢겨나간 게 소매만이 아니었지만 세츠나가 알 방도는 없었다. 잘려나갓던 팔이 완전히 자라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라함이 갑자기 야성미를 드러내려고 소매만 찢어버린 게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알아차렸고, 뭔가 있었음을 알아챈 세츠나가 급히 그라함을 붙듬. 하지만 세츠나를 보는 그라함은 좀 피곤한 기색인 걸 빼고는 평소와 같은 웃는 얼굴이었음.
"왜 그러나?"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어?"
"으음. 있었지. 팔이 좀 간지러운 일."
물론 간지럽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음. 하지만 그라함은 뼈가 자라고 거기에 살이 붙는 고통을 견디면서도 세츠나를 걱정하느라 잠도 자지 않았다. 오히려 세츠나가 멀쩡해보이는 거에 안심했음. 새로 자란 오른팔에 손톱이 길게 자라난 걸 보고 세츠나가 걱정스러워하자 보란 듯이 양손으로 세츠나의 뺨을 감쌈. 완전히 돋아난 팔은 흉터 하나 없이 멀쩡했음.
"걱정할 거 없다. 그냥 평소보다 손톱이 좀 빨리 자란 정도야."
"......"
"그래서. 너는 괜찮은 건가, 소년?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내가 아플 곳이 어딨어. 편하게 잠만 잤는데..."
"음?"
그라함이 눈을 깜빡였음. 세츠나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임.
"꿈도 안 꾸고 잘 잤는걸. 그라함에게 뭐가 생긴 줄도 모르고."
"......어젯밤 일 기억 안 나나?"
"무슨 일?"
이상했음. 세츠나는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것처럼 보였음. 그렇게 힘들어하고 괴로워했는데. 눈이 핏빛으로 물들어서 자신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말하던 것도 그라함은 기억하고 있는데, 세츠나는 그라함만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음. 그라함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확인차 물어봄.
"꿈도 안 꾸고 잤어?"
"응."
"한 번도 안 깨고?"
"그렇다니까..."
그라함은 세츠나를 보다가 끌어안음.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앗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더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음.
"그렇군. 소년이 괜찮으면 됐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다. 봐라. 다친 곳도 없잖나?"
팔을 푼 그라함이 보란 듯이 두 팔을 벌리고 웃자 세츠나가 조금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겨우 안도함. 그래도 손톱이 긴 건 불편하다며, 오늘 소년이 잘라주지 않겠느냐고 장난스럽게 말하던 그라함은 갑자기 밖에서 들린 시종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림. 손님이 왔다고 했음. 방문객은 빌리. 사실 예고도 없이 그라함의 성에 찾아올 뱀파이어는 그밖에 없기도 했음. 안 그래도 잘됐다 싶어서 그라함은 자리에서 일어남.
"잠시 다녀오겠다, 소년."
"응."
"무슨 일 있으면 꼭 불러라. 알겠지?"
세츠나는 영문도 모르고 알겠다고 함.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일은 없겠지만 그라함이 걱정하니 대답한 거였음. 그라함은 세츠나를 두고 응접실로 감. 미리 안내를 받아 들어온 빌리가 앉아 있다가 고개를 돌렸음.
"대단한 모습이군. 한바탕 싸우기라도 했나?"
"불청객이 여럿 찾아왔었지. 자네 같은."
"친구에게 무슨 섭섭한 소릴."
"원래 애인 이기는 친구 없다잖나."
피식 웃은 그라함이 자리에 앉음.
"옷을 갈아입고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건 미안하게 됐다. 용건은 뭐지?"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저번의,"
"아, 귀족 회의 얘기라면 하지 마. 시간 낭비니까. 차라리 맛있는 와인과 달콤한 디저트나 얘기하지. 소년이 좋아할 만한 걸로."
그라함이 손을 들어서 화제를 막아버렸음. 빌리가 못마땅한 듯이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쉼.
"귀족 회의는 어떻게든 네가 데리고 있는 그 인간에게 임무를 떠넘기고 싶은 모양이었어."
"내가 거절한다. 아무리 뱀파이어 전체의 중대사를 논하는 자들이라고 해도 내 소년의 일까지 왈가왈부할 순 없어."
"그들의 비위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애초에 내가 살아돌아온 것도 아니꼽게 보는 자들 아닌가? 내가 굳이 머리를 숙이고 아양 떨 일은 없지."
그라함은 비꼬는 어조도 없이 담백하게 말을 이어감. 그가 뭘 말하고 있는지 바로 이해한 빌리가 조금 움찔했다가 한숨을 또 내뱉음.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냐."
"그렇겠지. 하지만 날 싫어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도 사실이고."
"그걸 알면서도 굳이 또 눈밖에 날 일을 하겠다는 거야?"
"이미 회의 때 말하지 않았나? 날 적으로 돌릴 테면 해보라고."
"그라함."
짐짓 엄하게 그를 부른 빌리가 그를 바라봄. 딱히 화내거나 슬퍼하지도 않고, 친구의 시선을 받아내던 그라함이 다시 말했음.
"세츠나에게 위험한 일을 시키지 않아."
"......그 자의 죽음은 너도 바라던 것이 아니었나?"
"나도 바라면서 하지 못하는 일을 시킬 순 없어. 너무 위험해."
"이번 일을 그냥 넘긴다면 정말로 뱀파이어 모두가 너를 적으로 돌릴지 몰라."
그때는 마침 세츠나가 그라함이 걱정되어서 결국 방을 빠져나온 상황이었음. 응접실까지 왔던 세츠나가 무심코 빌리의 말을 들어버림. 태연히 웃는 그라함의 말도.
"난 바뀌지 않아. 소년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그게 낫다."
"...하여간 똥고집은."
"난 늘 그랬지."
빌리가 고개를 흔들곤 일어섰음. 벽 근처에 서 있던 세츠나가 빌리의 기척을 듣곤 옆으로 비켜섬.
"네 뜻이 정 그렇다면 귀족들을 한 번 더 설득해보겠어. 성과가 좋을 것 같진 않지만."
"너까지 그들에게 미움을 살 필요는 없잖아."
"날 친구의 위기를 보고 그냥 둘 매정한 녀석으로 봤다면 실망이야."
그라함은 눈을 깜빡이다가 웃었음. 빌리가 그를 찾아온 것도, 귀족 회의에 시달려서 자신을 감찰하러 여러번 왔던 이유도 자신을 생각해서라는 걸 모를 그가 아니었으니까. 그라함은 빌리를 배웅하고 돌아오다가 세츠나와 마주침. 복도에 서 있는 세츠나를 잠시 바라보던 그라함이 이내 웃고는 다가가서 그를 끌어안고 이마에 키스함.
"침대에 있는 게 편했을 텐데. 외로워서 나왔나?"
"......걱정 되서."
세츠나는 돌려말하는 법이 없었음. 그라함은 웃고선 그를 가볍게 안아듬. 처음 왔을 때보다 키도 훌쩍 크고 많이 자랐는데 그라함은 세츠나를 한 번도 무거워한 적이 없었음. 익숙하게 그라함의 목에 팔을 두르고 얌전히 안겨 가던 세츠나가 방에 들어서자 불쑥 입을 열었음.
"나 때문에 위험해진 건가?"
"그럴 리가. 난 원래 적이 많아."
아플 법도 한 말인데 그라함은 그러긴커녕 오히려 유쾌하게 말했음. 세츠나가 옅게 웃어버렸을 정도로. 손을 뻗어서 그라함의 뺨을 어루만지던 세츠나가 그라함에게 이마를 맞댐.
"...내 발로 나가진 않을 거야. 난 당신의 소년이니까."
담담하지만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말이었음. 그는 위축되지 않았음. 불안해하지도 않았음. 그라함이 자신을 지키기로 결정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으니까. 빙긋 웃은 그라함이 키스했음.
"그래야지. 그러면 화낼 거다. 난 너의 신이니까."
떨어지는 입술에 이번엔 세츠나가 입을 맞췄음. 그라함이 세츠나를 침대에 눕히며 깊게 키스하기 시작했음. 다음은 모두의 생각대로. 여담으로, 그라함의 오른손에 난 손톱에 시트가 찢어져서 새걸로 갈았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
한편 영지에서 살아돌아간 뱀파이어 헌터 일행은 몸을 추스렸음. 혼혈 뱀파이어인 알렐루야의 부상은 빨리 나았지만 일반인인 닐과 티에리아의 회복은 꽤 더뎠음. 티에리아는 빨리 그라함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알렐루야가 필사적으로 말린 덕에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음. 그리고 닐은 생각함. 그라함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들을. 그는 크루지스 살육전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었고, 그 자리에 있던 것도 확실했음. 아리오스가 뱀파이어들 손에 넘어간 게 그 사건 때였으니까. 하지만 따로 범인이 있다는 것처럼 말한 것, 그리고 그는 뱀파이어들도 함부로 손 쓸 수 없는 자라고 얘기한 게 수상했음. 닐은 한숨을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남. 그때도 한창 말다툼을 하고 있던 알렐루야랑 티에리아가 그를 봄.
"어딜 가려고? 아직 부상이 안 나았을 텐데. 환자는 절대안정이다."
"...그 말엔 동의하지만, 방금 전까지 나가야한다고 얘기했던 사람 입으로 들으니까 기분이 참..."
"난 다 나았어!"
"네, 네. 알겠어. 그러니까 흥분하지 마, 티에리아."
알렐루야가 다시 그를 말림. 둘을 보면서 사이 좋다고 픽 웃은 닐이 겉옷을 들고 나섬.
"미스 스메라기에게 다녀올게."
"그녀에게? 하지만 최근엔 들어온 수입도 없었잖아."
"으음~ 개인적으로 모아둔 돈 좀 털어보려고. 아무래도 영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럼 다녀올게."
티에리아와 알렐루야가 서로 마주보는 사이 닐은 밖으로 나감. 셋은 협력 관계를 넘어선 공동체였기 때문에 수익을 공평하게 나누는 한편 활동 자금을 따로 분리해서 모으고 있었는데, 닐이 자기 사비까지 털겠다고 이야기한 게 좀 의아했음. 닐이 찾아간다고 한 '미스 스메라기'가 뭘 하는 사람인지 알고 있어서 더 그랬음.
미스 스메라기는 뱀파이어 헌터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정보상이었음. 돈보다 비싼 술을 들고 가면 더 좋아한다고 알려진 그녀는 때때로 뱀파이어들에게도 정보를 팔았음. 돈과 술만 들고 오면 그게 누구든 손님이라는 것임. 그녀의 수완을 싫어하는 인간들도 꽤 있었지만, 그녀에게 호의적인 뱀파이어들도 꽤 있는 데다가 헌터들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해주는 유용한 인물이었기에 대부분 눈감아줌. 특히 빌리는 사적으로 그녀를 좋아해서 자주 드나들 정도. 닐 일행이 거기를 갈 때는 보통 임무의 목적으로 가기 때문에 사비까지 털어서 쓰는 일은 극히 드물었음. 티에리아가 정보를 잘 모으는 편이기도 했고.
하지만 닐은 궁금한 게 있었기 때문에 찾아갔음. 비싼 고오오급 술까지 사들고. 미스 스메라기는 정말 반갑게 맞아주었음.
"그래서 뭐가 궁금하지? 두둑히 내는 걸 보니까 비싼 정보가 알고 싶은 모양인데?"
"맞아."
자리에 앉은 닐이 심각하게 깍지를 끼고 턱을 괴었음.
"크루지스 살육전."
받은 술병을 그 자리에서 따서 들이켠 스메라기의 표정도 덩달아 진지해짐. 그만큼 그 사건은 중요하고 비극적인 사건이었으니까. 전투가 아닌 '살육'이라고 불릴 정도로 잔인했던 사건.
"그 사건에 그라함 에이커란 뱀파이어가 연관되어 있어. 맞지?"
"...흐응."
"그자가 어떤 식으로 얽혀 있는 건지, 그 외에 더 얽힌 뱀파이어가 있는지도 알고 싶어."
술을 다시 들이킨 스메라기가 손등으로 입을 문질렀음.
"전에도 말했지만. 그 사건에 대한 정보는 정말 부족해. 너도 알다시피 생존자 중 하나인 알렐루야는 그 당시 사건을 잘 기억 못하지. 한 뱀파이어에게 감금되어 있었다는 것만 기억할 뿐."
"......."
"그 외에도 다른 생존자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조차도 불명... 들리는 소문으로는 살아돌아간 마을에서 오히려 괴물로 내몰려서 죽었다고도 하고. 그러니 정보가 더 안 모일 수밖에. 뱀파이어들도 그 사건에 대해선 정말 쉬쉬하고 있거든."
스메라기가 한숨을 내쉬었음.
"하지만 가장 최근에 그라함 에이커라는 뱀파이어에 대해 들은 건 있어."
닐의 표정이 심각해짐.
"뭐지?"
"그라함 에이커는 그 사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뱀파이어라고 해. 다 죽었는데 혼자만 살아남았다지. 그래서 뱀파이어들에게 제법 비난을 듣고 있다는 거야."
"...어째서?"
스메라기가 술을 들이켬.
"동족을 죽이고 살아남았다고 해."
"......"
"그날 아리오스가 사라졌다는 건 알고 있지? 그 아리오스를 가져간 자가 그라함이었어. 이것만큼은 확실한 정보야."
이것까지는 닐도 알고 있었음. 그라함 본인에게 직접 들었으니까.
"아리오스의 이전 소유자가 그라함, 그 자의 검술로 보이는 것에 난도질 당해 죽어 있었다고 하니까. 그리고 그는 그 아리오스로 동족들을 죽이고 살아남은 모양이야."
닐의 손에 힘이 들어감.
"...왜 그런 거지?"
"그것까지는 나도 몰라~."
스메라기가 손을 휘휘 저음.
"아까도 말했듯이 뱀파이어들은 그 사건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닫아버리니까. 최근 정보로 보건대 뱀파이어들끼리 죽였다는 게 부끄러운 걸까 싶기도 하고. 하여간 자존심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자들이니까 말이야."
"......"
"하지만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에이커 가문은 순혈의 피가 뚜렷해서 쉽게 몰아내기는 어려운 거 같아. 그 자신도 뱀파이어를 죽이고 살아남을 만큼 강했으니 더 할 말도 없겠지. 그래서 그냥 비난만 하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 그를 노리는 거면 아마 곧 기회가 오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반가운 소식이군."
닐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음.
"필요한 정보는 다 들었어. 그리고, 부탁 하나만 더 할게. 크루지스 살육전이나 그라함, 그 자에 관련된 정보가 들어오면 연락해줄 수 있을까?"
"음~ 올 때 이것 정도의 술만 준비해다 준다면야."
"어이, 그거 정말 비싼 거라고..."
닐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엇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음.
"좋아. 그럼 부탁해."
"오케이~ 그럼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손님. 조심히 가세요."
스메라기가 빙긋 웃으면서 손을 흔듦. 밖으로 나온 닐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걷기 시작함. 크루지스 살육전. 그라함.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대체 언제쯤 풀 수 있을까. 자신이 찾는 진짜 원수는 언제쯤 찾을 수 있는 걸까. 발걸음이 조금 느렸다.
(2018.05.04 추가)
헌터 일행이 쉬면서 틈틈히 정보를 모으고 있을 때였음. 세츠나의 상황은 그렇게 좋지 않았는데, 그날 이후 계속 불규칙한 발작이 이어졌기 때문임. 어떨땐 이틀 연속으로 닥치거나, 아침에 발작하고 쓰러졌는데 저녁에 또 발작하거나, 그러다가도 일주일 내내 멀쩡하거나... 매번 상황도 달랐는데, 그라함도 못 알아볼 만큼 의식을 못 차리거나, 아니면 대화는 가능한데 열만 계속 끓는다거나, 아니면 그라함한테 다가오지 말라면서 거부하거나. 단 하나 한결 같은 게 있다면 발작이 끝나고 나면 세츠나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다는 것임. 대화가 통할 때에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몸이 뜨겁다고, 전신에 힘이 안 들어간다고 확실하게 자기 증상을 얘기하는데 정작 그 시기가 지나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떠올리지 못함. 그라함도 세츠나의 이상이 계속되자 정보를 찾아봤는데 얻어낸 건 없었음.
제일 먼저 의심한 건 인간이 뱀파이어가 되면서 발생하는 부작용이었음. 하지만 그런 부작용이 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거고, 살아남지조차 못했을 거라는 게 지금까지 나온 문헌들의 정보였음. 그 시기를 넘긴 혼혈 뱀파이어들에게 발작이 찾아왔다는 정보도 없음.
발작만 지나면 세츠나는 멀쩡해졌고 기억도 사라졌지만, 그라함은 이 사태를 그만 둘 순 없었음. 뭣보다 그 시기의 세츠나가 너무 힘들어 보였으니까. 게다가 자신을 거부하는 것도 이상했음. 세츠나는 정말로 신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그라함에게는 고분고분했는데, 그 때만 되면 세츠나는 자신의 근처에 오지 말라고 함. 그러면서도 그라함이 피를 먹이면 얌전해지거나 진정되곤 했음. 그라함은 세츠나를 위해서라도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음.
그라함은 어느날 작정하고 성을 나섬. 그날도 세츠나가 발작하다가 쓰러진 날이었음. 그가 찾아간 건 닐이 찾아갔었던 정보상 스메라기. 안면은 한 번도 없었지만 빌리가 하도 얘기를 많이 해서 그런 인간 정보상이 있는 줄은 알고 있었음. 스메라기도 그라함에 대해 꽤 정보를 알고 있는 상태였는데, 크루지스 살육전의 생존자, 최근 인간을 데려옴, 뱀파이어들에게 미움 받고 있음 정도. 그리고 뱀파이어들 중에서는 유별난 괴짜라는 것도. 스메라기는 이번에도 차별 없이 손님을 맞음. 닐처럼 비싼 술부터 사들고 온 그라함이 상황을 설명함. 얘기를 다 들은 스메라기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병마개를 땄음.
"지금까지는 안 그랬었는데 갑자기 그런단 말이죠?"
"그래."
"흐음..."
스메라기가 술을 벌컥 들이켜곤 입을 닦았음.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온 질문은 그라함으로선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였음.
"혹시 당신 말고 다른 뱀파이어가 그 아이에게 접촉했을 확률은?"
그라함은 당장 고개를 흔들었음.
"그럴 리가. 그는 뱀파이어가 된 뒤로 쭉 내 성에만 있었다."
그라함은 확신할 수 있었음. 애초에 세츠나가 다른 뱀파이어가 자신에게 접촉하도록 그냥 둘 리도 없고. 그라함의 성에 있는 다른 시종들도 전부 뱀파이어였지만 그들은 세츠나에게 관심이 없었음. 그냥 자기 주인님이 아주 좋아하는 소년 정도였지. 스메라기는 또 질문을 던졌음.
"그럼 당신을 만나기 전에 접촉했을 확률은?"
그라함은 침묵했음. 그라함이 세츠나를 만났을 때 세츠나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고,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린 흔적은 없었음. 애초에 그라함이 변덕을 부려서 그를 뱀파이어로 만든 거지, 다른 뱀파이어들이 그라함처럼 그를 살려두었을 가능성은 극히 적었음. 피를 완전히 빨아서 죽였으면 모를까. 그라함은 그제야 자신이 자신과 만나기 전의 세츠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깨달음. 그는 왜 '제물'이 되어 버려져 있었을까? 세츠나는 가끔 인간들이 자신을 버렸단 얘기는 했지만 왜 버려졌는지에 대해 말한 적은 없었음. 부모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한 번도 한 적 없었고. 스메라기는 술을 더 마셨음.
"그거 알아요? 인간이 뱀파이어가 되기 전에 발작을 일으키다 죽는 이유요."
"...모르겠다만."
"인간 중에 그걸 연구한 사람이 있었죠. 그는 뱀파이어의 피와 타액이 아주 강한 마력을 띠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뱀파이어가 완전히 되지 못하고 죽은 이들에게는 백퍼센트의 확률로 두 명 이상의 뱀파이어의 타액 혹은 혈액이 검출되었다는 거예요. 그 힘들이 인간의 육체 안에서 충돌할 때 인간으로선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는 게 그가 내린 결론이었죠."
"......"
"뱀파이어가 인간에게 자신의 피를 주고 뱀파이어로 만들 확률은 아주 적지만, 여러 명의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리다가 원치 않게 피를 마시고 죽는 경우는 더러 있었죠. 이번에는 그 충돌이 뒤늦게 일어난 희귀 케이스라거나. 그는 인간들 중에서도 꽤 특이 체질 같으니까요."
그라함은 동요했음. 확실히 그럴 확률은 있었음. 세츠나의 피는 정말 달았으니까. 그냥 죽이기 아깝다고 생각한 뱀파이어가 정말 그라함 한 명이었을까? 그라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섬.
"좋은 정보 고맙군. 그럼 이만 실례하겠다."
"잠깐~"
스메라기가 떠나려는 그라함을 붙잡았음.
"뭐지?"
"요즘 당신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서 말이에요. 쓸 만한 정보를 드린 것 같은데, 팁이라도 얹어주지 그래요? 나중에 다른 정보가 더 생기면 곧장 알려드릴 테니까."
스메라기가 검지랑 엄지를 동그랗게 만들어보였음. 그라함은 피식 웃었음. 자신의 정보를 원하는 게 누구일지는 안봐도 뻔한 일이었으니까. 세츠나에게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라함은 어쩐지 그럴 수 없었음. 그 자신도 크루지스 살육전의 생존자였으니까.
"그런가. 그 뱀파이어 헌터인가?"
"글쎄요?"
스메라기는 돌려 말했지만 부정은 안했음. 그라함이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음.
"좋아. 더 말릴 아량은 없으니 들려주지. 크루지스 살육전이 벌어지기 전의 영지 상황을 혹시 알고 있나?"
"아뇨. 그곳에 관련된 자료는 정보 소실되었으니까요. 아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렇겠지. 뱀파이어들은 그 당시의 상황을 전부 비밀에 부쳤다. 종족의 수치라고 생각했으니까. 더군다나 그 사건의 범인이 활개를 치고 다녀도 죽이질 못하니 더 그렇겠지. 그는 우리 뱀파이어가 남긴 최대의 죄다."
그라함의 목소리가 낮아졌음. 스메라기도 덩달아 심각해짐.
"...그 자의 만행으로 헌터들이 죽고, 많은 뱀파이어들도 희생당했다. 내가 아리오스를 들고 있지 않았다면 나도 죽었겠지. 그자와 직접 겨루진 않았지만... 그 자가 그 사건에서 어느 정도의 힘을 얻었을지 알 수 없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것까지는 자세히 설명할 수 없다. 이 정보는 뱀파이어 귀족들 사이에서도 나를 비롯한 몇 명만이 알고 있는 거니까. 이 정보가 인간들이나 다른 뱀파이어들에게 흘러들어간다면, 분명 그걸 악용하는 자가 생기겠지."
한숨을 내쉰 그라함이 고개를 돌려 스메라기를 보았음.
"그러면 제 2, 3의 크루지스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거대한 생체실험장이. 그때가 되면 누구도 그들을 막지 못해. 인류도, 뱀파이어도 사이좋게 멸망하게 될 거다."
스메라기는 숨을 죽였음. 간단한 호기심으로, 돈을 바라고 접근할 만한 정보가 아니었음. 정보를 다루는 정보상이기에 스메라기는 그가 말을 아끼는 이유도 이해했음. 하지만 그래도 알아야 하는 게 있었기에, 스메라기는 떨리는 입을 벌려 물었음.
"...그 자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아직도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죠?"
"그래. 이 지상을 잘도 살아서 배회하고 있지."
"그 자의 정체가 대체 뭐죠?"
무거운 침묵이 잠시 이어졌음. 그리고 그라함은 하나의 이름을 내뱉었다. 스메라기는 절대로 그 이름을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음.
"알리 알 서셰스."
"인간과 뱀파이어 모두를 적으로 돌린, 미치광이 괴물의 이름이다."
이후 그라함은 성으로 돌아왔음. 세츠나는 혼자서 검술을 연습하고 있다가 그를 맞았음. 어제도 발작으로 힘겨워했으면서 낯빛은 아픈 것 하나 없이 말짱해, 그라함은 안도와 슬픔을 동시에 느꼈음. 식사를 마친 세츠나가 소파에 앉으려는 걸 그라함이 안아서 자신의 무릎에 앉힘. 세츠나가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음.
"무겁지 않나?"
"전혀. 소년은 언제나 깃털처럼 가볍거든."
"깃털이 들으면 서운해 하겠군."
세츠나가 그라함의 머리칼을 어루만졌음. 웃으면서 그 손을 끌어다가 그라함이 손끝에 하나하나 입맞췄음. 늘상 있는 여유로운 시간이었지만 단 한 사람의 속은 그렇지 못했다. 어느덧 굳은살이 박여가는 검지 끝에 입술을 가만히 대고 있던 그라함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뜸.
"세츠나."
"응?"
"괜찮다면, 여기 오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물어봐도 될까?"
세츠나가 팔을 움찔거렸음. 그라함이 곧 달래듯 덧붙였음.
"싫다면 억지로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그러는 거니까."
"......"
세츠나는 좀 망설이는 듯했음.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음. 아냐. 싫진 않아. 대답하는 목소리도 덤덤했음.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해줄 말이 없어."
"기억이 안 난다고?"
"응. 당신을 만나기 이전의 기억은... 잘 나지 않아."
그라함은 세츠나가 발작하고 나면 기억이 날아간다는 사실을 떠올렸음. 세츠나가 말을 이었음.
"하나 기억나는 건, 당신을 만나기 전에도 제물로 바쳐진 적이 있었다는 것 정도."
"...그때도?"
"그래. 그땐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었지만."
세츠나 말로는, 자신 말고 잡혀온 아이가 아주 많았다고 했음. 하지만 그 뒤로는 기억의 대부분이 날아갔고,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 혼자 남아 있었다고. 그라함이 세츠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음. 설마, 하면서도 머릿속에서 강해지는 가설을 부정할 수 없었음. 그라함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던 세츠나가 계속 설명했음.
"깨어나 보니 등 뒤는 폐허였고, 나 혼자 남아 있어서... 정신없이 뛰어서 마을로 돌아왔어. 그런데 사람들은 날 받아주지 않았어."
"어째서?"
"불길하다고 하던데. 다 죽은 곳에서 살아돌아왔다고."
세츠나가 고개를 덤덤히 까닥였음.
"괴물이라고."
그라함이 세츠나를 만났을 때도 그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음. 그런 아이에게 괴물이라니. 인간들이란. 드물게 혐오가 섞인 눈빛을 하고 그라함이 중얼거렸음. 인간들이 멍청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강한 혐오와 증오를 느낀 건 처음이었음.
"그래도 달리 갈 곳이 없어서, 마을에서 계속 숨어 지냈어. 그러다가 정신 차려 보니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었고... 그 뒤로는 당신도 아는 대로야. 이 근처의 숲에 버려진 거."
"...그런가."
그라함이 한숨을 쉬며 세츠나를 꼭 끌어안았음.
"미안하다. 안 좋은 과거를 떠올리게 했군."
"괜찮아."
세츠나가 그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렸음. 오히려 자신이 그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덕분에 당신이랑 만났으니까. 난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해."
"......"
"안 그랬다면 거기서 평생 괴롭힘 당하며 살았을 테니까. 난 지금이 좋아."
세츠나의 말은 진심이었음. 그것에 저도 모르게 웃던 그라함이 세츠나의 머리를 쓰다듬었음. 더 묻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이것만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음.
"소년."
"응?"
"미안하지만 한 가지만 더 묻겠다. 제물로 끌려갔던 곳이 어디인지 기억 나나?"
"글쎄... 나, 내가 살고 있던 마을의 이름도 잊어버려서."
세츠나가 곰곰히 생각하며 그라함의 어깨에 뺨을 붙였음.
"...떠오를 거 같기도 하고."
"그런가. 힘들면 무리하게 떠올리지 않아도,"
"아."
작게 터진 탄성에 그라함은 말을 멈췄음. 세츠나가 품 안에서 고개를 들었음. 말갛게 빛나는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음.
"크루지스."
불길한 예감은 그때 현실이 되었다.
"크루지스였어. 내가 끌려갔던 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