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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궁)악몽을 불사르고
Caption 자살과 시체 등 트리거를 유발할 수 있는 잔인한 묘사가 앞부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처의 진명이 나옵니다. 소년의 눈앞에서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그것은, 그가 무척 사랑했던 어머니의 형상이었다. 발밑으로는 검은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왔다 사라지고,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진 여인은 바닥을 온통 물들이고 녹듯이 가라앉아가면서도 미동이 없다. 소년은 뛰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ㅡ, ㅡ!?” 그녀를 부르는 외침이 닿기도 전에 지워졌다. 아무리 내지르고 악을 써도 제 귀에조차 들리지 않았다. 잠시 주춤하던 소년이 고개를 거칠게 흔들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뛰고 속도를 올려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물에 녹는 소금 기둥처럼 여인의 시신이 점차 무너지며 형체가 흐려졌다. 소중한 가족,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어머니. 소년은 피를 토할 듯 콜록이면서도 그저 달렸다. 높게 올려묶었던 청록의 머리칼에서 붉은 끈이 풀리며 너머로 흩날려 사라져갔다. “ㅡ!!!” 누군가가 그의 발을 붙들었다. 소년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뒤돌아본 그곳엔 가슴에 칼이 꽂힌 사내가 피눈물을 흘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짓밟히고 으스러진 손가락이 소년의 가는 발목을 뽑을 듯이 잡아당겼다. 네 어미는 그리 소중하면서, 혈족을 어찌 그리 쉽게 베었단 말이냐!! 금수만도 못한 놈 같으니! “……!!” 용서 못한다, 용서 못해…! 죽어서도 어찌 잊을까보냐!! 소년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건 오로지 그의 말이 전부 옳았기 때문이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소년의 팔을, 손을, 목을 차갑게 덜그덕거리는 손들이 들러붙어 잡아당겼다. 썩어 문드러져가는 살점의 악취. 사이에 구더기가 끼어 꿈틀거리는 뼈마디. 죽었으나 죽지 못하는 것들이 그를 휘감고 살점을 파고들었다. 비명을 질렀지만 그마저도 너덜너덜한 손에 막혀 나오지 않았다. 장군, 장군! 제발 자비를! 제 친구를 돕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게 잘못입니까? 대답해주십시오, 장군… 장군… 네 전쟁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길 바라. 머릿속엔 끊임없이 비명이 울려퍼지고 피냄새가 풍기지 않는 곳 없으며 발 닿는 곳마다 시체가 널 저주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악취를 풍길 거야…… 장군, 제발!! 살려주십시오! 장군!! 그만해!!!! 여전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소년을 산채로 찢어발길듯이 당겨대는 손은 아팠고, 드러난 살갗엔 구더기와 긁힌 상처들에서 흐른 피가 범벅이었다. 소년은 소리없이 흐느끼며 몸부림쳤다. 누군가 도와줘,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날 살려주세요!! 이가 전부 부러진 사내가 그의 팔을 마구 씹어댔다. 소년이 고개를 필사적으로 돌리며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 제발 살아계시다면 절 보호해주시고, 죽으셨다면 이 원혼들을 쫓아주세요. 어머니, 어머니…… 그리고 그토록 바라던 눈을 소년은 발견했다. 마치 그를 그대로 눌러터트려버릴 것처럼 거대한 형상으로, 소년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ㅡ너를, 아, 안 돼, 듣고 싶지 않아, 역시, 낳지 말았어야ㅡ 그것만은 듣고 싶지 않아!!! 퍼석 무언가가 여인의 머리를 관통했다. 눈이며 입술이 괴이하게 일그러지며 급속히 부풀기 시작하다가 끔찍한 비명과 함께 사라졌다. 하나, 둘, 여기저기서 치솟는 불꽃이 썩어가는 육신을 녹이고 저주와 비난을 퍼붓던 외침을 태웠다. 화살처럼 날카롭고 깃털처럼 예리하게 날아드는 그것은 오로지 소년의 몸에 닿아서만 부드럽고 따뜻하게 빛났다. 상처를 치유하고 들러붙은 불결한 것들을 닦아주는 상냥한 손길이었다. “ㅡ자, 이제 악몽은 끝이다.” 나직하게 속삭이며, 그를 부드럽게 끌어안는 보이지 않는 손길. 그 순간, 꿈에 빠져 허우적대던 소년은 청년 정명엄이 되었다. 잔잔한 고요 속에서 두 손이 그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빛이 어둠을 점차 몰아내고 있었다. “일어날 시간이야, 마스터.” “……헉!” 정성공은 눈을 번뜩 떴다. 그늘져 어두운 시야에 희푸른 은발 한가닥이 유독 가깝고 또렷했다. 눈을 깜빡이던 정성공은 그제야 주유가 위에 올라타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았다. “…아…처……?” “아아. 잘 되었나보군. 다행이다.” 그의 안색을 살피듯 찬찬히 정성공의 눈을 들여다보던 주유가 비로소 안도한 듯 웃었다. “……나는……” “전장의 장군이라면 자주 겪는 일이지.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의식의 혼란과 압박, 통제 불가능한 감정의 폭발. 이번엔 그게 좀 길었을 뿐이야.” 영월의식 때문일지도 모르겠군. 마력은 괴이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 설명을 덧붙이며 주유는 가만히 정성공의 뺨을 소맷자락으로 문질러 닦았다. 정성공은 그제야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음을 깨달았다. “…미안하다. 추태를 보였군…” “추태랄 것도 아니다. 말했잖나. 전장의 군인이라면 자주 겪는 악몽일 뿐이야. 어차피 방엔 너와 나밖에 없으니, 안심하고 천천히 숨부터 가라앉히도록 해.” 속삭이듯 낮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는 힘이 있으면서도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얌전히 그의 말대로 숨을 고르며 정성공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서번트는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하였던가. 아침에 보았던 무장의 상태 그대로였다. “…이젠 괜찮다. 방엔 언제 들어온 거지?” “음? 아아. 멋대로 들어온 건 사과하마. 시간 상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네가 힘들어하는 기척이 느껴지자마자 뛰어들어왔다. 흔들고 불러도 듣지 않길래 조금 과감한 수를 썼지.” “과감한 수라면,” 주유가 곤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 꿈에 잠시 접촉했다. 서번트와 마스터는 정신이 이어져 있는 관계. 더군다나 나에게 보일 정도의 강렬한 꿈이라면 강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아. 역시 너다운 판단이군. 빠르고 정확하고… 아주 효과적이었어.” 정성공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악몽에서 그를 구해준 따뜻한 불꽃도, 다정한 부름도 전부 주유의 것이었다니. 마음이 한결 더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 말해주니 내가 감사를 표해야겠군. 멋대로 심상을 들여다본 걸 꾸짖어도 난 할 말이 없는데 말이야.” “지독한 꿈이었으니까. 날 꺼내주었는데 어찌 비난할 수 있겠—” 정성공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몸을 일으키려는 주유를 붙드는 손이 더 급했기에. 얼마나 세게 당겼는지, 그의 행동을 예상치 못한 주유가 저항도 못하고 속절없이 정성공의 품으로 무너져내렸다. 돌발 행동에 커다래진 눈이 주인을 향했으나, 어쩐지 정성공은 자신이 더 놀라고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아, 이건…… 그러니까……” “……”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잠시 어떻게 됐었던 모양이야.” 그가 한숨을 내쉬며 다른 손으로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주유가 흘긋 제 팔을 살폈다. 정성공은 아직 의식하지 못했지만, 말과 달리 그의 손은 여전히 주유를 움켜쥐고 있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주유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때까지도 정성공은 자신이 주유를 놓지 못했단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밤이 너무 평온해서 노곤해지던 참이었다. 정신을 집중하느라 좀 지치기도 했고.” 무슨 말이냐 물어보려던 정성공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비녀를 뽑고 머리를 푸는 사이 마력으로 유지되던 무장이 빛가루로 변하며 삽시간에 사라졌다. 완갑까지 내려놓은 그에겐 기린이 수놓아진 흰 옷만이 남아 있었다. “……아처…?” “설마 이 늦은 시각에 침상의 손님을 매정하게 내쫓진 않겠지?” 농조로 물으며 주유가 그의 옆에 자리잡고 누웠다. 고개를 돌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정성공이 그제야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즉 남아 있던 일말의 불안감은 이제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네가 옆에 있어준다면 더 바랄 게 없지. 오히려 부탁하고 싶을 정도다.” “다행이군. 뭐, 서번트는 잠을 자지도 꿈을 꾸지도 않지만… 역시 한때 인간이었던 몸이니까. 눕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리는군.” 엷게 미소지은 주유가 눈을 내리감았다. 길게 뻗은 아름답고 풍성한 속눈썹에 잠시 시선을 뺏겼던 정성공이 문득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마치 남의 것처럼, 그를 여전히 붙들고 있는 제 손이 그제야 시야에 들어왔다. 굳이 말하지 않은 것은 주유의 세심한 배려였을 터. 무어라 말하려던 정성공이 도로 입을 닫았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아처.” “응?” “…괜찮다면, 안고 있어도 될까?” 느리게 뜨인 금안이 천천히 그의 주군을 향했다. 주유는 책사이기 전에 장수였다. 생사가 수없이 갈리는 전장의 공포를, 그리고 누구에게도 등을 맡길 수 없을 때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알고 있었다. 아군을 믿고 있노라 말하면서도 어느 한 구석에는 여전히 곁을 용납치 않는 의심이 얼룩처럼 남아 있는.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서로를 지킬 수 있는 시대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솔직하게 저를 원하는 그의 마음을 아처는 외면할 수 없었다. 동정도 자비도 아니다. 그저, 저를 비추는 그 붉은 눈동자가 그런 빛깔을 띠지 않았으면 해서. “…물론.” 그것을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있어서. “네가 만족할 때까지 곁에 있을 테니까. 명엄.” 단련된 팔이 그를 품에 가득 끌어안았다. 저보다 한참 넓은 등을 마주안으며 주유는 눈을 감았다. 부디 남은 밤이 주군에게 잔인하지 않기를 하늘에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