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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아니라 썰로 이어집니다. 주의해주세요.
리랴님(@ryria_HQ)의 허락을 받고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성관계 묘사가 있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와 성인의 관계를 다루는 트리거 요소를 기반으로 합니다.
썰의 특성상 이하는 반말로 진행되므로 양해바랍니다.
커티 마네킹. 뱀파이어들 중에서도 실력이 월등히 뛰어난 마법사로, 뱀파이어들 중에도 그녀를 존경하던 자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으며, 유일한 친구인 스메라기와만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음. 그나마도 뱀파이어와 인간들에게 유용할 정보만을 전달하는 커티의 일방적인 연락이었을 뿐, 평범한 인간인 스메라기는 먼저 연락을 취할 수는 없었음.
"생각해봤는데, 그 이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
잠시 휴식을 취하던 세츠나가 닐의 말에 고개를 들었음.
"어디서?"
"헌터들끼리 대화할 때 말이야. 미스 스메라기를 통할 때도 있지만, 헌터들이 만나서 직접 교류하고 정보를 공유할 때가 많거든. 누가 누구를 죽였다더라, 누가 누구한테 당했다더라. 어떤 뱀파이어들이 아주 악질이더라 같은."
닐이 말하며 안대 위를 문질렀다.
"아주 뛰어난 마법사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꽤 오래 전에 모습을 감춘 걸로 알고 있거든."
"언제쯤?"
"한 삼백 년 전?"
세츠나가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음.
"...그라함의 나이가 이백칠십오인데."
"그럼 적어도 오백 살은 넘었겠네. 그런데 그 복잡한 숫자를 잘도 기억하는구나."
"그가 알려준 거니까."
"그러냐."
그라함도 그렇지만 이녀석도 만만치 않구만. 닐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음.
"아무튼... 왜 종적을 감췄는지는 모를 일이야. 그를 죽이려고 했던 뱀파이어 헌터에게 당했다느니 둘이 같이 죽었다느니 말이 많았는데."
"그는 왜 죽이려고 한 거지?"
"헌터가 뱀파이어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야 뻔하지. 돈이 궁하거나, 뱀파이어에게 당했거나."
세츠나가 눈을 찡그렸음.
"...뱀파이어들이 정말 그렇게까지 인간들을 해치나?"
"그렇다니까. 그라함인가 하는 녀석은 정말 별종이라고."
"...하지만 약속을 먼저 깬 건 인간들이었잖아."
"약속?"
닐이 반문했음. 세츠나가 옛날의 일곱 무기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이 해야 하나 망설였을 때였음. 다행히 닐이 먼저 입을 열어서 그의 고민을 덜어줌.
"설마 그 일곱 날개와 오랜 약속에 관련된 이야기야? 그런 게 사실일 리가 없잖아."
"일곱 날개?"
"천사의 일곱 날개. 뱀파이어를 죽이는 일곱 무기를 그렇게 불러. 네가 가진 엑시아도 그 중 하나고."
그라함이 예전에 일곱 무기에 대해 이야기해줄 때 천사의 이름을 본따서 붙였단 얘기를 했었기 때문에 세츠나는 바로 명칭을 이해했음. 닐이 심드렁하게 턱을 괴었음.
"티에리아에게 언뜻 듣긴 했었지. 하지만 인간이 먼저 약속을 깬 건 뱀파이어가 인간들을 공격했기 때문이잖아. 애초에 인간을 지키라고 준 무기라고? 인간들은 그걸 정당하게 사용했을 뿐이야."
"내가 들은 이야기에선 인간들이 먼저 뱀파이어를 공격했었다고 했는데."
"그거야 뱀파이어가 한 이야기니까 그렇지. 보통 그런 건 자기가 유리한 방향으로 얘기한다고."
"그럼 당신의 이야기도 똑같지 않나.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꿔서 얘기를 전해온 거 아닌가?"
"......젠장. 반박을 못하겠네. 그건 생각 못했군."
닐은 생각보다 쉽게 수긍했음. 세츠나가 엑시아의 날을 가만히 내려다봄. 옅어질 것 같던 붉은 빛이 다시 강해지고 있었음.
"...물론 당신이나 다른 이들처럼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도 있겠지. 그것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어. 남을 해쳤다면 종족을 불문하고 벌을 받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지만?"
세츠나가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문제를 더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서로 이해하고 화해할 수는 없는 걸까."
"......"
"전부 한 번에 풀 수는 없겠지만... 다 풀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조금씩 노력한다면, 아주 먼 훗날엔 두 종족이 예전처럼 서로를 사랑할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어려운 고민인데, 그건."
닐이 쓰게 웃었음.
"그래도 용케 그런 걸 생각하는구나."
"...있으니까."
"응?"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라함을."
세츠나가 살짝 눈을 내리감았다.
"뱀파이어가 아니어도 사랑했겠지만... 내게 두 번째 삶을 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내가 괴물로 몰린 것도 뱀파이어 때문이었지만... 그래도 그라함이 뱀파이어가 아니었으면, 인간이었으면 하고 바라진 않아."
"......"
"모든 사람들이 다 나같을 순 없겠지. 그들에게 소중한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자들에게 사랑을 강요하는 게 웃긴 일인 줄도 알아. 하지만... 그래도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글쎄다. 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서."
닐의 어투엔 비꼬는 기색은 없었음. 세츠나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음. 복수는 했다지만 뱀파이어에게 가족을 잃은 그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좀 잔인하다 싶었음. 뒤늦게 세츠나가 고개를 떨어트리며 덧붙였음.
"미안."
"그럴 건 없어."
닐은 고개를 흔들었음.
"내가 제일 증오하던 녀석은 쓰러트렸으니까. 그리고 뱀파이어들 중엔 나쁜 녀석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납득했거든."
그게 그라함의 이야기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음. 그는 그라함과 함께 같이 싸우기도 했었고, 지금은 그를 위해서 동행도 해주고 있으니까. 세츠나는 짧게 덧붙였음.
"고마워."
"뭘. 그보다 슬슬 훈련 마저 할까?"
세츠나가 고개를 끄덕였음. 커티를 찾으면서 세츠나는 닐에게 엑시아를 다루는 법을 배우고 있었음. 일곱 무기는 마력을 불어넣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 처음 가르쳐줄 때 닐은 세츠나의 무시무시한 마력량에 놀랐지만 곧 세츠나가 혼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납득함. 세츠나는 닐이 가르쳐준대로 무기에 조금씩 마력을 불어넣음. 서툴렀지만 이제 조금씩 마력을 옮기는 법을 알아가고 있었음.
"나도 엑시아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서 다루는 법은 몰라. 티에리아 말로는 엑시아는 흡혈귀를 죽이는 흡혈귀라고 하던데. 그 말대로면 그 녀석이 오히려 네 기력을 잡아먹을 수도 있어. 훨씬 다루기 까다롭다는 거지."
"......"
"하지만 모르는 것보단 익히는 게 좋아. 어쨌건 너는 그 검의 주인이니까. 언젠가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세츠나는 대답하지 않았음. 닐의 대답이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므로. 하지만 세츠나는 훈련도 멈추지 않았음. 옅게 땀이 배인 눈가를 찡그린 세츠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음.
"못해낸다면 그에게 받은 목숨의 의미가 없어."
뒤덮인 마력으로 일렁거리는 은의 날. 영롱한 붉은색으로 빛나던 날에 일순 맑은 녹색이 섞였다가 흩어졌다.
세츠나와 닐은 생각보다 쉽게 커티의 자취를 찾음. 닐은 한참은 더 헤매야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세츠나가 그들을 막겠다며 달려든 누군가의 기척을 감지했기 때문이었음. 아무리 봐도 인간처럼 보였지만, 세츠나는 바로 그가 혼혈이라는 걸 알아챘다. 엑시아의 날에 베여도 보통 검에 베인 것처럼 나아버리는 재생력과 세츠나에 뒤지지 않는 힘을 갖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세츠나와 닐이 그를 완전히 쓰러트리기 전에 뛰어든 뱀파이어가 남자의 얼굴을 장렬하게 후려쳤음. 죽일까 말까 하고 있던 세츠나와 닐이 멍청하게 둘을 바라보는 사이 청년이 코피를 철철 흘리면서 벌떡 일어섰음.
"여전히 너무 터프하신 거 아닙니까! 물론 그게 매력이긴 하지만... 크헉!!"
"시끄럽다. 목줄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
뱀파이어의 주먹이 다시 그에게 명중했음. 저만치 날아간 청년이 괴상한 비명과 함께 벽에 처박혔음. 손을 가볍게 털며 돌아선 여인이 그들을 돌아봄. 스물 중후반처럼 보이는 인상의 미인이었음.
"시비를 털어서 미안하게 됐군. 자네들이 은의 무기를 들고 오니까 적으로 오인하고 덤벼든 모양이야."
"커티! 난 당신을 생각해서... 푸엑!"
뱀파이어가 손가락을 퉁기자 허공에서 나타난 물벼락이 그를 덮쳤음. 닐이 얼빠진 얼굴로 그를 보고 있다가 겨우 말을 붙였음.
"당신이 커티 마네킹인가?"
"그렇다만. 나를 알고 찾아온 건가? 설마 정말로 나와 싸울 작정으로 온 거라면 그냥 얌전히 돌아가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커티는 전혀 긴장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음. 세츠나와 닐이 한꺼번에 덤벼도 절대로 당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는 것처럼. 세츠나가 뽑아들었던 엑시아를 아래로 늘어뜨렸음.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의 소개로 왔다."
"스메라기? 그 아이가 왜 내 거처를..."
"미친 뱀파이어를 원래대로 돌리는 방법을 알고 싶어. 당신이면 알지도 모른다고 했다."
거두절미하고 나온 용건에 커티가 눈을 찡그렸음. 닐은 그 표정에서 뭔가 불길한 걸 읽어냈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런 용건이라면 더욱 유감이군. 내가 들려줄 건 하나뿐이니까."
"...설마. 아니겠지."
"아니. 인간, 네가 생각한 게 맞을 거다."
커티가 세츠나에게 시선을 옮겼음. 세츠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없어. 미친 뱀파이어를 완벽히 되돌리는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그때, 뱀파이어 귀족 회의는 뱀파이어들을 그라함의 성에 파견함. 그라함의 살해를 위해서. 그는 너무도 위험한 존재. 알리의 뒤를 이은 뱀파이어들의 오점이 되기 전에 죽여야만 했음. 그러나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마법에 능통한 빌리가 그를 지키고 있었고, 또한,
"으아아아악!!"
"바체의 바탄이라고...!? 뱀파이어 헌터가 왜 이런 곳에ㅡ 으아아아아악!!"
티에리아와 할렐루야 또한 그곳에 있었다는 것.
"아직은 안 되지!! 아직은 말이야!!"
"이곳은 반드시 사수한다!!"
큐리오스를 든 할렐루야와 바체의 티에리아가 견고하게 지키는 성. 그 아래서 그라함의 비통한 절규가 점점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잠시 후 세츠나와 닐은 커티의 집으로 들어와 있었음. 그라함이 어떻게 알리의 피를 마시게 됐는지의 경위는 짧게 설명한 이후. 청년은 뱀파이어 헌터를 커티와 함께 둘 수 없다면서 커티의 곁에 있을 거라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문 밖이나 지키라는 커티의 말을 듣고 울상이 됨.
"그래도... 하지만..."
"네가 아니면 누가 밖을 지키지? 믿고 맡길 자는 너뿐이다만."
"개미 한 마리도 얼씬 못하게 지키겠습니다!!"
쏜살같이 청년이 밖으로 튀어나갔음. 말 잘 듣네.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던 닐이 흘긋 세츠나를 보았음. 아까 커티의 말을 들은 뒤로 창백해졌던 낯빛은 좀 나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상태가 안 좋아보였음. 커티가 책이 가득한 책장을 지나서 묶인 종이다발을 꺼내들었음.
"그보다 스메라기가 용케 너희를 내게 보낼 생각을 했군. 내가 그 아이에게 알려준 건 뱀파이어의 피와 마력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단 정도 뿐이었는데."
"맞아. 그녀도 희망에 걸고 우리를 보낸 거야."
"희망이라."
쓰게 웃은 커티가 종이를 펼쳐서 넘겼음.
"나도 그 희망에 걸어봤던 적이 있었지. 지금으로부터 오백 년 전의 이야기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미친 뱀파이어는 알리가 결코 최초가 아니야."
힘을 갖고 싶다는 욕망에 눈이 멀어 동족의 피를 마시는 뱀파이어도 있었지만, 지금의 그라함처럼 어쩔 수 없는 사고로 미치는 뱀파이어들도 있었다. 커티는 그런 뱀파이어들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방법을 계속 연구해왔었음. 그리고 뱀파이어 귀족들에게도 협력을 요청했지만 웃기게도 그들은 그 요청을 거절해버림. 힘을 바란 자의 결말이라며,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며. 그냥 죽여버리면 되는 것에 힘을 뺄 필요는 없다며. 커티는 분노했고, 귀족들의 작태에 실망해서 뱀파이어 사회에서 종적을 감춤. 인간들을 어리석다고 비웃고 조롱하지만, 자만심에 취해서 자기 동족조차 돌보지 않는 그들은 과연 옳은가? 커티는 연구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환멸을 버릴 수 없었음. 그래도 연구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자신조차 하지 않으면 이 비극은 계속 이어질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도중에 커티는 뭔가를 깨닫고 절망했음.
"뱀파이어는 대개 인간보다 강한 마력을 타고난다. 육체도 그 마력을 버틸 수 있도록 진화되었지. 인간보다 뛰어난 신체 능력, 수명, 회복력. 이 모든 것이 전부 마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커티가 어딘가를 펼쳐서 내밀었음. 뭔가 방대한 내용이 적혀 있어서 닐과 세츠나는 바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 커티는 설명을 이어갔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피를 필요로 한다. 자신의 마력을 죽이기 위해서."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닐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음.
"다시 말하면 뱀파이어의 마력에 인간의 피는 독이라는 거다. 인간은 마력을 많이 갖고 태어날 수 없는 게 아니라 자신의 피가 마력을 깎아내기 때문에 일정량 이상 가질 수 없는 거야. 반대로, 뱀파이어의 피는 인간보다 마력에 취약하다. 혼혈 뱀파이어가 된 인간의 마력량이 늘어나는 것도, 인간의 피가 뱀파이어의 피와 섞여 약해지면서 마력을 많이 깎아낼 수 없게 됐기 때문이야. 하지만 동시에 그의 신체나 피가 완전히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혼혈은 뱀파이어의 피를 마셔도 미치는 일은 없지."
그래서 뱀파이어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피를 필요로 한다. 자신의 넘치는 마력량을 제어하기 위해 인간의 피를 먹는 것. 그들이 인간처럼 하루 세번 꼬박꼬박 피를 마실 필요가 없는 이유도 그것.
"좀 어렵지만, 뱀파이어가 뱀파이어의 피를 마셨을 때 미치는 이유는 알겠군. 마력은 넘치는데 그걸 제어하거나 막아줄 힘이 없으니 이성이 먼저 망가지는 건가."
"그래. 알리가 뱀파이어의 피를 마실 때 인간의 피를 섞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리고 알리가 인간의 피를 섭취하지 못하자 점점 미쳐갔던 이유도 그거지."
침착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츠나가 물었음.
"...그럼 인간의 피를 다시 마시게 하면... 그걸로는 해결이 안 되나?"
커티가 한숨을 내쉬었음.
"뱀파이어의 피가 섞였을 때 뱀파이어의 이성이 망가지는 속도는 인간의 피로 희석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뱀파이어의 의식을 하루 되돌리려면, 최소 백 명 이상의 성인 인간이 필요해."
"잠깐. 뭐라고? 몇 명?"
"최소 백 명. 정확하게는 백삼십칠 명과 어린 아이 한 명분의 피가 필요하다. 물론, 그 피를 한 번 마신다고 끝이 아니지. 계속 마셔야 해."
"...젠장. 이건 농담을 할 규모가 아니야."
세츠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음.
"...그만큼 마셔도 하루밖에 유지를 못한다는 건가."
"그래. 몸의 균형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니까. 끊어진 실을 이어붙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세츠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음. 정말 이게 끝인가. 그라함을 되살릴 방법 같은 건 아무것도 없는 건가. 긴 침묵이 흘러갔음. 잠시 한숨을 내쉬던 커티가 잠시 망설이다가 손가락을 튕김.
"...하지만... 그래도 도전하고 싶다면, 그의 목숨이 온전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넘겨줄 수 있다."
세츠나가 번쩍 고개를 들었음. 하얗게 마력이 반짝인 순간 커티의 손에 새끼 손가락만한 병이 하나 떨어졌음.
"시험용으로 만든 광기를 억제하는 약이다. 어디까지나 시험용이지만."
"그래도 있다는 게 어디야!!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지?"
"무슨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니까. 아까 말했지. 끊어진 실을 이어붙일 수는 없다고. 이건 끊어진 두 실을 억지로 묶어서 잇는 방법이다. 인간의 피의 힘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켜서 뱀파이어의 마력을 깎아내리는 거지."
커티가 진지한 표정으로 세츠나를 보았음.
"그렇기 때문에 인간. 네가 먹어야 한다."
세츠나가 흠칫 놀랐음.
"평범한 인간에게 먹이는 것이 더 좋았겠지. 그러면 목숨을 위협받지 않아도 될 테니까."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저걸 먹는 게 세츠나에게 위험하단 뜻인가?"
"그래. 그의 피를 변형시키는 거니까. 운이 좋으면 혼혈로서 얻은 능력들은 보존될 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네 몸에서도 뱀파이어의 마력을 깎아내는 작용이 계속 일어나겠지. 뱀파이어에게 그것은 필수적인 것이라 아무것도 못 느끼지만 인간은 달라. 어쩌면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살기 위해 피를 마실 때마다 네 몸의 피가 그들의 마력을 죽일 테니까."
"......"
"그래도 감당할 수 있나? 그를 위해서 네 남은 삶을 전부 바칠 준비는 되어 있나?"
닐은 세츠나를 보았음. 이런 건 너무 잔인하지 않나. 그라함이 그를 낫게 해주겠다고 목숨을 건 게 바로 며칠 전이었는데. 이번엔 그가 또 그라함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니. 하지만 세츠나는 손을 뻗었음. 망설임 하나 없이. 닐은 순간 깨달았다.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인간을 택하라는 자신의 말을 거절했던 것처럼.
세츠나는 자신의 신을 선택하고 말 거라고.
"답은 이미 나와 있어."
세츠나가 담담히, 단호히 말을 이었음.
"하겠어. 전부 받아들이겠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그래. 그를 위해서라면."
잠시 한숨을 내쉰 커티가 병을 내밀었음. 미묘하게 긴 시간 속, 커티가 내민 병이 세츠나의 손에 느리게 내려앉았음.
"...이걸 마시고 그라함에게 네 피를 마시게 해라. 그도 아마 평생 너의 피를 마셔야할 거다. 평생을 네게 매달려 살아야겠지. 목숨을 구해준 자에게 그 정도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커티는 고개를 흔들곤 돌아섰음.
"...만약 내 연구가 실패해서 너의 피를 마셔도 그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그때는 반드시 그를 죽여라. 너의 검으로."
"......"
"그것이 최선이다. 그가 고통받는 건 너도 원치 않겠지. 정말로 그를 사랑한다면 네 손으로 안식을 줘라. 그게 네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일 거다."
커티의 어조는 진지했음. 병을 만지작거리던 세츠나가 닐에게 고개를 돌렸음.
"당신도 뭔가 물어볼 게 있지 않았나?"
"...아아. 그랬지."
닐이 한숨을 내쉬었음. 커티도 세츠나가 대답하지 않았음을 알고 눈을 찡그렸지만 더 말하진 않았음.
"용건은 다 끝났어?"
"그래."
닐이 알렐루야에 대해 설명함. 알리에게 실험을 당했고, 이중인격의 혼혈이 되었으며, 지금은 주인격이 아예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커티는 눈을 찡그렸음.
"특이한 경우군. 알리의 실험이 여럿을 망칠 줄이야. 알리는 그라함 에이커에게 죽었다고 했지?"
"맞아."
"그럼 잘됐군. 기다려. 해결될 거다."
닐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음.
"그녀석은 처방 같은 거 없어?"
"없다. 그리 걱정할 일도 아니야. 아, 한 가지 해둘 말이 있군. 지금 깨어 있는 인격은 좀 과격하다고 했었지?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해라."
"어째서?"
"혼혈이 된다고 모두 이중인격이 되진 않아. 저 아이를 봐도 알겠지. 하지만 다른 인격이 생겼다면, 그건 뱀파이어의 피에 의한 작용일 확률이 높아. 그의 마력이 알렐루야란 자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단 거지."
닐은 그라함이 세츠나에 대해 언뜻 얘기했던 걸 떠올렸음. 세츠나도 알리의 타액 때문에 고생했었다고 했었음. 그거랑 비슷한 상황이려니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알리가 사망했고, 그를 유지하던 마력이 사라졌을 거다. 원래대로라면 뱀파이어 쪽의 인격이 없어졌어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그는 그 인격을 살려놓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서 마력을 그에게 쏟아붓고 있는 모양이다. 뱀파이어의 피를 충분히 마셔서 마력이 회복된다면 그도 깨어날 테지. 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몸이 다치기라도 했다간 충격으로 둘다 죽어버릴 수도 있다."
"젠장. 이쪽도 심각하잖아. 빨리 돌아가야겠어, 세츠나."
"그래."
고개를 끄덕인 세츠나가 짧게 고맙다고 말하곤 벗어나려 함. 순간 커티가 뒤에서 덧붙임.
"잊지 마라. 미친 뱀파이어는 괴물에 불과하단 걸."
"......"
"죽임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를 위해서라도."
세츠나는 커티를 돌아보았음. 그리고 옅게 웃었다.
"그는 괴물이 아니야. 나의 신이지. 언제까지나."
그리고 그는 집을 나섰음. 닐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그를 따라 나갔음. 뒷모습을 바라보던 커티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올렸음.
"......신이라..."
"그건 무슨 말입니까?"
커티가 눈을 삐뚤게 뜨며 그를 보았음. 청년이 어느새 창턱에 팔을 걸치고 있다가 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움찔하고는 투덜거렸음.
"아니, 이제 괜찮잖습니까? 얘기도 다 끝난 것 같고, 밖도 조용한데요."
"......"
"그보다 신이라뇨? 아까 찾아온 녀석들, 선교자들이었습니까? 아무리 봐도 헌터들처럼 보이던데요."
"......"
"커티이~? 저 말하고 있는데요? 듣고 계십니까아~?"
패트릭이 목소리를 높였음. 그러건 말건 뚱하게 그를 바라보던 커티가 문득 피식 웃었음.
"...하긴. 이미 하나 있었는데 내가 바보 같은 생각을 했군."
"뭘요?"
"인간이 뱀파이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가능할까, 같은 생각."
청년이 금세 활력이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음.
"그럼요! 가능하다고요! 제가 얼마나 커티를 사랑하는지 말씀드렸지 않습니... 으억!"
"시끄럽다. 적당히 해둬."
커티가 던진 종이다발이 정확하게 그의 이마에 명중했음. 투덜거리면서도 이마를 문지르며 종이다발을 조심스럽게 집어드는 그를 보며 커티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음. 자신을 죽이러 왔다가 오히려 반했다며 구혼을 하고, 결국엔 자신의 곁에 몇 백 년이 넘도록 남아버린 헌터를.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청년에게 그녀가 말을 던졌다.
"패트릭."
"네?"
"너는 기적을 믿나?"
눈을 깜빡거리던 패트릭이 웃었음.
"그럼요. 저와 커티가 만난 게 기적 아니겠습니까."
"...진지한 말을 기대한 내가 바보지."
혀를 차면서 고개를 돌린 커티가 세츠나를 떠올렸음. 하지만 만약 그도 같다면. 서로를 만나서 벌어진 기적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면.
"......그들에게도, 있었으면 좋겠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