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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지크)내가 오늘 죽을지 모르니까
Caption 1부 내가 오늘 죽는다면 에서 이어집니다. 육체적 상해, 치명상, 유혈, 성관계 언급, 캐릭터의 죽음 암시 등의 트리거 워닝 요소가 있습니다. 게임 스토리와는 무관한 오리지널 설정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이제 움직이셔도 됩니다.” 반쯤 졸고 있던 지크하트는 낯선 목소리에 눈을 떴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청년이 근처 협탁에 차를 놓아주었다. 멍자국이 깨끗하게 사라진 팔을 내려다보던 지크하트가 느리게 손목을 풀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줄곧 제 것이 아닌 듯 삐걱거리던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흠. 나쁘지 않네.” “다행이네요. 그보다 마족한테 당하신 건가요? 마족이 안 나타난지도 꽤 시간이 흘렀는데.” “그럴 일이 있었어. 워낙 험한 일을 많이 겪는 팔자라.” 청년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치유 마법을 다루는 치유술사들은 이런 점이 편했다. 돈은 비싸게 요구할지언정, 시시콜콜하게 캐묻거나 뒷조사를 하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침대 옆에 놓인 간이 의자에 앉으며 청년이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 “아직 젊으시니까 조심하세요. 상처는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지만, 목숨은 잃으면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충고 고맙군.” 지크하트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하이랜더였던 시절에도 목숨은 하나였지만, 잃으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사뭇 무겁게 와닿았다. 어쩌면 자신이 하이랜더였다는 사실도 눈치챈 걸까. 하지만 이 치유술사야말로 아직 젊어서 그런지 마기를 감지하는 정도에 그친 모양이었다. 하기사, 알았다면 그런 말은 안 했겠지. 무심하게 생각하며 뜨거운 차를 홀짝인 지크하트가 이내 눈썹을 팍 구겼다. “쓰읍…” “차가 안 맞으신가요?” “아니, 상처 때문에. 이거 은근 아프네.” 잊을 만하면 올라오는 통증이었다. 입술에 앉은 딱지는 제법 나았건만, 입 안의 상처는 뭐든 닿기만 하면 쓰라리고 홧홧거려 가끔은 침 삼키기도 어려웠다. 금방 나을 줄 알았더니 이렇게 속을 썩일 줄이야. 디오의 이빨의 날카로움과 현재 제 몸의 연약함을 심각하게 견주어보는 지크하트에게, 술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치료해드릴까요? 작은 부위면 오래 안 걸릴 텐데.” “그럼…” 연고라도 달라고 하려던 지크하트가 문득 말을 멈추고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멍이 있었던 흔적조차 남지 않은 깨끗한 살갗이었다. 눈물이 찔끔 맺힐 만큼 시큰거리던 관절도,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어딘가 잘못 맞춰진 것처럼 비명을 지르던 근육들도 이제는 멀쩡했다. 마치 처음부터 부상을 입지 않았던 것만 같았다. “……됐어. 그냥 놔둘래. 언젠간 낫겠지.” 영영 안 나아도 상관없고. 지크하트는 말을 삼켰다. 일부러 혀로 건드린 상처가 아파, 도리어 마음이 지독하게 평온해졌다. 의외로 그랜드 체이스의 추격은 없었다. 급하게 떠난 것에 대해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던 지크하트에게는 천운이었다. 방랑벽이 도졌나 하고 넘어가준 건가 싶지만, 그래도 엘리시스나 마리 정도는 쫓아올 만하지 않나. 디오가 말을 안 한 건가. 그가 말을 이렇게 잘 들어주던 녀석이었나. 한참을 궁리하던 지크하트는, 답이 좀처럼 나오지 않자 결국 고민을 포기했다. 이제 정말 남남이 되었으니 뭐래도 상관없긴 했다. “…진짜로 어디든 가서 죽었으면 좋겠나보지.” 자조적으로 내뱉은 말에 우울만 더해져, 지크하트는 괜히 발치에 굴러다니던 돌을 찼다. 며칠간 제대로 된 식사를 못한 배가 꼬르륵거렸지만 입맛이 영 당기지 않았다. 입술에 난 딱지를 질근질근 씹어댄 지크하트가 북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디오와 그런 일이 있기 전부터 어렴풋하게 마음에 두고 있던 장소가 있었다. 하루아침에 없어진 힘을 도로 되찾을 유일한 단서였다. 고독한 여정은 고달팠으나 어렵진 않았다. 비록 하이랜더의 재생력은 잃었지만, 인간을 초월하기 이전부터 젊은 혈기 하나만으로 온 대륙을 쏘다녔던 지크하트였다. 천재 검투사로 이름을 날렸던 솜씨도 녹슬지 않아, 방어적인 전투 방식도 금방 익숙해졌다. 가는 길에 야수가 나타나면 때려잡았고, 몬스터가 날뛰면 가차없이 베어넘겼다. 디오에게 붙잡혔던 오른 손목이 좀 신경 쓰이는 걸 빼면 모든 게 나쁘지 않았다. 외로움을 타지 않는 천성은 이럴 때 편했다. 종종 디오랑 있었던 마지막 대화가 떠오르는 것을 제외한다면. 반대로 말하면, 지크하트는 아직도 그날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불을 지피며 지크하트는 오른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왜 그날 그런 짓을 했을까. 욕구불만이었나. 정말로 죽기 전에 그녀석하고 한 번 자보고 싶었나? 매번 정신이 날아갈 정도로 좋긴 했다. 속궁합 하나는 끝내줬으니까. “내가 복상사가 꿈이었다니. 나도 몰랐던 욕망을 이런 식으로 마주하고 싶진 않았는데.” 시답잖은 말을 중얼거리며 지크하트가 장작을 내려다보았다. 마음처럼 불이 잘 붙지 않았다. 비가 오려는지 나뭇가지가 좀 눅눅한 것 같기도 했다. 가라앉은 눈으로 반쯤 벗겨지다 만 가지를 응시하던 지크하트는 이내 나뭇가지를 집어던졌다. 내가 오늘 죽는다면, 그날 일을 후회할까. 그 녀석과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정말 어쩌다 몸을 좀 섞었을 뿐인데. 하지만 디오가 아니었으면, 지크하트는 상대가 누구든 몸을 허락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지크하트는 오는 인간을 피하지는 않을지언정, 하룻밤의 욕구를 위해 아무나 잡고 자는 성격은 단언컨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그 날의 자신은 그저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 같았다. 몸이 이렇게 변하든 말든 으스러지도록 안아줄 상대가 필요했다. 그저 그뿐이었다. 디오는 지크하트에 한해서는 거절이 드문 녀석이니까. 그걸 알아서, …… “…쯧.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눈썹을 찡그린 지크하트가 혀를 찼다. 어느 틈에 몰려들었는지 여기저기 마수의 살기가 넘실대고 있었다. 수는 대여섯 정도. 야수형이라면 요 며칠 질리도록 상대한 참이다. 좀 움직이고 나면 머리도 개운해지겠지. 목을 가볍게 돌린 지크하트가 검을 잡고 일어섰다. 머리 위에서 천둥이 낮게 울었다. 디오는 홀로 지크하트를 쫓고 있었다. 마리에게도 지크하트의 몸에 생긴 이상은 비밀로 해두었다. 그가 며칠 간 홀로 삭히며 숨기고 있었던 것을 디오는 제 입으로 떠벌리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그랜드 체이스 대원들은 세세하게 묻거나 트집을 잡지 않았다. 지크하트가 나간 게 자기와 싸운 탓이니 책임지고 데려오겠다는, 그 말도 안 되는 변명도 받아들여주었다. 덕분에 디오는 지크하트의 여로를 쫓아 고생중이었다. 취약해진 지크하트가 마기에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힘을 숨기니 몸에 추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꼴이었다. “망할 하이랜더…! 잡히기만 해봐라!” 열 번도 넘는 허탕 끝에 디오는 결국 분노를 터트렸다. 위험한 몬스터는 무엇이든 베어넘기는, 커다란 검을 든 흑발의 미청년의 행적을 기억하는 이는 많았다. 그러나 방랑에 닳고닳은 지크하트와, 평생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쫓아본 적이 없는 디오의 속도는 차원이 달랐다. 강을 건너갔다는 농부의 말을 따라 도착한 방앗간에서는 그가 마수를 잡아주고 산을 넘어갔다 했다. 겨우 도착한 여관에서는 물만 얻어마시고 언덕을 넘어갔다고 했다. 그나마 하나의 위안은 그가 치유 마법을 쓰는 술사를 찾았다는 소식뿐이었다. 다 때려치우고 마기를 폭주시켜서 잡아올까 진지하게 고민했던 디오를 멈춰세운 것은 단 하나, 그에게 붙들려 새파랗게 멍이 들었던 지크하트의 손목이었다. “그렇게 나약해졌으면서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디오의 주변에 있는 ‘나약하고 죽기 쉬운 생명들’이, 어린 시절 그에게 악몽을 안겨줬던 레이라면 이야기는 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디오가 기억하는 죽기 쉬운 생명은 이제 얼굴도 흐릿한 아버지 - 베르너 버닝캐니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창조주가 부여한 무한에 가까운 수명,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도 언젠가 세상을 떠난다. 누군가의 기쁨, 기다림, 슬픔이나 하염 없는 원망과 관계 없이, 혹은 그걸 알면서도 선택하는 이별의 무게를 디오는 두 번은 재어보고 싶지 않았다. 길어봤자 몇 달. 짧다면 한없이 짧은 시간을 공유한 사이다. 그것이 다시는 이어지지 않을 인연의 끝이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 돌연 바람이 바뀌었다. 살육과 파괴의 본능이 배어난 짙은 악취가 코 끝을 찔러왔다. 습관적으로 이를 무시하려던 디오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무척이나 흔한 피 냄새, 인간의 땅에서는 어디에서건 풍겨오는 옅고 흐린 향이 공기에 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디오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바짝 손두선 감각이 익숙한 기척을 쫓고 있었다. 커다란 검푸른 날개가 새카맣게 물든 하늘을 덮듯이 펼쳐졌다. 이게 얼마만에 느껴보는 위기감이더라. 지크하트는 턱까지 차오른 핏물을 뱉으며 멍하니 생각했다. 선혈에 흥건하게 젖은 바지며 신발이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살점이 반절 뜯겨나간 왼쪽 어깨엔 이미 감각이 없었다. 진짜 운도 더럽게 없지. 지크하트는 검에 의지해 일어나며 흐려지는 눈을 깜빡였다. 상대는 늑대와 독수리가 뒤섞인 아종이었다. 그나마도 세 마리는 베어죽이고도 치명상을 면했으니, 그야말로 천재여서 아득바득 버틴 셈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세 마리까지 전부 감당할 수 있을까. 눈가를 적신 피를 닦을 새도 없이 지크하트가 검을 고쳐쥐었다. 먹잇감이 지쳤다는 걸 안 그들은 지능적으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젠장. 몸이 무거워.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이대로 죽나. 죽는 게 두려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끼에에에!! 재차 달려든 마수가 그의 왼쪽 옆구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이를 악문 지크하트가 몸을 가까스로 비틀며 그것의 목을 정확히 노려 검을 휘둘렀다. 간신히 찢기는 걸 면한 팔 대신 극심한 통증과 함께 하얀 셔츠가 붉게 물들었다. “큭!!”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난 지크하트를 향해 나머지 마수가 달려들었다. 반동을 이용해 한 마리의 날개를 베는 것까진 성공했지만 남은 놈은 유독 움직임이 재빨랐다. 사나운 발톱이 지크하트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갔다. 마지막 남은 오기로 겨우 무릎을 꿇지 않고 버티고 선 지크하트가 쿨럭거렸다. 목구멍 뿐 아니라 폐까지 갈기갈기 찢긴 것처럼 괴로웠다. 진짜, 너무 귀찮은데… 투둑. 툭. 싸우는 내내 지긋지긋하게 천둥이 울리더니 기어이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주 하늘이 나더러 죽으라고 악을 쓰는구만. 피로 물든 머리카락을 털며 지크하트가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어지러웠다. 숨쉬는 것조차 슬슬 지긋지긋했다. 그런데, 내가 뭘 위해 여기까지 왔더라? “컥! 커헉, 컥…” 앞발에 채여 뒤로 날아간 지크하트가 검을 땅에 꽂으며 몸을 멈춰 섰다. 날개가 잘린 한 마리가 위태롭게 퍼덕이며 달려들었다. 머리와 몸이 두동강나려던 찰나 상체를 숙이며 아래로 파고든 지크하트가 검을 놓고 손잡이를 밟았다. 순식간에 위로 치솟은 검이 마수의 심장을 꿰뚫었다. 인간의 것보다 더 검붉고 끈적한 피가 폭우처럼 쏟아져내렸다. “커헉!!” 교활한 놈은 동족의 죽음을 보고 도리어 기회를 잡았다는 듯 달려들었다. 밀려오는 충격에 검을 놓친 지크하트의 팔을 움켜쥔 마수가 승리의 울음을 내며 날개짓했다. 숨이 간신히 붙어 있을 뿐인 육신이, 거친 움직임에 흔들릴 때마다 목 너머에서 피가 울컥울컥 솟았다. 점점 지면과 멀어지는 시야가 현기증인지 출혈인지 모를 고통으로 시뻘겋게 물들어갔다. 입술의 흉터가 아프고 오른 손목이 시큰거렸다.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순간, 무심코 그 이름이 떠오른 건 그 때문이었다. “하이랜더!!” “……!” 반쯤 감겨가던 은안이 번쩍 뜨였다. 초승달처럼 푸르고 거대한 낫이 지크하트를 덮은 그림자를 갈랐다. 강한 일격에 맞고도 표독스럽게 퍼덕거리는 마수가 새로 나타난 적을 찾아 대가리를 돌렸다. 빈틈을 놓치지 않고, 가까스로 그것의 날개죽지를 걷어차는 데 성공한 지크하트가 약해진 발톱에서 떨어져나왔다. 빗속에서도 높게 떠오른 마수의 몸이 두 번째의 낫질에 두동강이 났다. 아, 이제 살았다. 우습게도 곤두박질치며 제일 먼저 떠오른 감상은 그것이었다. 저와 한참 멀어진 땅보다, 비가 어지럽게 쏟아지는 하늘보다, 흐릿해지는 시야에도 그 푸른 날개가 유독 선명하고 아름다워서. 지크하트를 낚아챈 디오가 몸을 뒤집으며 날개로 그를 감쌌다. 그의 단단한 손에 품으로 당겨진 것이 지크하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