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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를 짝사랑하는 손권을 짝사랑하는 육손으로, 쌍방애정이 아닙니다.
창작삼국지인 만큼 취향의 외형 묘사가 들어 있습니다.
지인분 커미션으로 작업하였습니다.
당신의 불가침영역
손권 x 육손
오밤중에 문을 두드린 환관의 뒤를 따르며, 육손은 피곤한 기색을 구태여 숨기지도 않았다. 손권이 폭음을 한 것도, 말릴 사람이 그밖에 없으니 제발 도와달라는 하소연을 들은 것도 처음이 아니었던 탓이다. 이게 다 전생의 업인가? 손권의 초대를 받았던, 머리를 반지르르하게 민 노승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아니면 관운장이 저승에서도 형주에서의 원한을 못 잊고 그들을 저주하고 있거나.
“승상께서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전 남군태수께서 천거하신 이유가 있었군요.”
‘안 하셨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육손은 심경이 복잡했지만 차마 말로는 내뱉지 않았다. 환관도 그의 눈치를 보며 불편한 심기를 달래주려 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묘한 억울함은 풀릴 길이 없어, 육손은 환관이 언급한 여몽을 탓하기로 했다.
‘사람이 저리도 까탈스러우면 말이라도 해줬어야지!’
여몽은 어떻게 손권을 다룬 것인가? 육손은 이것이 동오의 황제를 향한 무례한 생각임을 알면서도 궁으로 가는 내내 고뇌를 멈출 수 없었다. 대장군 제갈근에게 넌지시 조언을 구해본 바야 있었지만 그는 성품이 육손과 판이하게 달라 참고가 되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잘 돌려말하고 달래면 분노하였다가도 쉬이 납득하고 누그러지신답니다. 대도독께서도 그리 해보심은?’
‘차라리 거미줄로 갑옷을 지으라 하시지 그러십니까.’
‘하하하하.’
천재란 족속이란 어찌나 얄미운지! 결국 육손만 손권마냥 까탈스럽게 성질을 부리다가 끝난 대화였다. 제갈근처럼 될 수 없다면 여몽의 끈기라도 닮았으면 좋았을 것을.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히며 육손은 쓰려오는 배 위를 둥글게 문질렀다. 망상은 한없이 멀고 손권의 침실은 코앞이었다. 이젠 현실로 돌아올 때였다.
“폐하. 승상을 모셔왔습니다.”
침실은 조용했다. 혹여 잠이 든 건가 일말의 희망이 든 것도 잠시, 문 너머에서 낮게 가라앉은 어조가 들려왔다.
“들어오라.”
문이 느리게 열렸다. 육손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흰색과 붉은색을 교차하여 묶은 천이 잘게 흔들리다 멈추었다. 목이 긴 흰 병을 기울여 술을 따르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흑발을 한 갈래로 곱게 모아주던 붉은 머리끈은 느슨하게 풀려 걸려 있었고, 하얀 침의는 반쯤 풀어헤쳐져 영 단정치 못했다. 육손은 냉정하게, 그가 한 나라의 황제보다는 여인과의 동침이 무산되어 뿔이 난 남편 같다고 평가했다.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꼬락서니였다. 육손이 오만불손한 악평을 곱씹고 있음을 눈치챈 것처럼 손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젠장.’
육손은 손권이 정말 싫었다. 한 나라의 지도자치고는 지나치게 예민했고, 그의 아버지 손견이나 형 손책에 대한 열등감도 심했다. 그러나 육손은 무수한 불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사직을 하거나 손오를 떠날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촉한이든 조위든 그가 척을 진 나라들뿐인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지만, 가장 중요한 사유는 따로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육손 자신을 가장 괴롭고 억울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흑발 아래로 드러난 금안이 일렁이는 촛불 아래 선명하게 빛났다. 강동의 호랑이라 불렸던 손견에게서 물려받은 눈이었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은 붉은 머리끈이 선명하게 돋보일 만큼 매끄럽고 검었으며, 술잔을 드는 손가락은 가늘고 길면서도 무구를 오랫동안 다룬 무장들이 그러하듯 단단하고 마디가 두드러졌다. 육손은 그의 올곧고 반듯한 콧대와 고집스레 다물린 입술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랬다. 육손은 손권의 미모에 영혼까지 홀려 있었던 것이다.
“왜 그리 과음을 하십니까. 모두가 염려하고 있습니다.”
육손이 조심스레 앉으며 꺼낸 말에 손권이 픽 웃었다.
“그래서 이 밤중에 쪼르르 그대에게 달려가 일러바친 게로군. 승상의 업무에 짐의 주량 관리가 포함되어 있는 줄은 예상도 못했다.”
육손도 동의하는 바였기에 고를 건 침묵뿐이었다. 자신이 마시던 잔을 그의 앞에 탁 소리나도록 놓은 손권이 잔에 술을 따랐다.
“다들 왜 천하에 짐이 못할 게 무어 있겠느냐 말하면서도 술은 안 된다는군. 왜일까? 짐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데 그대는 그 까닭을 아는가?”
“제일 중요한 가정이 다소 잘못된 것 같습니다 폐하. 저는 제 아무리 폐하라 하여도 모든 것을 다 누릴 수는 없다고 봅니다.”
“아아… 그랬지. 그대는 입에 발린 말은 스스로 용납이 안 되는 성미였지. 짐이 실언을 했군.”
손권이 고개를 느릿하게 흔들었다. 삐뚤게 올라간 입 꼬리엔 비웃음인지 스스로를 향한 조소인지 모를 뒤틀린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육손은 마치 용서를 구하는 것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실상은 그를 보는 동안 눈치 없이 붉어진 뺨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자존심도 없는 놈. 지금 대놓고 비꼬고 있는데 뭐가 좋다고 설레고 있는 거야?
“허나 그렇기 때문에… 그대와 말을 나누면 정신이 맑아지고 눈앞이 바로 보인다.”
육손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손권이 술이 찰랑이는 잔을 들어 그를 향해 내밀었다.
“환관이 그대를 데려온 것은 혜안이었다. 날이 밝거든 포상을 내리라 해야겠군.”
육손은 남이 받게 될 포상보다 저에게 내려진 은혜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겨우 잔을 받아든 육손이 소매로 입을 가리고 술을 들이켰다. 주둥이가 긴 술잔은 입구가 조금 젖어 있었다. 이 잔으로 술을 들이켜던 손권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육손은 잔을 내려놓았다. 손이 잘게 떨린 탓에 미끄러진 잔이 덜그덕거리다 멈추었다.
“제 아무리 황제라 하여도 부처도 도사도 못 되는 인간이다. 뭐든 다 가능할 리가 없어.”
우울이 깔린 낮은 어조가 파도처럼 방을 적셨다.
“형님이나 아버지처럼 대단해지는 것도 무리지.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역시 그거였군. 손권의 안 좋은 버릇이 도진 모양이었다.
“그분들이 아무리 뛰어나셨다 한들 그분들은 이제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대어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진대 어찌 그리하십니까?”
손권의 금안이 맹수처럼 사납게 번뜩였다.
“그대의 눈에나 보이지 않을 뿐이지. 그대는 형님의 무용도 아버지의 위엄도 보지 못했으니까.”
“…….”
“그대는 그리 영특하면서 왜 우리 동오의 기반과 뼈대를 세워준 자들에게는 관심이 없느냐? 그분들이 그대를 보았더라면 그대의 재능을 높이 사 곁에 두었를 텐데.”
언제는 그들의 부하가 아니어서 재능을 나만 알아보았다고 기뻐하더니.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란 것인지. 육손은 두통이 도질 것만 같았다. 오늘만큼은 돌려서 달래어보라는 제갈근의 말을 따라볼까도 했었으나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폐하의 말씀대로 저는 무열황제 폐하의 눈에 든 적도 없고, 장사환왕 전하에게 등용이 된 적도 없습니다. 저를 알아보신 것도 곁에 둔 것도 폐하뿐이니 제가 그분들을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떠난 자는 떠난 자고 말로 전해지는 데에는 한계가 분명하니 저는 그마저도 망상과 과장이 아닐까 의심할 수밖에요.”
육손은 이번에야말로 그가 자신을 내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시 돋친 말투에 삐딱하고 무례하며 오만방자하기까지 한 어조. 그가 꿈꾸던 사직(형벌이 다소 많이 가해진)의 순간을 그리면서도, 육손은 그를 못 보게 될 아쉬움을 느끼는 자신에게 진저리가 났다.
그러나 손권은 놀랍게도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도리어 잔을 다시 채울 때에는 놀랍도록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래…… 넌 나밖에 모르지.”
호칭이 바뀌었다. 육손은 뺨과 귀가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술을 마셔서 다행이었다. 취기가 뒤늦게 올라온 모양이라고 우길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너한테 잘해줘야 하는데 왜 이것밖에 못하는 걸까? 형님의 곁에서 함께 싸웠던 이들에게는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지 못하고, 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행패만 부리는구나.”
“…….”
“형님은 내게 사람의 마음을 알고 그들을 따르게 하는 데에는 당신보다 내가 낫다 하셨다. 허나 지금의 나는… 진정 그리 잘하고 있는가?”
손권의 목소리가 다시금 우울해졌다. 육손이 말을 한참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백성들의 생활도 안정되었고 위와 촉도 섣불리 저희를 넘보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게 폐하께서 이루신 업적입니다.”
그 모든 말은 진심이었다. 변덕스럽고, 예민하고, 열등감이 심하더라도 그가 이룬 업적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손책과 손견은 이루지 못한 것들이다. 육손은 여전히 그가 지도자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동오의 황제로서 많은 것을 이루었음을 알았다.
“그걸로는 부족하다.”
그리고 그가 어째서 잠에 들지 못하고 괴로워하는지까지. 너무 많은 손권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일구어 만들어낸 동오를… 내가 물려받은 모두의 나라를 어찌 이끌어야 하는가.”
“…….”
“내 그릇이 조금만 더 컸더라면…….”
육손은 손권을 연모했다. 그가 얄밉고 마음에 안 드는 점을 백 가지를 나열한대도 그를 향한 애정 한 가지를 꺾지 못했다. 손권이 그저 한탄만 하고 있었더라면, 영원히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가라앉아 있었더라면 육손도 진작에 진저리를 치며 떠났을 터다. 그러나 손권은 그의 형이, 아버지가, 그를 따랐던 무수한 인재들이 보았던 대로 왕의 귀감이었다. 육손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고뇌하지 않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괜찮습니다. 이대로도.”
그에게 편안한 밤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제가 그리 보필하겠습니다.”
손권의 눈이 느리게 움직여 그를 담았다. 영롱하고 예리하던 금안은 이제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육백언.”
“예.”
“너는 오직 나만의 사람이다.”
육손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손권이 누군가를 이리 부르는 일은 실로 흔치 않는 일이었다. 손권이 쓰러질 듯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더니 육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그래서 믿고 싶어… 편해지고 싶다……”
육손은 들떴던 마음이 고스란히 곤두박질치는 걸 느꼈다. 바람이란 현재를 반영하는 법이다. 내 사람이라 부르면서도 믿지 못하는 불안을, 편안하지 않다는 긴장의 토로를 듣자 육손은 온몸의 피가 식는 듯했다. 그러나 이 잔인한 군주는 이걸로도 그치지 않았다.
“중형이 있었더라면…….”
“…….”
“그가 있었더라면… 나는……”
목소리가 늘어지다가 점차 조용해졌다. 육손이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손권은 고른 숨을 내며 잠들어 있었다. 육손은 말없이 그를 안아들어 침상에 눕히고 그 곁에 앉았다. 술에 취해 잠든 그는 꿈에서조차 고뇌하는 것처럼 미간에 조금 힘을 주고 있었다. 그의 미간을 눌러 펴주려는 듯이 뻗었던 손이, 결국 닿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주 대도독보다 당신을 먼저 만났다면 제게도 기회가 있었을까요.”
허망한 물음이었다. 손권이 잠들지 않았더라도 원하던 대답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육손은 이불을 끌어다 그의 턱 아래까지 끌어올려주었다.
“차라리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지만…”
“…….”
“그래도 한 번쯤은… 그분만큼이 아니더라도, 날 믿어주는 날이 올까?”
당신 자신보다도 나를 믿어서, 당신의 불안을 나로 지워버렸으면 좋겠다. 불가능한 희망을 쓴웃음으로 감추며, 육손은 방을 나섰다. 황제라 하여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손권은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불가침영역을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를 아무리 연모하여도, 불평하고 쓴소리를 하고 억지로 장악한대도 무너뜨릴 수 없는 성역을. 그 벽을 오늘도 뼈저리게 확신한 육손은 올 때와 같이 빈 손으로 돌아갔다.
육손은 실로 총명하여 그가 확인한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그를 향한 연정을 무너뜨리지도 못했다. 손권이 그를 믿는 날은 결국 오지 않았고, 옥중에서 그는 황금빛 눈이 지켜보는 아래 잠드는 영원한 꿈에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