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ption
해당 소설은 「구다구다 료마 위기일발! ~사라진 놋부 헤드의 수수께끼~」이후의 상황을 가정하여 창작되었습니다. 「너와 나의 BtoB」이벤트와는 이어지지 않는 별개의 전개임을 유념 부탁드립니다.
아마노사카가미와 타카스기 커플링을 다루고 있으나, 둘이 사귀지 않으며 타카스기는 아마노사카가미를 싫어합니다.
사카모토 료마를 짝사랑하는 타카스기의 설정입니다만, 료마는 알지 못하고 오료 씨와 연애중입니다.
제목은 위기일발 공식 테마곡의 제목을 차용했습니다. 소설을 읽기 전, 혹은 읽은 후에 영상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다스리지 못해.
누군가가 분노를 터트리듯 외치고 있었다. 아아, 맞는 말이야. 비록 그 말을 하는 놈도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면 누가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겠어? 부유하는 상념이 동의하듯 공명했다.
뭐 어쨌든,
재미있으면 그만이라는 거야.
흠? 저 자식, 그럴 듯하게 논점을 흐리고 있네. 자기만 좋으면 됐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사실 방금 전의 말도 그와 다를 바 없었지. 사납게 빈정거리는 음색은 우습게도 아까 떠들어대는 자와 같았다. 지금 자기를 보면서 비웃고 있는 거야? 그렇게까지 꼴사나운가? 아니 뭐, 주변에 동의하는 사람도 없고,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상대 같은 건 진작에 죽었잖아. 나라도 맞장구쳐줘야 불쌍하지 않지. 어라, 동정심? 스스로한테 품는 거야? 최악.
네놈 말이 맞다, □□□□. 인간은 약하디약하지.
저건 또 뭐야?
아아, 생각날 것 같은데. 인간에게 빌붙어 사는 주제에, 자기가 인간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던 녀석. 인간을 우습게 보지 마. 인간을 우습게 보는 건 나 아니었느냐고? 나는 인간이니까 내가 하는 건 상관없어. 어라, 자기비하에 자기동정에 자기혐오까지. 뭐야, 이렇게 ‘나’로만 가득한 녀석.
…….
……나인가?
“……―!!”
타카스기 신사쿠는 눈을 떴다. 등에 닿는 바닥이 관짝처럼 차가웠다. 의식이 멍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여도 가로등의 불빛으로 얼룩진 검은 하늘은 변함이 없었다.
“…보통 낯선 천장이 보이는… 그런 전개여야 하지 않아? 이건 너무 익숙한 풍경인데?”
몸을 일으켜 앉던 타카스기가 문득 인상을 구기며 허리를 짚었다.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등이며 허리가 두들겨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대자로 뻗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럴 거면 편한 데서 자빠져 있을 것이지. 아니면 오쿠니 군이 옮겨줘도 좋았잖아. 마지막까지 옆에 있었으면서. 들어주는 이 없는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일어나던 타카스기가 다시금 몸을 살폈다. 아마노사카가미에게 당했던 상처는 멀끔히 사라졌고, 옷에 검게 눌어붙었던 핏자국이나 각혈의 흔적도 온데간데없었다. 마지막에 연주했던 샤미센도 검과 함께 얌전하게 놓여 있어, 달라진 거라곤 머리를 묶고 있던 머리끈이 끊어져 있다는 점뿐이었다.
“진짜 기이하네.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꽤 멀쩡히 살아 있잖아. 영핵이 부서지지 않아서인가?”
하지만 그것은 역시 ‘죽음’이었다. 타카스기가 잊었을 리도, 착각했을 리도 없었다. 몸 전체에서 천천히 멀어지는 자극, 점점 미약해지던 숨결, 눈에 담았던 풍경과 함께 멈춘 의식이 공허하게 비어가던 감각. 제 손을 내려다보던 타카스기는 이내 불쾌한 듯 애꿎은 손만 소리 나도록 털어냈다.
“뭐 중요한 건 일단 살아 있다는 거니까… 하, 진짜 어이없네. 이렇게 쉽게 부활하는 악당은 들어본 적 없다구. 이럴 거라면 칼데아의 마술사 군에게 제대로 끝장내달라고 할 걸 그랬지. 대체 누구야? 그 녀석들 내쫓은 사람. …나구만!”
투덜대며 걷던 타카스기가 돌연 굉장한 소리와 함께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그를 피할 길이 없었던 가로등이 사내를 한심하다는 듯이 비추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라, 타카스기는 방금 전보다 더 오래, 느리게 눈을 꿈뻑거렸다. 이마가 얼얼하다 못해 축축했다. 멍하니 손을 올려 만져보면 익숙한 붉은 액체가 묻어나고 있었다. 타카스기는 다시금 생각했다. 그래, 죽지는 않았다… 살아 있다… 피도 살아 있어야 흘릴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이딴 게 서번트?”
아무리 의식하지 못하고 걷고 있었다 해도, 가로등에 부딪혀서 자빠지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타카스기는 다시금 상태를 점검했다. 허기는 없었지만, 인간으로 치자면 딱 굶어죽기 직전이라 해도 좋을 만큼 마력이 부족했다. 아무래도 육체를 실체화하는 정도가 고작인 듯했다. 그가 지니고 있던 성배는 칼데아의 마술사에게 줘버렸고, 노부나가의 목도 빼앗겼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긴 했다. 애초에 무진 성배 전쟁이 막을 내린 시점부터 그는 퇴거해야 했던 몸이었으니. 하지만…
타카스기는 느리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던 위화감이었다.
죽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았다.
“……특이점… 남아 있잖아.”
타카스기가 세운 유신도시, 사이타마가.
“정말 영문을 모르겠네. 이럴 거면 대체 왜 되살아난 거야? 그것보다 어떻게 유지되는 거지?”
기왕 살아났으니 처음부터 다시 해볼까! 라고 외치기엔 수상쩍은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마지막에 후련하게 눈을 감았던 터라, 그저 타카스기의 머리를 채우는 건 분노도 되지 못한 황당함뿐이었다. 마지막에 소원이라도 빌었던가? 오쿠니 군이랑 늦잠이나 자볼 걸 그랬다는 거? 아니 그럼 최소한 오쿠니 군이랑 같은 여관방에서 눈을 뜨던가, 그래야 앞뒤가 맞을 거 아냐! 애초에 말로 제대로 했는지조차 기억도 안 나는데! 타카스기는 냅다 손에 잡히는 걸 가로등에 집어던졌다. 깡!!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난 뒤에야 제 정체를 증명한 깡통이 애처롭게 굴러갔다.
“하, 진짜… 웃음도 안 나오네. 나더러 뭘 어쩌란 거야…”
타카스기가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 때였다.
〔경보. 사이타마 주민 여러분께 알립니다. 경보. 사이타마 주민 여러분께 알립니다.〕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였던 타카스기가 고개를 삐딱하게 들어올렸다.
“이번엔 또 뭐야?”
〔주민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범죄자 타카스기 신사쿠를 현상 수배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타카스기 중공의 전 사장이었던 타카스기 신사쿠를……〕
“아, 난 또 뭐라고. 날 현상 수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타카스기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하아!?!?”
〔저희 타카스기 중공은 언제나 시민 여러분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사업 윤리에 반하는 인물을 사장으로 둘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 그를 해임하고 책임을 묻기 위해 체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 회사에 사업 윤리 같은 거 있었어!? 누가 정한 거야? 물론 나겠지만!!”
현상수배범치고는 큰 목소리였지만 타카스기는 외치지 않고선 참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저 중공을 움직일 만한 인력이 남아 있을 리가 만무한데, 대체 누가 저런 짓을 한단 말인가? 사이타마의 주민들은 최대한 안 죽일 예정이었지만, 결론적으로 마력로를 빼앗겼을 때, 아라하바키를 작동시키기 위해 무리해서 도시 전체의 생명력을 빨아들였던 걸 타카스기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아마노사카가미가 폭주했던 경황까지 돌이켜 보면, 이곳에 살아남은 사람은 전무할 터다. 그럼 이 폐허뿐인 도시에서 대체 누가? 그에게 이 정도의 악의를 품을 만한 자가 있었다고?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많긴 하지!”
벌떡 일어난 타카스기가 냅다 뛰기 시작했다. 판단이 끝난 뒤에도 길바닥에 태연히 앉아 있을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게다가 자신은 서번트로서의 무력과 마력, 그 어떤 것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 정체도 모르는 적들을 상대해봤자 개죽음만 당할 건 뻔했다.
-저쪽이다!-
로봇처럼 이질적인 사운드가 들렸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양쪽 길목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쏟아져나왔다. 타카스기에게 너무나 익숙한 갑옷 무장이었다. 어째서 그들이 자신의 보구로 강화된 갑주를 걸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머리를 스쳐갔지만 잠깐뿐이었다. 타카스기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이노베이트!”
같은 형태라면 원리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력이 없더라도 잠시 무력화하는 기교는 통할 터. 총을 겨누던 기병대원들의 움직임이 잠깐이나마 멈추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정확하게는, 악효과였다.
“큭!?”
왼눈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이 삽시간에 전신으로 퍼졌다. 눈알이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하더니, 금세 눈꺼풀 너머로 차오른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휘청거리며 손으로 급히 눈을 누르자 익숙한 피비린내가 코 끝을 스쳤다. 마력이 부족해서 육체에 곧장 타격이 온 모양이었다. 고통은 사라졌지만 당장 저들을 상대로 한 번 더 써먹을 짓은 못되었다. 타카스기가 뒤로 물러서며 기병대원들을 살폈다.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진 않지만, 움직임은 아직 둔했다. 기회의 순간은 길지 않다. 타카스기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이게 바로 전략적 삼십육계 줄행랑이다 멍청이들아~! 다신 보지 말자구!!”
곧장 뒤돌아선 그는 꽁무니 빠지도록 도망쳤다.
*
“흐음…”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나네요. 레이시프트에 적합한 서번트가 없어요.”
“일본 출신 서번트가 이렇게 많은데 아무도 못 들어간다고? 거참 이상하네.”
나가요시가 창을 어깨에 걸치며 툭 내뱉었다. 다른 서번트들도 동의하는 눈치였다. 차차가 먼저 한 마디 거들었다.
“이전에 들어갔던 녀석들도 무리인 거야? 뭐 이건 가능하다고 해도 안 하는 게 낫겠지만, 마스터쨩도 못 들어간다면 확실히 이상한데!”
“그렇지. 하지만 이렇게까지 확고한 고집이 있는 특이점이라면 이 천재도, 자존심이 상하지만, 답이 곧장 안 나오는걸.”
다 빈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본인 말마따나 자존심에 금이 간 모양이었다. 사카모토 료마가 느리게 팔짱을 꼈다. 특이점에서 돌아온 후로 줄곧 유지하고 있던 하카마의 소맷자락이 소리없이 흔들렸다.
“확고한 고집이 있다는 건, 이전과 달리 오히려 조건이 확실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맞아. 이전에야 레이시프트 조건을 밝혀내기까지 시간이 걸린 거지만, 이번엔 도리어 누군가를 명확하게 지목하고 있어서 곤란한 처지야.”
“특이점이 무지막지하게 사랑이라도 하는 상대라는 거야? 하지만 특이점에게 사랑받는 건 좀 무서울지도!”
차차가 질색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목과 성배로 구성되었던 특이점, ‘유신도시 사이타마’. 마술사인 후지마루 리츠카를 포함하여, 당시 사건 해결을 위해 참여했던 서번트들이 모인 건 그것의 갑작스러운 출현 때문이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목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특이점의 레이시프트 조건이 기이하게도 구체적이고 한정적이라는 것.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료마가 입을 열었다.
“일단 그럼 그 조건에 대해 들어봤으면 하는데.”
“음… 좀 많긴 하지만 알기 쉽게 간추려볼게. 야마구치 현의 하기시 출생일 것. 본명 외의 다른 이름을 갖고 있을 것. 초슈 번의 군사나 정치와 관련이 있는 서번트일 것.”
“그렇게까지? 이건 뭐 서번트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라도 추려질 수준이잖냐. 어이 양복, 뭐 아는 거 있냐?”
어깨를 으쓱인 나가요시가 료마를 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심각했던 얼굴이 당황과 의문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주변을 떠다니던 오료가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확실히 인간이라도 알기 쉽지만, 서번트라면 오료 씨도 알 것 같네. 그 녀석이지?”
“네. 맞아요.”
시온이 안경을 밀어올렸다.
“저 특이점을 고정시켰던 장본인이자, 초슈 번에서 가장 유명했던 유신의 영웅. 타카스기 신사쿠입니다.”
“그 분이라면 아무래도 저희 칼데아에 없을 수밖에 없지 말입니다!”
란마루가 입을 떡 벌렸다. 후지마루의 표정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에 있던 서번트 모두가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으니까. 확실히 그때 보았던 타카스기는 금방이라도 소멸할 것처럼 만신창이였다. 칼데아로 데리고 온다든가, 다른 방향을 찾아본다는 선택지조차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아니, 타카스기 A.I.도 완전히 사라졌잖아! 애초에 그 악덕 사장이 사라진 바람에 2호기인지 어쩐지 하는 사건도 일어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확실히, 2호기와 3호기 전부 상대하기 귀찮은 상대였지 말입니다.”
란마루와 차차가 서로 맞장구를 쳤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생했던 기억이 꽤 오래 남았던 모양이었다. 다 빈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아. 우리 쪽에서도 너희가 다녀온 뒤에, 아니, 그 이전에도 타카스기 신사쿠라는 서번트가 완전히 소실했다는 건 확인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하나 더, 너희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어떤 걸?”
되묻는 료마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다 빈치가 화면에 자료들을 띄웠다. 아라하바키와 타카스기 중공의 마력로, 그리고 유신도시 사이타마의 지도였다.
“타카스기는 아라하바키를 기동시킬 마력을 위해서 6개의 마력로를 만들었고, 그걸로 유신도시를 지탱하고 있었다고 들었어. 하지만 그 마력로는 오쿠니와 히메코의 결계진으로 빼앗아버렸지. 맞아?”
“확실해.”
“그렇게 빼앗은 마력은 아라하바키 ― 정확하게는 최초에 건조했던 기체에 주입했고, 중간에 에너지가 부족해지자 사이타마 주민들의 마력과 생명력으로 보충했어. 원래 타카스기 신사쿠는 1호기가 자신의 제어를 벗어날 상황을 고려해 2호기와 3호기를 만들었지만, 그것도 전부 부숴졌지.”
사건을 차근차근 되짚어보는 다 빈치의 말을 시온이 받았다.
“1호기와 달리, 2호기와 3호기는 타카스기 신사쿠를 쓰러트리기 위해 마련했던 것들이죠. 정확하게는 ‘아라하바키에게 제어권을 빼앗긴 타카스기 신사쿠’ 말이에요. 비록 아라하바키는 파괴되었지만, 우리는 2호기 사건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변수가 개입하면 그가 짜놓은 시스템이 버그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시온이 숨을 들이켰다.
“그럼 답은 더 간단명료해지죠. 저 특이점에서 가장 많은 마력을 품고 있던 기신 아라하바키. 하지만 그 아라하바키가 자아를 가졌던 건 아니니, 누군가의 개입으로 특이점을 봉쇄하는 구조로 재구축되었다고 봐요. 타카스기 신사쿠 다음으로 아라하바키를 제일 잘 알고, 다룰 수 있는 존재 말이죠.”
료마는 무심코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빠르게 떠오르지 않았던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서번트들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이름이, 료마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아마노사카가미……!!”
*
“엣취-!”
반쯤 무너진 건물 안,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타카스기가 우렁차게 재채기를 하며 코 끝을 문질렀다.
“뭐야? 누가 내 욕하나?”
쫓기는 사람치고는 한없이 가볍고 태평하게, 그는 어딘가에서 털어온 술병까지 알뜰하게 비우고 퍼자다 일어난 참이었다. 칼데아에서 저 때문에 난리가 났다는 걸 알 턱이 없었으므로, 그는 하품까지 야무지게 하고선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잘 쉬다 갑니다, 근왕지사 여러분~”
타케치는 몰라도 신베에가 들었다면 확실히 기함했을 인사였다. 이미 소멸해버린 서번트가 해코지를 할 수야 없는 노릇이겠지만. 타카스기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복도를 따라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예상대로 타카스기 중공은 근왕지사의 비밀 통로까지는 조사 범위에 두지 않은 듯했다. 대외적으로는 타카스기 신사쿠가 에도성 유혈 개성의 흑막이며, 마지막에는 기이한 거대 로봇을 이용하여 주민들의 생명을 빨아들였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테니까.
“―즉 이 사태를 벌인 녀석은 마지막에 사카모토 료마의 탈을 쓴 쓰레기가 나와 손을 잡고 있었다는 건 전혀 모른단 얘기겠지.”
타케치나 신베에 같은 근왕지사 쪽의 서번트들이 자신처럼 되살아난 경우의 수도 생각해두었지만, 그렇다기엔 그들의 본거지에 누군가 드나든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와 같은 서번트의 마력 역시도.
“그럼 정말로 타카스기 중공이 나를 소환했고… 그 이유가 타카스기 신사쿠의 죽음을 위해서인 거야? 내가 사업의 이미지에 먹칠을 해서? ……정말 이거라고?”
본인이 세우고 일궈낸 기업에 버려져 수배범으로 지목된 끝에 최후를 맞이한다. 흑막의 보스로서 겪을 법한 결말이라지만, 여전히 타카스기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력도 없는 되다만 서번트로 살려야 했던 이유가, 단순히 죽이기 위해서라고? 아주 만약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세력과 자신을 살려낸 존재가 동일 인물이 아니라면, 후자는 대체 뭘 원해서 자신을 소환했고 왜 지금도 나타나지 않는 건가?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소환하고 죽었다고 해도, 정작 눈을 떴을 당시엔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단 말이지… 마력 공급도 전혀 없었고…”
타카스기가 금이 간 천장을 노려보았다. 물론 그런다고 누군가가 천장을 뚫고 등장한다든가, 숨겨져 있던 문자가 떠오르는 럭키 이벤트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 특이점, 사이타마에 남아 있는 서번트라고는 오직 그 하나.
타카스기 신사쿠뿐이었으니까.
“……재미없어.”
한숨 같은 중얼거림이 허공에 부딪혀 부서졌다. 손을 멀거니 떨어트리지도, 고개를 숙이거나 어깨를 축 늘어뜨리지도 않는다. 그 정도의 절망이나 허탈감을 느끼게 하기엔 이 상황은 지나치게 재미가 없었다. 오히려 추리를 계속할 단서를 찾느니 자결이라도 하는 게 나을까 싶어질 만큼, 그를 막다른 곳에 밀어넣는 무료함. 따분함. 지루함. 권태를 참을 수 없는 염증과 혐오.
왜 살아나고 만 것인가.
무엇을 위해서……
“……음?”
타카스기가 눈을 깜빡였다. 천장을 타고 무언가가 미세한 빛을 내며 흐르고 있었다. 눈을 몇 차례나 꿈뻑이고 나서야, 타카스기는 그것이 밖으로 이어진 마력의 흔적임을 깨달았다.
“지하 건물의 천장을 타고… 아니… 사이타마의 지면을 타고 흐르는 건가?”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사이타마에 배치된 마력로였다. 칼데아의 마술사와 오쿠니가 탈취했었던. 하지만 아라하바키가 망가졌을 때 같이 멈췄을 텐데? 그게 아니고서야,
“…아.”
얼빠진 소리와 함께 타카스기가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새카맣게 잊고 있었을까. 자신이 아마노사카가미에게 주도권을 빼앗겼을 경우를 대비해서 만들어놓았던, 예비 아라하바키들과 A.I. 시스템. 사이타마가 아직 남아 있다면 최후의 상황을 고려하여 설계했던 것들이 움직이고 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것이 어째서 자신을 노리는 형태가 되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윽. 뭐야?”
갑작스러운 시큰거림에 타카스기가 급히 왼눈을 눌렀다. 다시 피가 터진 건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눈꺼풀을 꾹꾹 누르며 천장으로 시선을 옮기던 타카스기가 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까까지 선명하게 반짝이던 마력의 흐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진짜 어떻게 된 거야?”
얼결에 눈에서 손을 뗀 타카스기의 목소리가 당황하다 못해 갈라졌다. 왼눈을 뜨자마자 거짓말처럼 드러난 흔적은 아까와 다를 바 없었다. 속아보자는 기분으로 왼눈을 덮어가리니 마력은 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쯤 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눈치를 못챌 리 없었다.
“설마 ‘이노베이트’가… 기병대원이 아니라 나를 개조한 건가?”
하지만 분명 기병대원에게도 효과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또 어떻게 된 거지? 타카스기는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멍하니 벌어져 있던 입 꼬리가 실룩거렸다. 상황이 바뀌었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 방향으로.
“좋아. 조금 욱씬거리지만 참을 만해. 명명 ‘타카스기 아이(TAKASUGI EYE)’다, 어디 한 번 가보자고.”
타카스기가 발을 떼었다. 비록 지하의 통로일지라도 타카스기에겐 아주 익숙한 경로였다. 저벅, 저벅, 느리게 시작했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반전되는 속도도 순식간이었다.
“이 타카스기 신사쿠의 신병기로 모조리 밝혀내주마!!”
*
타카스기 중공의 중심부는 여느 때와 같이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다만 강화된 기병대원이 진을 치고 있지도, 그가 설정해두었던 보안 시스템이 바뀐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만일을 대비해, 타카스기는 합법적이지 않은 경로를 통해 건물에 잠입했다. 회사의 설립자이자, 인증되지 않은 외부인을 들여야 했던 공범자에겐 제법 익숙한 길이었다.
“그 쓰레기 신이 이럴 때 도움이 될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말이야…”
벽으로 위장된 문을 열며 중얼거리던 타카스기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비상 유도등이 푸르게 깜빡이는 복도 너머는 기이하게도 평화로웠다. 무거운 장갑이 바닥을 딛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지고, 그 아래엔 이름 모를 기계가 돌아가는 소음이 배경음처럼 조용히 깔려 있었다.
“……착각인가.”
누가 쳐다보는 것 같았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복도를 응시했지만 왼눈으로도 잡히는 것은 없었다. 이내 의심을 거둔 타카스기가 안으로 들어섰다. 경비원들을 피해 도착한 곳은 복도 끝에 자리한 개발 연구실이었다. 중공 소속의 연구부원들이 신병기를 선보이거나 제품의 테스트를 진행하던 실험실이기도 했다.
“오, 여기는 그대로네. 사원들은 한 명도 없지만. 잘렸나? 아니, 난리통에 죽었겠구만.”
실업 급여도 산재 처리도 못 받은 노동 직원들을 위해서 타카스기는 잠시 묵념했다. 쫓기는 입장이어도 일단 그는 이 중공의 사장이었으니까.
“자, 그럼 시작해볼까─”
비스듬하게 세워져 고정된 터치형 키보드를 새하얀 손가락들이 익숙하게 두드렸다. 현재 타카스기 중공의 도로 상황과 기업이 관리하고 있던 마력로의 상태, 그 외에 도시 전반에 걸친 지표들이 여러 개의 화면으로 나뉘어 떠올랐다.
“생명체는… 내부까지는 모니터링이 안 되나? 어쨌든 돌아다니는 건 저 기병대 녀석들 뿐이란 거지. 그리고 아라하바키 2호기는… 뭐야, 이건 진작에 망가졌잖아? A.I.도 정지됐고…… 음? 목적 달성에 따른 영구 수면 상태에 돌입?”
타카스기가 미간을 구기며 자판을 빠르게 두들겼다. 뭔가 이상했다. ‘목적이 달성되었다’니? 아라하바키는 아마노사카가미에게 완전히 빼앗기기도 전에 파괴되었다. 그렇다면 그걸 막기 위한 목적이었던 아라하바키 2호기나 A.I.는 처음부터 가동되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째서인지 오다 노부나가의 목이라는 초호기의 핵을 재구축하여 작동하기 시작했고, 상황을 인지한 타카스기 A.I.는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칼데아에 원군을 요청했다…….
“……엉망진창이구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태연하게 칼데아 녀석들에게 손이나 벌리고 말이지! 이런 어처구니없는 녀석을 만든 게 누구야!?”
물론 모를 리 없었다.
“나구나!!”
결과적으로, 타카스기 신사쿠가 소멸한 후 며칠 사이에 아라하바키 2호기, 3호기도 전부 폐기되었고 이를 최종 확인한 A.I.도 스스로 가동을 중지. 하지만 이후에도 사이타마의 특이점은 사라지지 않은 채, 그 아래에 기이한 에러 로그가 이어지고 있었다.
“특이점 복구, 실패, 일부 성공, 소실 실패, 복구 성공, 소실 성공, 성공, 실패, 소실, 복구…… 왜 다 끝났는데도 계속 작동되고 있었던 거냐고……”
타카스기가 드물게 초조한 기색으로 기록을 훑어올리다가 멈추었다. 특이점의 복구와 소실은 칼데아의 마술사와 서번트들이 물러간 뒤부터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정확한 기점은 아라하바키 2호기의 가동. 오다 노부나가의 목의 재구축과 소환……
“…─아.”
멍한 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다급한 손길이 자판을 두들겼다. 아라하바키 2호기의 가동 조건. 6개의 마력로와 연동을 가능케 하는 연결 코드 암호는, 그가 기억하기로는 분명.
[ SAITAMA의 영구 유지 ]
“…….”
[ 사라지지 않는 무사의 혼 ]
“그래, 그랬었지… 하…….”
타카스기는 에러 로그의 맨 위에 떠 있는 두 줄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아라하바키 초호기를 쓰러트리는 것은 일차적 단계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애당초, 아라하바키가 만들어진 목적은 이 특이점을 영원히 유지할 존재를 만들기 위함이었으니까. 초호기가 이루지 못했던 목적을 이어받았으나, 그 초호기를 박살낸다는 필요 순서가 누락되면서 2호기는 오류를 일으켰다. 그리고 2호기와 3호기가 박살나고 A.I.마저 잠든 이후에도 재가동된 마력로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사이타마를 가동시키기 위해 필요한 부분을 없애고 만드는 작업을 무한으로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렇게 되어버린 거냐고…….”
그 끝에 그들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이곳 사이타마를 영원히 유지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
아라하바키도 실패했으며, 이 마력로조차도 언젠가 소실되겠지만. 그 전에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최초에 그들을 만들고 계획을 만들었던 도시의 창조자.
‘타카스기 신사쿠’를 재구축하여, 이 도시의 핵으로 삼아 기능하게 하자는 결론을.
“마력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날 소환한 이유가 오직 그것뿐? 나를 핵심 동력원으로 박제해놓고 영원히 이 도시를 가동시키기 위해서?”
아아, 정말이지. 이런 진저리나는 계획은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 거냐.
물론 나겠지!
타카스기는 우울하게 아마노사카가미를 아라하바키에 쑤셔넣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니, 그쪽은 정말 힘 좋고 오래가는 건전지─아마노사카가미 타입 같은 거였으니까. 굳이 그 녀석이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가동시킬 힘만 있었다면 어떤 신이든 상관없었다. 지금 이 사이타마가 명명백백하게 타카스기 신사쿠만을 고집하고 원하는 이유와는 차원이 달랐다.
“살다살다 특이점에게 집착을 당하게 될 줄은 몰랐네. 인기야 생전에도 많았지만… 뭐, 아무튼.”
타카스기는 키보드의 전원을 껐다. 어지럽게 널려 있던 패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타카스기는 무덤덤하게 턱을 매만졌다. 자신이 소환된 이유도, 맥락과 상황도 얼추 파악이 됐다. 하지만 기껏 도시 하나 유지하자고 핵심으로 박제가 되어버린다? 절대 사양이다. 오히려 이 마력을 뺏어올 수 있다면 모를까. 도시 전체를 완전히 흡수할 수는 없어도 도시 전반을 이루는 마력과 구축해둔 마술 회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사이타마에 역으로 먹히는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다.
비록 남의 것을 뺏어올 만큼 마술에 박식하지도 않고, 캐스터로의 적성도 없지만… 타카스기는 왼눈을 어루만졌다. 한층 더 정교해진 시야가 연구실 전체에 흐르는 무수한 마력의 회로를 더듬어, 그들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냈다.
‘기병대원들을 잠시나마 멈추게 만들었던 나의 보구. 그 힘은 내 몸도 일부 강화시켰다.’
‘내가 사이타마에 의해 소환되어 구축되었다면 나 역시 이곳의 일부. 그리고 이 사이타마 또한 나와 연결되어 있을 터… 그렇다면 한꺼번에 빼앗을 수 없더라도.’
타카스기가 심호흡을 하고는 검을 뽑았다. 병기를 제조하던 곳인 만큼 실험 도구 외에도 폭탄과 장총, 검, 대포, 로봇의 팔이나 미사일 등의 각종 다양한 무기들과 그 재료가 가득한 장소였다. 타카스기의 팔뚝을 스친 검이 마력이 배인 피를 머금고 붓처럼 바닥에 둥그런 원을 그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무시하며 타카스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실험실 전체를 병기로 인식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최상의 형태로 상상하여, 타카스기 신사쿠의 일부이자 그가 다루기 가장 적합한 최적의 장소로 ‘개조’한다―
“―이노베이트.”
―!!!
무언가가 머리를 세차게 후려친 것만 같았다. 골뿐만 아니라 식도를 타고 내려가 폐를 쑤시고, 내장을 쥐어뜯고, 온 신경과 근육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한 통증이 몸을 마비시켰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타카스기의 입에서 시뻘건 선혈이 울컥 터져나왔다. 역시 무리였나? 공간이 너무 넓었나? 아니면 마력 부족이 원인인가? 아니면 첫 추리부터 틀렸나? 내가 개조할 수 없는 범위였다면? 차라리 아무 검이나 잡고 되는지 안 되는지 시험부터 해보는 게 나았으려나…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시야가 마침내 바닥과 가까워지며 크게 덜그덕거렸다. 쿨럭, 쿨럭, 식도를 타고 넘어오는 핏덩이가 뜨겁고 비렸다. 정말, 재수도 없지.
“……여전히 무모한 짓을 하는군.”
제 것이 아닌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퍼졌다. 어쩐지 기분 나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대꾸를 하기도 전에 타카스기는 의식을 잃었다. 얼핏 저를 향해 다가오는 그림자를 본 것이 전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