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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혼기를 172화까지 읽고 난 뒤에 쓰는 글입니다. 이후의 내용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진혼기를 추천해주신 otogi(@1120_)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기습 같은 질문이었다.
“너는 내가 사라지면 어떻게 살래?”
청예를 닦던 설영이 고개를 들었다. 말을 꺼낸 당사자는 불량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침대에 누워 한 팔로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비가 올 것 같으니 방문을 닫아두자는 말도 거부하고, 오랜만에 연주하려나 싶었던 거문고는 멀찍이 떨어트려둔 채다. 설영이 한심하단 눈으로 흘겨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게 왜 궁금하세요?”
“왜긴. 걱정되서 그러지. 나 떠나고 나면 춘광이 혼자 이 거칠고 험난한 세상 홀로 살아가야 하지 않니. 근심에 잠도 설친 눈이 보이지 않느냐?”
자하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었다. 밤을 설치긴 개뿔이. 지난밤에도 저를 물고 뜯느라 신나게 즐겨놓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푸짐하게 잔 주제에. 설영은 짜증을 적당히 뭉그러뜨린 어조로 대꾸했다.
“잘 살겠죠. 영기를 노리는 적수도 사라졌겠다, 못 살 게 뭐 있습니까?”
“설영랑, 혀에 비수 숨겨놨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푹푹 꽂혀드네.”
“먼저 물어본 건 상선이셨습니다.”
“아니, 우리가 이제 남이야? 서로 못 볼 거 다 보고 살도 섞은─”
청산유수처럼 말을 늘어놓던 입이 뚝 끊겼다. 청예가 그의 뺨 근처였던 곳을 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 벽에 박혔다.
“실례. 손이 미끄러졌네요.”
태연하게, 또박또박 말한 설영이 검을 거두어들였다. 진작에 고개를 틀어 피했던 자하가 궁시렁거렸다.
“정말 귀여운 구석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니까.”
“안 씻으셨잖아요. 방금 일어나셨으면서.”
“하여간 한 마디도 안 지는 거 하고는.”
마지막 말은 무시하고 설영은 청예가 잘 닦였는지 확인했다. 그의 속눈썹 개수도 셀 수 있을 만큼 잘 닦인 검신이 청아한 빛을 뽐냈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던 설영의 뒤로 누군가가 다가와 와락 목을 끌어안았다.
“설영랑.”
“위험하잖아요. 놔요.”
“정말로 너, 나 없이도 살 수 있어?”
설영이 흘긋 그를 돌아보았다. 또 장난기가 발동해서 이러나 싶었는데, 가까이서 마주한 금색의 눈동자는 생각보다 훨씬 진지했다. 어쩌다 불현듯, 아무 이유 없이 떠올라서 말을 던진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설영은 되레 난처해졌다. 자하가 마냥 가벼운 사람이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었다만, 답을 요구하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진중함이, 그를 받치고 있는 애정이 외면하기 어렵도록 짙었다. 청예를 집어넣는 척하며 설영은 슬쩍 눈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답을 추궁할 것 같던 자하는 의외로 별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도리어, 답을 내놓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시위 같아서 설영은 더욱 난감해졌다.
“상선이 없으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이변이 아니었다면 설영과 만나는 일조차 없었을. 설영은 이미 살면서 많은 이별을 겪었다. 산 자 외에도 떠나보낸 죽은 자들을 헤아리자면 두 자릿수로도 부족할 터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며, 익숙해지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허나,
“……당신이 없어지면…….”
산 자는 살아야 한다.
죽은 자를 위로하고, 떠나보내고. 그 모든 의식은, 죽은 자를 위한 뜻도 있지만 결국은 산자의 남은 생을 위함임을 설영은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차마 곧이곧대로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은근 섬세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리도 진지하게 물어보는 걸 보니 냉정하게 말하면 진심으로 토라지거나 화를 낼 게 불 보듯 뻔했다.
“……엄청 울겠죠. 거짓말 같겠지만, 많이 슬플 겁니다.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상선은.”
이것만은 사실이다. 자하가 세상에 없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켠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설영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작게 숨을 골랐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평생 마음에 묻고 살겠죠.”
하지만 곧 흐려질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슬픔은 오래 가지 않을지 모른다. 늘 그랬다. 비단 끝이 죽음이 아니더라도, 이별은, 헤어짐은 늘 그랬다.
“무슨 일이 있든, 상선이 있었다면 어찌했을까… 상선이 있었다면 무어라 말해줬을까…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떠오르는 것들을 추억하고, 되새기며 살겠죠...”
그러니까, 이것은 거짓말이다.
산 사람에게는 늘 당장의 앞가림이 급한 법이다. 떠올리며 아련해질 수는 있겠지. 보고 싶어질 날도 있겠지. 허나 설영은, 도저히 진심을 담아 말할 수 없었다. 더는 생각하기 싫은 것처럼 말 끝을 흐리면서 얼버무리는 게 고작이었다. 설영은 부러 그의 이마를 퉁명스럽게 밀어냈다. 마치 억지로 말을 꺼내게 만들어 토라진 것처럼. 다행히 그는 이것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거짓말. 연기. 아닌 것을 꾸며내는 궤변.
“자, 됐죠? 나참, 갑자기 분위기 가라앉게 왜 그런 걸─”
쌀쌀맞게 쏘아붙이던 설영은 우뚝 말을 멈추었다. 그는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하고 있었다. 자하는 어쩌면, 현세에서 설영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걸.
“당연히 그래야지.”
알아차렸다.
거짓을, 적당히 골라 늘어놓은 말들을 전부 알아듣고서.
세상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어디 다른 남정네나 여인이랑 놀아나기만 해봐라. 죽어서도 쫓아다닐 테니까. 사랑에 빠진 광인이 제일 무서운 거 알지? 적련랑하고는 비교도 안 될 거다. 너랑 다른 놈이랑 백호영도랑, 온 화랑들까지 묶어서 두고두고 괴롭힐 테니까 그렇게 알아.”
자하가 설영의 볼을 약하게 꼬집었다. 진심이라곤 하나도 묻어나지 않는 장난기 가득한 어조에 설영은 되레 말문이 막혔다. 다 알면서. 차라리 화를 내든가 구박이라도 한 바가지 할 것이지.
왜 행복하게 웃고 있는 거야.
“……상선께서는,”
말을 잇는 자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설영은 알 수 없었다.
“제가 없어지면 어떨 것 같나요?”
“응?”
뺨을 당기는 손이 멈춘다.
“상선이야말로, 저 없이 살 수 있어요?”
모든 근심을 내려놓은 것 같던 표정이 흐트러진다. 설영은 믿고 싶지 않았다. 저런 표정은 도깨비에게 씌였던 자신을 봤던 그 날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그는 죽은자, 설영과 자하 중 누가 대재앙신을 쓰러트린 끝에 남아 있을지는 자명했다. 그걸 알면서, 왜 저런 얼굴을 할까. 설영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의 웃음을 봤을 때부터 목구멍에 걸려 있던 것이 명치에 걸린 채 부풀어오르는 듯했다.
“당연하지.”
─거짓말.
“내가 원래부터 너 죽일 작정으로 쫓아다닌 거 잊었어? 어디 영기까지 내놓고 가봐라, 낼름 먹고 배 떵떵 두드리며 살지.”
─거짓말. 거짓말.
“……방금까지 정인이니 뭐니 해놓고 말이 그게 뭐에요?”
“아, 이런. 너무 본심을 말했네. 음…… 그래, 같이 살 붙인 세월이 있으니 그 시간만큼은 슬퍼해주마.”
“됐습니다. 한 달도 안 가겠네요.”
“이런, 설영랑. 화내지 마.”
도로 다가붙은 자하가 설영을 끌어안았다. 설영은 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음을 그가 알아차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리광부리듯 제 목덜미에 입술을 부비는 그가 고개를 들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사실 생각 안 해봤어.”
“……왜요.”
“나는 너보다 먼저 죽을 거니까.”
거짓말.
거짓말쟁이.
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하가 그를 좀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설영이 화가 났다고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었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그렇게 오해하게 두도록, 설영은 흐려지는 눈가에 힘을 주었다. 눈물 한 방울도 떨어트려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까 난 그런 생각 안 할 거다.”
“…….”
“그러니 너만 잘 지내라. 설영아. 산 자는 살아야지. 그치.”
네가 잘 아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자하는 그리 말하며 드러난 뒷목에 입을 맞췄다. 사람 속도 모르고, 뭐가 그리 좋은지 흥얼거리는 콧노래는 다정하고 상냥한 음색을 띠고 있었다. 울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시야에, 방금 보았던 자하의 표정이 생생하게 어른거렸다. 온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고작 상상만으로도 죽어버린 것처럼 어둡게 가라앉던 그 눈을.
‘─아, 난 절대로.’
설영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저를 안은 자하의 팔을 붙들었다. 작은 웃음 소리가 나직하게 귓가를 울렸다.
‘당신보다 먼저 가면 안 되겠구나.’
보여줄 수 없는 얼굴 대신 손가락으로 힘껏 그를 움켜쥐어, 마음을 전해보았다. 결코 먼저 놓지 않으리라. 설령 그가 이 팔을 뿌리치고, 손가락 사이로 물처럼 흘러나가 제 것이 아니게 되는 그 순간까지도.
두 거짓말쟁이가 마주보지 못하는 풍경, 굵은 빗방울이 느지막하게 마당을 적시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