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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지크)내가 오늘 죽더라도
Caption 1부 내가 오늘 죽는다면 , 2부 내가 오늘 죽을지 모르니까 에서 이어집니다. 육체적 상해, 치명상, 유혈, 성관계 언급, 캐릭터의 죽음 암시 등의 트리거 워닝 요소가 있습니다. 게임 스토리와는 무관한 오리지널 설정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뺨을 적시는 차가운 감촉에 지크하트는 눈을 떴다. 누군가가 그에게 숨을 불어넣듯, 어딘가에서 조금씩 떨어진 물방울이 뺨에 이슬처럼 맺히다 입술로 흘러들었다. 의식은 몽롱했고 몸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무거웠다. 마수들과 목숨을 걸고 치고받고 싸웠던 순간이, 멋대로 이어붙인 사진처럼 뒤죽박죽 섞여 뇌리를 떠다녔다. 진짜 용케도 안 죽었네. 얕은 숨을 천천히 고르던 지크하트가몸을 웅크리다가 낮게 신음했다. 여기저기 긁히고 깨물린 사지가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일어났나.” 무척 낯익은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지크하트는 기절하기 전 보았던 마지막 광경을 떠올렸다. 새카만 먹구름 아래 펼쳐진 날개는 눈이 부시도록 푸르렀고, 아름답게 뻗은 뿔의 형상도 그와 같은 색채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찾으려 시선을 옮기던 지크하트는, 곧 자신이 나무에 기대앉은 디오의 품에 안겨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날개가 둘을 덮듯이 둥글게 펼쳐져 있다는 것도. “……왜 니가 여깄냐.” 고맙다고 인사하라는 이성 대신 먼저 독설이 튀어나간 건 지독한 천성이었다. 디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죽어가는 걸 살려놨더니 먼저 하는 말이 그거인가.” “왜 여기 있냐니까.” “됐다. 입이 산 걸 보니 걱정할 필요도 없었군.” “지도 끝까지 대답 안 하면서…” 지크하트가 입을 삐죽였지만 잠시뿐이었다. 날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잔잔한 빗소리가 음악처럼 감미로웠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탈력감에 그를 밀어낼 용기도 안 나, 지크하트는 얌전히 안겨 있다가 툭 중얼거렸다. “추워.” “난 난로가 아니다.” “이럴 땐 그냥 조용히 안아주는 거야. 무드 없긴.” 디오가 다시금 혀를 찼다. 딱히 지크하트도 기대하고 던진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디오가 정말로 그를 더 꽉 안아주었으므로 지크하트는 오히려 놀라고 말았다. “농… 담이었는데.” “…….” “어… 음… 듣고 있어?” “아픈가?” “그건 아닌데…” “그럼 가만히 있어라. 나는 농담 아니야.” 그의 말을 몇 번을 곱씹어본 뒤에야 겨우 이해한 지크하트의 뺨이 뜨거워졌다. 입이 소리 없이 뻐끔거렸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몸이 무겁고 추운 게 싫다는 핑계로 지크하트는 얌전히 안겨 있는 쪽을 택했다. 조용해진 둘 사이를 조금씩 가늘어지는 빗소리가 섬세하게 채웠다. 몸이 좀 데워지자 여력이 생긴 지크하트는 그제야 제 몸을 살펴보았다. 크게 찢겼던 왼쪽 어깨와 옆구리는 검은 천자락으로 감겨 지혈되어 있었다. 그의 코트일 게 분명해 보이는 재질이었지만 지크하트는 넘어가주기로 했다. 아무래도 상대는 제대로 입은 게 없는 녀석인지라. 다급하게 뭐라도 찾아 헤맸을 디오를 상상하면 퍽 우습기도 했다. 평생 상처는 신경도 안 쓰고 살았을 녀석이 어떻게 처치법은 알아가지고. 그러고 보니 피투성이가 되었던 얼굴도 제법 멀끔하고 개운했다. 급한대로 피가 굳기 전에 닦아준 모양이었다. 하나하나 알아갈수록 그가 세심하게 신경 써준 구석이 많아, 지크하트는 자꾸만 들썩이는 마음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이렇게 잘해줄 필요 없는데. 이렇게까지 상냥하게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비가 그치면 움직일 테니 조금만 더 참아라. 체온이 낮아서 바로 움직이는 건 좋지 않아.” 지크하트는 디오가 왜 석상처럼 가만히 있었는지 깨달았다. 안 그래도 복잡했던 마음이 더 어지러워진 건 덤이었다. 바보 같은 건지 다정한 건지. 지크하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생각해둔 것도 많았던 것 같은데. 그 어떤 것도 지금은 섣불리 형태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이건 왜 그냥 놔뒀지.” 무슨 얘기인지 물으려는 찰나 디오의 손가락이 먼저 입술에 닿았다. 그와 떨어진 후로 하도 물어대서 딱지가 채 앉지 않은 상처였다. 둘러대긴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에도 없는 말이 고집스레 먼저 튀어나갔다. “내 맘이야.” “얼굴이 반쪽이 된 건 아나? 이것 때문에 제대로 식사도 못한 거 아닌가.” “잠을 잘 못 자서 그래.” “그러게 나약한 녀석이 왜 그리 돌아다녔지? 미련함도 정도껏이지, 고생을 사서하는군.” “니가 엘리시스야? 쓸데없이 잔소리만 늘어선.” 지크하트가 심술궂게 머리를 그의 가슴에 툭툭 부딪혔다. 한심하단 듯이 그를 내려다보던 디오가 이내 손을 거뒀다. 턱까지 차올랐던 한숨이 쏙 들어갔다. 이번에는 고집도 진심을 꺾지 못했다. “……아프긴 더럽게 아픈데, 아프면 네 생각이 나더라.” 디오가 도로 제 품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지크하트는 가슴팍에 얼굴을 묻듯이 숨겨버린 뒤였다. “그래서 그랬어.” “…….” “그러니까 화내지 마.” 할 말을 찾지 못한 디오의 시선에 조금씩 그늘이 드리웠다. 마지막 목소리가 묘하게 풀죽은 것처럼 들린 것은 기분 탓이었을까. 결국 숨을 길게 토해내며 디오가 그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화 안 났다.” 이번엔 지크하트가 입을 다물 차례였다. 날개가 좀 더 둥글고 좁게 말렸다. 둥지처럼 아늑하고 따뜻한 공간 안에서 지크하트는 눈을 내리감았다. 비가 점점 그쳐가고 있었다. 지옥 같았던 새벽이 지나고 오후가 되서야 디오는 지크하트를 업고 그곳을 벗어났다. 목적지로 가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지크하트에게 디오가 패배한 것이었다. “너 진짜 후회한다? 분명 경고했어.” “됐으니까 길이나 안내해라, 하이랜더. 싫으면 이대로 돌아가든가. 날아서 가면 금방 도착하겠군.” “환자한테 인정사정 없구만… 지독한 놈…” “내가 할 말이다만?” 어쨌든 디오가 한 발 양보했으니 지크하트도 더는 내뺄 여지가 없었다. 그의 안내를 따라 디오는 빛이 거의 안 닿는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동굴로 들어설 때까지도 디오는 불평 한 마디 없었다. 몸의 마력이 짓눌리는 느낌을 받은 건 이미 입구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온 다음이었다. “하이랜더들이 마기에 많이 노출되거나 치유력이 떨어졌을 때 들르는 곳이야. 나도 예전에 두 번 정도 신세졌지.” 디오가 발걸음을 멈췄다.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스쳐갔다. 이제 좀 겁이 나냐? 지크하트가 놀리듯 덧붙였을 때도 디오의 불안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디오의 변화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지크하트가 무심하게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제 내려줘.” “…아직 걷기 힘들지 않나.”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야.” 디오는 이번에도 고집에 졌다. 등에서 내린 지크하트가 비틀거리다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안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나 하이랜더 시절에 느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마기가 그를 짓뭉개 터트리는 압박감이라면, 이것은 그를 여러 겹으로 조각내버리는 살벌함이랄까.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버거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지크하트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넌 여기서 기다려. 아니면 입구로 돌아가든가. 난 신경 쓰지 말—” “하이랜더들에게 허락된 곳이라면,” 디오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전과 달리 부드럽고도 연약한 힘이었다. “인간이 가면 어떻게 되지?” 마족보다 인간이 먼저 불안한 가정 위에 올랐을 때, 지크하트는 쓴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이랜더가 이 신성한 장소를 거처로 삼지 않았던 이유는, 이곳의 신성력이 지나치게 날것인 까닭이었다. 과함은 약이 아닌 독이 되는 것은 세상의 당연한 이치다. 신성한 기운에 취하여, 열흘을 내리 머물렀던 하이랜더가 기어이 미쳐서 제 몸을 수십수백의 조각으로 도륙내어 소멸을 택했다든가. 신성력이 넘치게 된 하이랜더가 마기에 치명적으로 약해져 마족에게 저항 한 번 못하고 농락당했다든가. 그런 곳에 인간이 가면 어떻게 되냐고? 디크하트가 대답하지 않는 사이 디오가 초조하게 손목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글쎄. 해봐야 알겠지.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하이랜더였던 인간이잖아?” 결국은 본인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디오가 고개를 흔들었다. “가지 마라. 위험하다.” “하지만 지금은 이 방법뿐이야. 포기할 수 없어.” “다른 답이 있을지도 모르잖나. 너도 장담할 수 없는 확률에 목숨을 걸겠다는 건가?” 그의 어조는 답지 않게 초조하고 필사적이었다. 지크하트는 손목을 내어주고 한참 멈춰 있었다. 분노가 아닌 우려. 매몰찬 거절이 아닌 망설이는 불안. 잡힌 손목으로부터 온기와 함께 전해지는 감정이 되레 지크하트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그가 여기까지 와야 했던 이유. 만신창이가 되어가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지금 그의 앞에 있었다. “오늘 죽을지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디오 버닝캐니언이라는 이름의 마족으로. “죽더라도 가만히 떠는 것보다는 이게 나아.” 한 대 맞을 각오를 하고 털어놓았는데도 디오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에 반해 지크하트는 얄밉도록 후련하고도 평온했다. 할 말은 다 전했다. 마음도 정했다. 도박이란 이름에 갈등하던 불안함은 디오에게 떠넘겨버렸다. 이제는,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작별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될 거라 의심치 않았었다. 디오가 대뜸 폭탄 선언을 하기 전까지는. “나도 간다.” “미쳤어? 아니, 내 말 듣기는 한 거야? 여기는,” “이딴 힘으로는 이 몸을 죽일 수 없다.” “그거야 그렇겠지! 그렇… 겠지만……” 지크하트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일개 마족도 아니고 무려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의 장자이자 온건파의 수장이다. 말마따나 디오가 장소의 기운에 눌려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꾸만 망설이는 지크하트를 향해, 성큼 다가선 디오가 손목을 다시금 고쳐 쥐었다. 여전히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혼자 가지 마라.” 지크하트는 자신이 가득 담긴 붉은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보고 말았다. 그가 떠넘긴 망설임까지 전부 지워버린 디오의 시선은 단단하고 고요했다. 결국 지크하트가 먼저 두 손을 들었다. “……마음대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