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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위 묘사 + 육체적 상해의 묘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디오랑 지크하트는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사이입니다.
지크하트는 방에 놓인 거울을 한참 응시하고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방에 혼자건 말건 오늘도 나는 잘생겼다느니, 어딜 가도 인기 있는 죄 많은 남자라느니 신나서 떠들어댔겠지만 그런 너스레도 잘 나오지 않는 날이었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이목구비와 보랏빛이 감도는 흑발. 매다 만 넥타이는 셔츠 칼라에 대충 걸려 있고, 단추를 잠그지 않은 흰 셔츠 안으로는 이십대에 멈춰버린 청년의 다부진 골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육백 년 남짓한 세월 동안 질리도록 봐온 모습이었다.
“…….”
지크하트는 침대에 거울을 내던지고는 입을 가리듯 턱을 괴었다. 어떤 말이든 쉽게 내뱉지 못하는 이유는 당사자인 그가 상황을 이해하지도, 납득하지도 못한 탓이었다. 그저 착각일지 모른다. 기분 탓일지 모른다. 마리에게 검사라도 부탁하지 않는 한은 절대 속단할 수 없다… 무심한 얼굴로 생각을 거듭하던 지크하트는 침대에 기대 놓은 검으로 눈길을 돌렸다. 손을 뻗자 그것은 굉장히 손쉽게 잡혔다. 손때 묻은 손잡이 대신 움켜쥔 칼날은 금세 손가락과 손바닥에 날카로운 상처를 남겼다. 붉은 선혈이 날을 타고 물처럼 흘렀다. 깨진 유리병에 담긴 물처럼, 주워담을 수 없이 흘러가 바닥에 둥그렇게 고이는 자신의 핏물을 지크하트는 여전히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
뒤늦게 허탈한 숨이 터져나왔다. 지크하트는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새하얀 이불에 붉은 자국이 선명하고 또렷하게 번져나갔다.
하이랜더의 축복이 사라졌다.
“이봐. 하이랜더.”
“자느라 안 들려.”
“헛소리 그만하고 복귀해라.”
지크하트가 단독 행동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최근은 줄곧 이동하지 않고 숙소에 머물러 있었으니 크게 문제될 일도 아니었다. 누가 내다버린 것처럼 들판에 심드렁하게 엎어져 있는 지크하트를, 못마땅한 눈으로 올려다보던 디오가 귀찮다는 듯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에게 들었다. 이번 검진은 하기 싫다고 했다지.”
“뭐 그런 걸 너한테까지 얘기한대냐. 걔도 은근 입이 가벼워.”
“애초에 네가 잘했으면 내 귀에 들어올 일도 없었다.”
쏘아붙이는 말투가 제법 날카로웠다. 마리가 둘의 사이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둘째치고서라도, 지크하트가 싫어할 걸 뻔히 알면서 제 3 자인 디오에게 협조를 구할 정도다. 자세한 상황은 몰라도 지크하트가 속을 썩였을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게다가 다들 대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 지크하트가 밖을 쏘다니는 빈도가 많아졌다는 사실은 대충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건지. 디오는 한숨을 푹 쉬며 팔짱을 꼈다.
“이 몸이 왔으니 망정이지, 다른 녀석들에게 알려지면 귀찮아지는 건 네놈 아닌가?”
“흐음. 그것도 맞는 말이군.”
“알았으면 얌전히 돌아가라.”
“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어린애도 아니고… 전에 주삿바늘이 아프다 뭐다 하며 엄살을 부렸다더니 그것 때문인가. 디오는 골치 아프단 표정을 지었지만 곧 미간을 누르려던 손을 멈추었다. 지크하트가 몸을 일으켜 앉은 것도 그때였다. 꾸물꾸물 일어나 앉는 몸짓이나, 관절 이곳저곳을 돌리고 팔과 손을 주물거리는 동작이 평소보다 묘하게 굼떠 보였다. 혹시 정말 어디가 아픈 건가. 그러고보니 왜 검진을 거절했던 걸까? 하이랜더도 병에 걸리나? 몰려오는 고민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사이, 지크하트가 휙 고개를 돌려 디오를 보았다. 유달리 창백한 낯빛에 심장이 쿵 울리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야, 애송아.”
“!!”
지크하트가 디오의 팔을 잡아당겼다. 유달리 센 힘이 아니었는데도, 디오는 어느새 볼썽사납게 그의 위에 엎어져 있었다. 바닥에 누운 지크하트가 날렵하게 몸을 뒤집어 디오의 위에 올라탔다. 부딪힌 뒤통수와 등이 조금 얼얼했지만 잠시뿐이었다. 지크하트가 넥타이를 풀며 피식 웃었다.
“할래?”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언제 키스를 처음 했는지, 처음 몸을 섞은 이유가 무엇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둘은 자주 관계를 가져왔었다. 사귀는 것도, 그렇다고 서로 플레이메이트를 하자고 합의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느 한쪽이 원하면 상대가 거절한 적도 없었다. 습관처럼 멍하니 지크하트를 올려다보던 디오는 그의 머리 위로 파란 하늘이 보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미쳤나 하이랜더? 여기 밖이다!”
“뭐 어때. 아무도 안 올걸. 아니면 얼른 하고 끝내면 되잖아.”
“네놈…!”
셔츠의 단추를 한 손으로 풀어내리며 지크하트가 디오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너무 속사포로 진행되는 바람에 디오는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겨우 이성을 찾고서야 지크하트의 마른 손목을 꽉 움켜쥔 디오가 그를 뿌리치려 했지만 이번에도 지크하트가 빨랐다. 입을 덮듯이 내리누른 지크하트가 그의 뿔을 더듬어 쥐다가 이내 머리를 꽉 감싸안았다. 더 피할 수도 없게 된 디오의 눈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아직까지도 통증을 숨기려 애써 덤덤하게 가장한 지크하트의 표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읍…”
마족의 송곳니는 뾰족하고 인간의 살갗은 지나치게 물렀다. 도톰한 아랫입술과 혀에 긁힌 자리에서 피가 샘솟았으나 지크하트는 디오를 놓아주지 않았다. 자꾸만 망설이는 혀를 매달리듯 빨아대고 하반신을 부비자 그를 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손목의 뼈가 으스러지고 근육이 뒤틀리는 통증이 따라왔지만 지크하트는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도 왜 이런 자해 같은 행위를 몰아붙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앞에 있어서, 그라면 자신이 부서지기 직전까지, 혹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힘껏 안아줄 것 같아서. 숨이 가빠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타액이 흥건하게 흘러 두 사람의 턱을 적셔도 지크하트는 몇 번이고 디오에게 달라붙었다. 디오가 간신히 그를 떼어낸 건 체력이 먼저 떨어진 지크하트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에게 기대온 탓이었다.
“하, 후… 네놈, 누가 그렇게 멍청하게…”
볼멘소리로 내뱉던 디오가 멈칫했다. 제게 줄곧 붙잡혀 있던 그의 손목에 피멍이 새파랗고 또렷했다. 손 끝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덜덜 떨렸고, 반쯤 꺾이다시피 한 손목은 벌써 조금씩 부어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언제부터 그랬던 건지, 마디 안에 남은 상흔에서 피가 스물스물 번지는 중이었다. 디오는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머리가 새하얘졌다. 지크하트를 정말 죽일 생각으로 두들겨팼던 날에도 지크하트가 이 정도 상해를 입었던 적은,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계에서는 몸이 무겁다고 아무리 투덜대도, 피를 토할 만큼 중상을 입어도 다친 순간부터 낫기 시작하던 육신을 디오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힘주어 잡은 정도로 이 정도의 부상이라니.
“뭐해? 마저 해.”
디오의 정신을 차리게 만든 건 우습게도 재촉하는 지크하트의 목소리였다. 디오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씹어뱉듯 내뱉었다.
“어떻게 된 거지?”
“하… 오늘따라 말이 왜 이렇게 많아. 그냥 하자면 하자, 좀.”
“정신 차려라, 하이랜더. 몸이 이렇게 됐는데 아직도 그런 말이 나오나?”
디오가 지크하트의 손목을 그의 눈앞까지 끌고왔다. 팔이 당겨지는 감각에 그제야 눈을 찡그린 지크하트가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디오의 손가락 모양이 또렷한 피멍이 자못 우스꽝스럽게 느껴졌지만 웃음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조금씩 말이 없어진 지크하트가 고개를 숙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언제부터 이런 거냐.”
“…….”
“검진을 안 받겠다고 한 게 이 때문이었나?”
“…….”
“어린애처럼 굴지 마. 아니, 이제 네 의견은 필요 없다. 네가 싫다면 내가 데려가주지.”
디오는 왜 화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를 안고 일어나기 직전, 지크하트가 디오를 밀쳐버렸을 때도 치솟는 분노의 원인을 알지 못했다. 굴러떨어지듯 주저앉은 지크하트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안 죽고 싶었던 건 아닌데, 딱히 살고 싶었던 것도 아니라서. 딱히 관심 끌고 싶진 않네.”
“하이랜더!!”
“혹시 또 모르잖아. 내일이면 원래대로 돌아올지. 그냥 즐기면 되잖아? 네가 언제 이 몸에게 이런 상처를 내보겠어. 아, 아무래도 사람이 복상사로 죽는 건 좀 싫어?”
디오가 지크하트의 멱살을 곧장 움켜쥐지 않은 건 순전히 그가 이미 만신창이였던 까닭이다. 하이랜더가 아닌 인간은 너무도 무르고 연약했다. 화로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순간에도 디오는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너덜너덜하게 축 늘어진 손과, 아직도 피가 굳지 않은 찢어진 입술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에게 손을 대고 싶은 마음도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디오의 그런 모습이 지크하트에게는 역으로 상처가 되었다. 아마도 가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영영 그는 자신에게 손대지 않을 것이다. 주먹다짐을 하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그는 쓸데없게도 마족치고는 예의가 정말 바르고 신사적이었으니까. 그러니 다시는…
……어쩌면 영영…
“오늘 내가 죽으면 이 순간이 아쉽지 않겠어?”
마음에도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누구에게 하는 건지도 불분명한 말이었다.
“나 아니면 누가 너 같은 애송이랑 놀아줘.”
“…적당히 해라. 두들겨패서 데려가기 전에.”
“해보든가. 왜, 진짜 죽으면 이런 것도 못할까봐 무서워?”
“그만해.”
“오늘 내가 죽어버리면―”
“지크하트!!”
영원 같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무심하게, 자리에서 휘청거리며 일어난 지크하트가 부어오른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손목에 은은한 통증이 전해졌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지크하트는 끝까지 디오의 눈을 보지 못하고 돌아섰다. 그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차마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안.”
목적어가 빠진 사과를 남기고 지크하트는 걷기 시작했다.
“다른 애들에겐 잘 말해줘라.”
디오가 그 말에 동의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지크하트는 무작정 달려나갔다. 반쯤 풀어헤쳐진 넥타이를 쥐고 뛰는 꼬라지가 허탈할 정도로 우스꽝스러웠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손목이 비명을 지르듯이 시큰거렸다. 이제는 제가 짓고 있을 표정조차 지크하트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지크하트는 그랜드체이스를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