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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tion 1기 이전의 시점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커플링이 존재하지 않는 논커플링 글입니다. 세츠나를 비롯한 마이스터들의 이야기입니다. "아, 잠깐만. 세츠나. 여기서는 ch가 아니라 ts로 쓰는 거야. 그래, 츠- 하고…" "…아까는 맞았다고 하지 않았나?" "치-처럼 입이 길게 벌어지는 건 ch가 맞아. 하지만 세츠나 네 이름의 츠는 아니지? 그럴땐 t와 s와 u로…" 빼곡히 글씨가 쌓인 종이 아래에 수려한 글씨가 사각거리며 내려앉았다. 필기체가 더 어울릴 법한, 위를 가득 덮은 삐뚤빼뚤하고 큼지막한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달필이었다.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던 세츠나가 눈만 흘긋 들었다. 들고 있던 펜을 돌려 내민 록온이 빙긋 웃었다. "알겠어? 이게 '츠'야." "…모르겠어." "그래도 ch를 쓸 수 있게 했다는 것만도 장족의 발전이야." 반대편에 서 있던 알렐루야가 웃으며 턱을 괴었다. 오늘만도 벌써 세 번째의 지적이었지만, 록온과 마찬가지로 알렐루야도 그의 실수엔 마냥 너그러운 얼굴이었다. 잠시 록온의 필체를 뚫어져라 보던 세츠나가 다시 글씨를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어린애가 주먹을 쥐듯 펜을 꼭 말아쥔 네 손가락이 제법 비장함을 품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웃은 록온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컵을 내려놓았다. 종이를 스치는 펜의 사각거림의 끝에 무거운 소리가 마침표처럼 찍혔다. "세츠나. 잠깐. 펜 쥐는 법부터 다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세츠나에게 손을 뻗던 록온이 고개를 돌렸다. 티에리아가 예의 깐깐한 눈초리를 하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만 써야 하는 회의실을 이런 사소한 일로 쓰다니, 하는 잔소리가 벌써부터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웃음부터 머금는 록온 대신 알렐루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아, 티에리아. 세츠나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있었어." "글?" 티에리아가 무테 안경 속의 눈을 찡그리며 세츠나를 보았다. 세츠나는 여전히 눈 앞의 종이에 코를 박다시피 한 상태였다. 록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더라고. 쓰는 법도 읽는 법도." "…글도 읽을 줄 모르는 자가 건담 마이스터로 뽑혀왔다고?"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지금 열심히 가르치고 있잖아. 배우는 게 빨라서 금방 익힐 것 같은데." 그래도 티에리아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예상했던 반응에 록온과 알렐루야는 말없이 쓴웃음을 지으며 시선만 교환했다. 건담 마이스터로서의 자부심이 누구보다 높은 그에게 동료가 문맹이라는 말을 듣는 것만큼 충격적인 일이 또 있을까. 알렐루야나 록온이 세츠나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와는 느껴지는 감정이 확연히 다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당사자는 말이 없었지만, 알렐루야가 대신 변호하듯 입을 열었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천천히 익히면 된다고 생각해. 태어날 때부터 글을 알고 태어난 사람은 없잖아? 그러니까…." "모르겠군. 내게 글을 몰랐던 기억 같은 건 없다." "그… 건… 굉장하네…." 록온은 그만 웃고 말았다. 할 말을 잃어버린 알렐루야에게 실례라는 건 알았지만, 칼 같이 떨어진 티에리아의 대답이 너무 그다웠던 탓이었다.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는 알렐루야에게 급히 두 손을 들어보인 록온이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입을 가볍게 문질렀다. 책상으로 다가온 티에리아가 무뚝뚝한 시선으로 세츠나를 내려다보았다. 세츠나는 아직도 글자 쓰기에 여념이 없었다. 옆에는 록온이 미리 골라주었던 '오늘 익혀야 할 단어 10가지'의 목록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래서 내겐 비밀로 해놓고 셋이서 비밀 임무라도 수행하고 있었단 건가." "미안, 미안. 티에리아 네가 알면 화낼 것 같았거든." "당연하지. 마이스터가 배워야 할 지식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않나, 록온 스트라토스. 기초적인 것도 안 된다니 마이스터의 수치다." "그래도 좀 봐줘. 세츠나도 여러가지로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니까." 록온은 세츠나에게 처음 사실을 들었던 날을 떠올렸다. 당연하게 세츠나에게 재밌을 거라며 아동용 도서를 골라준 날이었다. 무심하게 화면을 넘기던 세츠나는 곧 읽을 수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고, 록온은 당연히 만만찮게 놀랐다. 기껏해야 내용이 재미없다거나 흥미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전혀? 네 이름도?' '몰라. 전엔 배웠던 것 같은데, 잊어버렸다.' '허어. 요즘 세상에 흔치 않은 일인데. 그럼 뭘 배운 거야? 어른들한테.' '총을 분해하고 맞추는 법. 움직이는 사람을 쏘는 법.' 망설이지 않고 나온 대답에 록온은 잠시 말을 잊었다. 고작 십대의 중턱에 겨우 걸친, 한참은 어린 소년의 말은 현실보다 냉혹했다. 세츠나는 그것만 말하곤 입을 다물었지만, 록온도 더 묻지 않았다. 솔레스탈 비잉의 규칙을 떠나서, 록온은 자신의 처지가 어떤 줄도 모르는 담담한 눈동자 안에서 더 많은 걸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다. 동정이나 슬픔의 빛을 드리우는 대신, 소년답지 않은 그 눈을 한참 들여다보듯 응시하던 록온은 뒤늦게 웃음 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츠나에게 손을 내밀어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럼 배워볼래? 글 쓰는 법.' '…당신이 가르쳐주겠다고?' '그래. 건담을 다루는 데에도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전장에서는 쌓은 실력만큼이나 지식도 도움이 되거든.' 세츠나는 록온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분명 '건담을 다루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다'란 말이 효과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철자를 읽고 쓰는 법부터 시작된 공부가 벌써 열흘 째였고, 사흘 째 되던 날엔 알렐루야도 동참하면서 세츠나의 실력은 꽤 많이 늘었다. 머리가 원래 좋았던 건지 세츠나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부쩍 늘고 있었다. 적어도 일 년이 지나면 어지간한 글은 다 읽게 될 거라는 게 록온의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열심히 배우고 있으니까 금방 또래 애들처럼 능숙해질 거야.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돼." "……."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몰아세우지 마, 티에리아." 록온이 달래듯 말을 붙였지만 티에리아의 눈썹 끝은 날카롭게 올라간 그대로였다. 역시 불똥 떨어지려나. 쓰게 웃은 록온이 해답을 찾듯 알렐루야를 보았지만 알렐루야도 맥없는 미소만 지어보일 뿐이었다. 세츠나와 록온이 쓴 종이를 번갈아 바라보던 티에리아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시작인가. 저도 모르게 긴장한 록온이 가볍게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말아쥐었을 때였다. "틀렸다. 세츠나 F 세이에이. s 뒤에 h." "…h? 이거 말인가?" "그건 k다. 발음부터가 다른 철자를 헷갈리지 마. k는……." 세츠나에게서 펜을 건네받은 티에리아가 곧 속사포로 설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눈을 커다랗게 뜬 알렐루야가 그런 티에리아를 빤히 응시하다가 흘긋 록온을 보았다. 록온도 드물게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새 세츠나에게 바짝 다가붙은 티에리아가 연신 종이에 뭔가를 써내렸다. 현 사태에 제일 놀랐을 세츠나는 정작 알렐루야나 록온과는 비교도 안 될 태연함으로 진지하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비로소 손에 힘을 푼 록온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돌아온 알렐루야가 미소 지으며 그의 곁에 섰다. "아무래도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지?" "그러게. 우리가 티에리아를 너무 몰랐던 모양이야. 반성해야겠어." 어깨를 으쓱인 록온이 다시 둘을 보았다. 이제 티에리아는 하루에 열 개가 아니라 스무 개는 외워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짜증도 안 내고 고개를 묵묵히 끄덕인 세츠나가 외운 단어에 조그맣게 동그라미를 쳤다. 살짝 들린 새하얀 소매가 윤기가 흐르듯 반들반들했다. 재차 웃은 록온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는 벽에 등을 기댔다. "세츠나가 좀 고생하겠군. 교사가 셋이나 늘어서." "그래도 록온만 할까.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내가 뭘. 괜한 오지랖을 좀 떨었을 뿐이지." "그래도 세츠나에게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자상한 사람이 이끌어줘서 뭔가를 시작하게 되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잖아." 알렐루야의 눈꼬리가 아래로 쳐졌다. 그는 인체 실험을 당할 때 강제로 지식을 주입받았다고 했었다. 그를 개조한 사람들은, 효용성을 중시하여 만들어진 병사에게 시간과 공을 들여서 글을 가르치고 싶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말없이 알렐루야를 살피던 록온이 다시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그가 세츠나를 부러워하고 있음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공부를 돕겠다고 나선 건 그의 선의였을까, 아니면 대리만족을 위함이었을까. 록온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세츠나를 다그치지 않고 끼어들어준 티에리아 만큼이나. "누군가를 자상하게 가르쳐주는 것도 흔치 않은 경험이지. 안 그래, 알렐루야?" "본인 이야기?" "네 이야기잖아. 나참. 왜 꼭 중요한 타이밍에서 어긋나는지 원. 우리 사이도 한참 멀었어." 록온이 부러 투덜거리자 알렐루야가 조그맣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보다 훨씬 가벼운 울림이었다. 조용히 미소 지은 록온이 다시금 팔짱을 끼고 머리를 맞댄 세츠나와 티에리아를 보았다. 펜을 고쳐쥔 자그마한 손이 훨씬 더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좋은 경험이지. 이런 건. 입 속으로 조그맣게 중얼거린 록온이 흐뭇하게 웃었다. 미리 만들어두었던 단어장을 두 배로 불려야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그것조차도 마냥 즐거운 한때였다. * 알람도 채 울리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 해가 없는 우주에서 시간을 확인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우주의 생활에 제법 익숙해진 록온은 눈을 뜨자마자 직감이 알려주는 시간에 혀부터 찼다. 어제 밤늦게까지 단어를 고른다고 평소보다 늦게 잠들었건만 어째선지 의식은 놀랍도록 맑았다. 도로 잠들 작정으로 눈을 감아보았지만, 오 분도 안 되어 포기한 록온은 곧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 잠들기 어중간한 시간이라면 차라리 깨어 있는 편이 나았다. 모닝 커피부터 한 잔 마시고 모의 사격이라도 할까. 가볍게 손목을 돌려 스트레칭한 록온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지상이었다면 푸른 이슬과 서늘한 기운으로 메워져 있었을 복도가 지금은 잠들기 전과 다름 없이 고요하고 잠잠했다. 새벽의 공기를 마실 수 없는 제 처지에 유감을 표하며, 길게 이어진 복도를 헤엄치듯 나아가던 록온이 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건너편의 회의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빈 통로와 달리 인기척이 명백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설마?" 록온은 식당을 지나쳐 그곳으로 다가갔다. 기계로 만들어진 미닫이 문틈으론 빛도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록온은 제 확신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스위치 한 번에 손쉽게 열린 문에서 역시나, 환한 빛이 쏟아져내리며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를 덮쳤다. 잠시 눈을 감았던 록온이 눈꺼풀을 들어올림과 동시에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등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세츠나. 설마 밤새도록 여기 있었던 거야?" 세츠나는 말도 없이 고개만 돌려 그를 보았다. 짙은 주홍의 눈동자에 피곤한 기색은 조금도 없었지만, 아무래도 그의 짐작은 사실인 듯했다. 한숨을 내쉰 록온이 다가와서 그의 곁에 섰다. "아무리 티에리아라도 밤새도록 공부하라곤 하지 않았을 텐데. 왜 그랬어?" "쓰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 거라면 내일 써도 되잖아." "완벽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어. 조금만 더 하면." "뭘 쓰고 싶었는데?" 말하며 록온은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수북히 쌓인 종이 옆에 비교적 매끈한 종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밤을 새워서까지 쓰고 싶었던 게 뭐였을까. 록온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녹음을 닮은 눈동자가 여백에 큼지막하게 놓인 글자를 훑었다. 모음과 자음이 꽤 정확하게 놓여 있었다. 어쩐지 록온 그의 필체를 따라 쓴 것 같기도 했다. "이름인가? 소란…" "소란 이브라힘." 세츠나가 담담히 읊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철자를 버벅이던 그가 제대로 글자를 썼다는 것에 록온이 한 차례 놀란 찰나였다. "내 이름." 록온은 그의 이름은 세츠나가 아니었느냐고 바보처럼 되묻지 않았다. 그저 놀란 눈을 세츠나에게 옮겼을 뿐이었다. 말없는 질문을 던지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세츠나가 펜을 잡고선 이름에 죽죽 선을 그었다. 모처럼 잘 쓴 걸 왜 지우냐고 타박을 할 만도 했지만, 록온은 지금은 그저 세츠나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세츠나가 그 밑에 다시 무언가를 적었다. 이번엔 록온도 아는 글자였다. '세츠나 F 세이에이' "내 이름." 다른 수식어는 일절 없는 반복이었다. 그래도 분명 무게가 다른 말이었다. 세츠나가 펜을 내려놓았다. 종이에 펜이 내려놓이는 소리가 유독 크게 회의실을 울렸다. "이제 됐어." "……." "당신에게 감사해. 록온 스트라토스." 세츠나의 얼굴은 여즉 덤덤했다. 웃거나 울기는 하는지, 언제고 한 번은 염려했었던 무심함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럼에도 록온은 지금만큼은 그에게서 명백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만족감. 혹은 후련함. 밤을 새어서라도 기어이 쓰고 싶었던 것은 그저 철자 몇 개만은 아니었으리라. 록온은 느리게 미소했다. 씁쓸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복잡한 웃음이었다. "…아니. 그런 인사를 바라고 한 건 아니니까, 하지 않아도 돼. 그보다 피곤하지 않아? 밤새도록 썼을 텐데. 손은 안 아프고?" "손은 아프지 않아. 펜은 총보다 가벼워서 힘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말을 잇던 세츠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은 말라." "그거 잘 됐네. 지금 커피 마시러 갈 참이었거든. 같이 갈까? 우유 따뜻하게 데워줄게." 고개를 끄덕인 세츠나가 먼저 그를 지나쳐갔다. 곧장 그를 뒤따르려던 록온이 흘긋 책상 위로 시선을 던졌다. 세츠나가 써 놓은 이름이 면적보다 더 크게 시야에서 어른거렸다. 영영 못 잊을 글자였다. 이미 까맣게 칠해져 보이지 않는 다른 이름마저도. 착잡하게 그걸 바라보던 록온이 이윽고 몸을 돌렸다. 다시 입을 열었을 무렵엔 그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쾌활해져 있었다. "세츠나! 같이 가야지! 혼자 하면 손 데인다!" 록온의 뒤로 문이 닫혔다. 그제야 불이 꺼진 방이 이름을 끌어안고 침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