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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 이전, 솔레스탈 비잉의 계획이 시작되기 전입니다.
서로가 연애감정을 갖기 전의 이야기로, 커플링적인 묘사는 거의 없습니다.
캐릭터 - 특히 티에리아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과 설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종종 감각이 날카로워질 때가 있었다. 도리어 제가 베일 만큼 사방으로 뻗어나간 예리함이 매인 실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때가.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과민한 확장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자고 있을 때, 베다와 접촉하고 있을 때, 아주 드물게는 전투 중일 때에도. 타인에게 말하는 건 상상도 못할 개인적인 고충이었다. 꽤 오랜 노력 끝에 티에리아는 그 순간을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게 되었으나, 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것까진 무리였다. 쓸데없어. 머리를 덮치는 통증이 도져오는 날이면 티에리아는 버릇처럼 중얼거렸다. 불시에 잠이 깨고 만 오늘도 예외는 없었다.
"그것보다… 방금 그건 대체 뭐였지?"
미간을 꾹꾹 누르던 티에리아가 눈을 찡그렸다. 의미 없는 신경 과민이 그를 깨우는 일은 곧잘 있었지만 이렇듯 강렬한 자극은 처음이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티에리아는 한참 후에야 자기를 깨운 것이 사람의 비명이었음을 깨달았다. 그것도 분명 남자의 목소리였다.
"세츠나 F 세이에이, 알렐루야 햅티즘… 랏세 아이온…"
자신이 알고 있는 남성들의 이름을 차례로 읊던 티에리아는 곧 눈을 찡그렸다. 알렐루야는 자주 발작을 겪는 만큼 제일 유력한 후보긴 했지만 그의 음색은 확실히 아니었다. 세츠나나 랏세는 의심부터 가지 않았다. 느낌상으론 분명 톨레미 안에서 들린 것 같았는데. 잠시 고민하던 티에리아는 곧 생각을 포기하고 침대에 도로 누웠다. 내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훈련할 게 산더미였다. 잠깐의 우연한 사태로 시간을 낭비하기엔 잠은 너무 짧았다. 그냥 자자. 더 신경 쓰지 말고. 그리 생각하며 티에리아가 옆으로 돌아누우며 눈을 감았다. 고슴도치 가시마냥 바짝 곤두서 있던 감각은 이제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티에리아는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탁상 위의 안경을 낚아채고 가디건을 집어드는 손길이 전에 없이 부산했다. 이어 문을 열고 방을 빠져나가는 그의 눈엔 더 이상 졸린 기색은 없었다. 어두운 복도를 능숙하게 빠져나가는 티에리아가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뒤늦게 알아차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와 제법 멀리 떨어진 방을 쓰고 있었다. 금방 깨닫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티에리아가 알고 있는 그 남자는 이런 돌발상황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니까. 무테 안경 속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가늘어졌다. 코너를 돌아선 몸이 이내 근처의 문앞에 부드럽게 멈추었다.
"록온 스트라토스. 들어가겠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티에리아는 문을 열었다. 방은 어두웠지만 침대에 앉아 있는 어슴푸레한 인영까지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머리를 반쯤 움켜쥐고 있던 사내의 손이 느리게 풀어졌다. 복잡한 시선으로 그를 훑던 티에리아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뒤에서 문이 닫혔다.
"…티에리아?"
정적이 길어지기 전, 그를 부른 목소리는 감기가 걸린 사람처럼 쉬어 있었다. 티에리아는 조금 놀랐다. 지금껏 그가 알던 록온과는 어조뿐 아니라 분위기까지 달랐다.
"그래. 괜찮은 건가?"
록온은 고개만 느리게 끄덕였다. 풍성한 갈색의 머리칼을 타고 검은 장갑을 낀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티에리아는 잠시 말을 잃고 그를 응시했다. 늘상 웃으면서 농담도 잘 주고받던 여유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깨를 한참 늘어뜨리고 침묵을 지키던 록온이 무거운 한숨을 흘리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어둠 속에서도 유독 새하얗게 빛나는 얼굴이 창백했다.
"미안. 깨웠나 보네."
"…역시 아까의 비명은 당신이었나?"
"맞아."
대화가 또 끊겼다. 이럴 때는 보통 어떻게 하더라. 이런 상황에 놓인 것도 처음이거니와 티에리아는 성정상 남을 따뜻하게 위로할 줄을 몰랐다. 애초에 단순히 그의 상태를 확인할 생각이었을 뿐, 다음의 일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도 한 몫했다. 티에리아의 곤란함이 엉뚱한 짜증으로 튈 무렵, 타이밍 좋게도 록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는 한결 진정된 어조였다.
"악몽을 꿨거든. 이젠 괜찮아."
"…악몽?"
"아아. 옛날에 겪었던 일. 한동안 안 꿨었는데 말이지… 요즘 좀 피곤했었던 걸까."
록온이 재차 숨을 내뱉으며 얼굴을 문질렀다. 확실히 피로가 점철된 안색은 분위기가 안정된 지금도 파리하고 핼쓱해 보였다. 악몽의 정의를 말없이 곱씹고 있던 티에리아가 저도 모르게 한걸음 다가섰다.
"피곤하면 자야 하잖아. 약이 필요한 거라면 그 정도는 가져다줄 수 있어."
"아, 아냐. 괜찮아. 약까진 필요 없어. 눈 감고 있으면 금방 잠들겠지."
가볍게 손을 내저은 록온이 희미하게 웃었다. 평소의 티에리아라면 그쯤에서 깔끔히 물러섰겠지만, 그는 눈썹만 미묘하게 찌푸려보일 뿐이었다. 이유는 저도 정확하게 몰랐다. 하지만 아까 그의 감각을 온통 뒤흔들었던 비명의 여운이 아직도 가시질 않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의 초라하고 작아 보이는 모습도. 이런 건 싫었다. 정확하게는 그냥 두고 떠나기가 싫었다.
"그럼 바로 잘 건가? 더 필요한 건 없고?"
록온의 눈이 조금 커다래졌다. 나름 진지하게 기다리고 있던 티에리아가 공백이 길어지자 짜증 섞인 얼굴로 팔짱을 꼈다.
"말을 해. 필요한지 아닌지. 그래야 돌아가든지 뭘 해주든지 할 거 아냐."
"아, 미안. 설마 티에리아 너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거든."
"불만이라도?"
"그럴 리가. 기뻐서 그러지."
록온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모습에 겨우 어깨의 힘을 뺀 티에리아는 그제야 자신이 긴장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를 도우려다가 도리어 도움을 받아버린 꼴이었다. 자존심에 금이 가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티에리아가 휙 고개를 돌렸다.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걸 보니 이제 괜찮아졌나 보군. 난 가겠어."
"아냐. 가지 말아줘, 티에리아."
록온이 황급히 그를 말렸다. 그 어조가 꽤 다급했던 탓에 티에리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를 잡으려고 했던 모양인지, 록온은 어정쩡하게 허리를 돌린 채 그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애매하게 웃어버린 록온이 허공에 무색하게 뜬 손을 내렸다.
"미안한데, 괜찮으면 잠시만 곁에 있어줄래?"
"…언제까지?"
"내가 잠들 때까지…는 너무 긴가? 아니면 네가 내키는 만큼이라도. 부끄럽지만, 누가 곁에 있어주면 잠이 잘 올 것 같아서."
록온이 제 뺨을 조금 긁적거리다 쓰게 웃음 지었다. 이번에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말없이 그를 한참 들여다보던 티에리아가, 이내 짧게 숨을 내뱉곤 다가와 록온의 옆에 풀썩 자리잡았다. 록온의 눈이 어린애처럼 동그래졌다. 설마 정말로 들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팔짱 낀 그대로 고개만 조금 돌린 티에리아가 침대를 눈짓했다.
"기왕 잠이 깼으니 그때까지는 기다려주지. 얼른 누워라. 록온 스트라토스."
"…어, 으응. 고마워, 티에리아."
"어째 대답이 시원찮다만?"
"아닙니다. 얼른 눕겠습니다."
짐짓 비장하게 대꾸한 록온이 금세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묵묵히 계속 앉아만 있을 것 같던 티에리아가 슬쩍 몸을 당겨 그에게 다가앉았다. 록온이 일부러 몸을 들지 않아도 얼굴이 보일 거리였다. 금방 그걸 눈치챈 록온이 웃으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오늘따라 상냥하네. 눈물날 것 같아."
티에리아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록온이 먼저 여유를 되찾은 까닭일까, 티에리아의 어투도 평소의 까칠함으로 돌아와 있었다.
"흥. 오늘따라 당신이 무른 것뿐이다. 거사가 언제 진행될 지 모르는데, 마이스터가 한 명이라도 약한 꼴을 보이면 곤란해. 적어도 당신만큼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해."
"그런 것 때문이야? 뭐, 그런 점이 너답긴 하지만."
커질 듯하던 웃음이 느리게 잦아들었다. 확실히 피곤했던 모양인지, 누운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반쯤 가물거리는 그의 눈엔 졸음기가 가득했다. 흘긋 그를 돌아본 티에리아가 시선만으로 그를 훑다가 이내 팔짱을 느슨하게 풀었다. 창백했던 안색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고 호흡도 안정적이었다. 더 걱정할 이유는 없을 듯했다. 안심하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록온의 나직한 말이 그의 귀를 옭아매듯 닿았다.
"그래도 역시 다정해, 넌. 덕분에 위로 받았어."
"……."
"고맙다. 티에리아. 오래 있지 않아도 되니까 너도 돌아가서 푹 쉬어…."
점점 가늘어지던 말이 이윽고 잠잠해졌다. 떨어지지 않고 닿아 있던 시선이 거두어진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고요해진 방에 록온의 숨소리가 고르게 울려퍼졌다. 이제 방으로 돌아가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테지만, 티에리아는 어쩐지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뭐라 말로 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안고서, 석상처럼 마냥 굳어 있던 티에리아가 긴 숨을 내뱉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진작 금이 가 있던 자존심은 이제 쪼개질 듯 너덜너덜했지만 어쩐지 싫지 않았다. 위로해주고 싶었던 사람한테 위로받는 기분은.
"…이번엔 조금 쓸모가 있었던 걸까."
록온을 돌아본 티에리아가 미약하게 웃었다. 동료들 앞에서 처음으로 지어보인 미소였다. 이불을 당겨서 그에게 덮어준 티에리아가, 그를 마저 지켜보다가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닫힌 밤이 이제야 평화로웠다.
"잘 자. 록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