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내는 걸 허락해주신 지크프리트의 오너 단테님과,
파에톤의 오너 눙님에게 감사드리며
☆★명예지크토니러 바침★☆
Caption
※n차 창작된 지크토니와 그 등장인물들
지크프리트
사룡 파프닐을 쓰러트리고, 그의 힘을 흡수한 사검 발뭉을 손에 넣은 전설의 기사. 파프닐의 피를 뒤집어 써서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 불사의 몸이 되었으나, 등의 일부는 피가 묻지 않았다.
자기 희생 정신이 강하고 배려심이 깊지만 예외인 상대가 있다. 단 한 명.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나 감정을 깨닫는 일에 둔한 면이 있다. 어떤 적을 앞두고도 물러서지 않는 무모함은, 이런 자기애가 부족한 부분에서 기반한 것일지도 모른다.
왕에게 충성하며 동료를 믿고 함께하는 전형적이고 고지식한 성격. 하지만 아내 크림힐트와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다.
파에톤
별을 읽는 자의 말에 따르면, 이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되는 운명의 주인공. 정체는 이 우주와는 전혀 다른 시대에서 온 태양신의 아들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태양 마차를 몰았지만 말의 고삐를 놓치고 하늘과 땅을 불태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 후 최고신 제우스가 던진 벼락에 맞아 죽었어야 했지만,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지크프리트의 세계에 떨어져 목숨을 건졌다. 매일 지크프리트랑 투닥거리며 그를 싫어하는 듯이 굴지만…….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성격으로, 남을 구하거나 지키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이 좀 더 소중한 어린 소년. 호기심이 많고 자기 감정에 솔직하며, 이를 숨기는 일에 서툴다.
어머니가 바다의 님프로, 귀가 평범한 사람보다 뾰족한 편이다.
에스니
성별 불명, 나이 불명, 종족 불명. 목소리만 들으면 10대 중반의 중성적인 느낌이 난다. 별을 읽고 룬 마법을 구사한다. 군터에게 여러가지 조언을 해주고 지크프리트나 하겐과도 안면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하겐
지크프리트의 동료 기사. 하지만 자신보다 더 뛰어난 지크프리트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다.
크림힐트
지크프리트가 모시는 왕 군터의 여동생이자 지크프리트의 아내.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브륜힐트
군터의 아내.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군터와의 혼약은 그의 기사 지크프리트에 의해 이루어졌다. 본 정체는 전사의 혼을 발할라로 인도한다는 신의 사자 발키리.
04. 제멋대로의 소년
마차에서 떨어진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 조그만 상자 같은 공간에 매달려, 곧 지옥에 가게 될 거라고 떨었던 시간이 이젠 꿈 같았다. 파에톤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그의 세계는 새로이 눈을 뜬 침대 위에서부터 차차 넓어져갔다. 새로 배우는 글은 읽기 어려웠고, 저를 탐탁지 않게 보는 기사(지크프리트는 그를 하겐이라 불렀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그를 괴롭히던 소년들보다는 나았다. 분수에 안 맞는 태양 마차를 모는 것보다도 견디기 쉬운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고 누이들이 걱정되었지만, 파에톤은 어느 순간부터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리란 사실을 납득했다. 어쩌면 태양 마차를 멋대로 몬 벌을 받은 걸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영원한 추방이며, 혹은 그 세계에서의 죽음일지도 모른다고. 한 번 납득하고 나니 미련이 사라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슬픔에 젖거나 처지를 한탄하게 두지 않는 자극이 있었다.
“밖에 나가고 싶나?”
창틀에 기대어 있던 파에톤이 고개를 들었다. 지크프리트가 과일과 빵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들어서던 참이었다. 정말 이상한 남자였다. 덩치는 산만하게 크고 성격도 괴팍하면서, 아무 연고도 없는 자신을 구해준 데다가 지금까지 돌봐주고 있는 특이한 사람. 하지만 어쩐지 파에톤보다 그를 더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 앞에선 기계적이고 사무적으로 행동하며, 때때로 자신을 어떻게 다루든 상관없다는 듯이 구는 사내. 가끔 별장을 오래 비울 땐 마물을 홀로 토벌하러 가는 거란 듣고 파에톤은 어이없어 했다.
“그가 제우스의 아들이에요? 반인반신인가요? 아니면 벌을 받는 중이에요?”
“제우스… 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그의 부친은 지그문트 님이십니다. 그분 또한 고명한 기사님이셨죠. 인간이시고요. 벌을 받는 건 더더욱 아니고요.”
위험한 상황에, 그것도 부탁을 받고 뛰어든다고? 까닥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파에톤도 죽을 뻔한 일에 휘말리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친의 경고를 무시하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 아닌가. 스스로 택해도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게 인간의 삶이다. 그런데도 그는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태어난 ‘영웅’이라고 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죽으면 다 끝나버리는데.
“파에톤?”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불쑥 튀어나온 말은 실수였다. 그러나 주워담는 대신 파에톤은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눈을 깜빡거리던 지크프리트가 바구니를 옆에 내려놓으며 그의 곁에 걸터앉았다.
“난 쉽게 죽지 않아.”
“그건 모르는 거죠. 신이 아니면 다 죽어요. 난 신의 피를 이었는데도 죽을 뻔했는걸요.”
“그래, 너의 아버지는… 그, 태양신이라고 했던가. 태생적 불로불사라는 건 우리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지만, 너의 세계에선 신들과 그의 혈통들은 쉽게 죽지 않는다는 거겠지. 어쨌든 걱정해주는 건 알겠다. 그렇지만 나도,”
“딱히 걱정해주는 거 아니거든요!”
“그래. 제법 어려운 언어까지 구사할 수 있게 되었군. 어쨌든 나는 쉽게 죽지 않아.”
“건방져…”
“뻔뻔하다를 잘못 말한 거겠지?”
알면 됐네요. 툴툴거리며 파에톤은 창틀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쉽든 어렵든 죽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그러니까, 두렵지 않더라도 죽기 싫을 수는 있잖아요.”
지크프리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건 네가 죽기 싫은 순간을 한 번 경험했기 때문에 하는 말인가?”
“……그럴 수도 있겠네요.”
창틀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점점 느려졌다.
“…마차를 몰기 전까지는, 난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았죠. 나는 그분의 아들이니까. 분명 아버지처럼 잘해낼 거라는 자신이 있었거든요.”
“…….”
“하지만 결말은 당신도 알죠. 저는 고삐를 놓쳤고,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었어요. 사람들의 비명도, 님프들이 울부짖던 소리도, 짐승들이 날뛰고 하늘의 별들이 저를 향해 달려들던 기억도 어제 일어난 것처럼 생생해요. 아마 평생 잊을 수 없겠죠.”
무릎을 세워 앉은 파에톤의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죄책감…은 모르겠어요. 느끼는 게 맞겠지만, 그래야 하겠지만요. 전 그냥,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무서워요.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돼요. 천둥이 치는 날엔 더 그렇죠. 내가 고른 길이었는데도.”
작아지는 목소리가 떨렸다.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려던 지크프리트는, 이제 하늘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파에톤이 그저 넋두리를 늘어놓으려 화제를 고른 게 아니라는 사실도.
“당신은, 그게 무섭지 않아요?”
“…….”
“타인이 요구하는 길이에요.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요? 이러다 죽겠구나, 나의 소중한 것들과 영영 작별하겠구나… 그런 것들에 겁먹어본 적은 없나요?”
‘너는 마치 공포를 모르는 짐승 같군.’
하겐이었을까. 군터였을까. 혹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목소리였을까. 스스로가 용감무쌍과는 거리가 먼 사내라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자기 희생은 아니다. 그러나 미련은 없다. 애초에 애정을 붙일 것들이 주변에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집착하지 않는 걸지도 모르지.”
제 말이 마치 남의 것처럼 낯설었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은 지크프리트의 목에서 소리가 되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없으면 다른 영웅이 나타나 세계를 지킬 거야. 왕을 모실 유능한 기사들은 많고, 하겐도 실력이 출중하지. 크림힐트에겐 좀 미안하지만, 그녀라면 충분히 재혼할 수 있을 거야. 매력 있고 현명한 여성이니까.”
“당신의 삶의 미련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말하고 있어.”
“아니에요.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네가 뭔데 나를 규정하지?”
지크프리트는 자신이 내뱉은 거칠고 사나운 발언에 스스로 놀랐다. 파에톤은 도리어 맞싸울 것처럼 그를 노려보며 주먹을 꾹 쥐고 있었다. 왜 이 소년은 화를 내고 있는 거지. 자신이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아서? 하지만 이것 외에 더 무엇을 말할 수 있지? 왜 그래야 하지?
“당신은 규정하지 못하니까요. 그건 사는 게 아니에요. 나는요,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고 싶어서 태양 마차를 몰고 싶었던 거예요. 하지만 당신의 행동엔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것이 당신을 어떻게 증명하나요? 누구에게든 대체될 수 있는 ‘영웅’ 중 하나로서 살아간다면, 거기에 ‘지크프리트’는 어디에 있어요?”
“됐어. 이렇게까지 열 올릴 이야기가 아니야.”
“도망치지 말아요! 겁쟁이!!”
“적당히 해! 자기 하나를 증명하겠다고 사지로 뛰어든 네게 그런 행동을 안 했다고 비난받아야 하나? 어처구니가 없군!!”
무언가가 지크프리트의 뺨을 때렸다. 살갗이 찢어지거나 멍이 들 만큼의 힘도 아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지크프리트가 멍하니 시선을 내렸다. 맞은 사람은 그인데, 어째서인지 주먹을 휘두른 파에톤이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꽉 움켜쥔 주먹이 안쓰럽도록 덜덜 떨렸다.
“……파에-”
“벽에다 소리쳐도 이거보단 덜 답답하겠어요.”
“…….”
“그래요, 당신은 계속 ‘영웅’으로 살아요. 인간으로 안 남게 되어도, 어차피 미련을 모르니까 당신은 편안하겠죠. 걱정하는 사람 속이 타들어가든 염려해주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안 그래요?”
“…….”
“이렇게 스스로한테도 무책임할 거면서, 왜 날 구했어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왜, 자신의 삶에 파에톤이 미련을 갖는 것처럼 말하는지, 지크프리트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기어이 눈물이 흐르고 만 파에톤의 뺨을 보고 어째서 죄책감을 느꼈는지도. 무심코 그것을 닦아주려 손을 뻗는 순간, 파에톤은 그를 밀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복도를 마구 내달리는 발소리가 그를 거부하듯 빠르게 멀어져갔다. 어설프게 손을 든 볼썽사나운 모양새로, 지크프리트는 빈 방에 홀로 서 있었다.
뜨거운 해가 만든 긴 그림자가 남겨진 사내를 짓누르듯 덮었다.
*
웃긴 일이다. 무작정 바깥으로 뛰쳐나갔지만, 파에톤은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지크프리트를 멋대로 가정하고, 화를 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한다는 지크프리트의 말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의 삶을 전부 알지도 못하고, 만난지는 채 반 년도 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말이 안 통한 채로 싸우기만 했었으니까. 자신이 그보다 나은 게 뭐가 있는가? 그는 파에톤의 생명의 은인이었고, 많은 사람들을 구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건 무수한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린 파에톤의 오만함보다 훨씬 나았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버렸을까.
무슨 자격이 있어서?
‘……하지만,’
한참을 달리던 파에톤의 걸음이 천천히 멈추었다. 겨우 눈물을 닦고 나서 올려다본 하늘은 지나치게 눈부셨다. 마치 그를 단죄하듯 내리쬐는 열기를 파에톤은 견딜 수 없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파에톤은 비틀거리며 그늘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치만,’
에스니와 함께 있던 지크프리트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를 뒤에서 지켜보던, 하겐의 불신과 질시어린 눈초리를 떠올렸다. 만인의 영웅이라고, 누구도 그를 대적할 수 없을 거라고 에스니는 말했지만 파에톤은 믿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를 포기한 사람처럼 고독하고 무방비해보였다. 누가 언제 돌을 던지지 않을지 경계하고, 그를 비웃거나 멸시하는 눈빛에 익숙했던 파에톤은 그저 방관하는 지크프리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젠가 당신을 죽게 만들지도 모르는데.’
‘왜 자기 자신은 지키지 않는 거야.’
증명하지 않으면 위협당한다.
강해지지 않으면 버려진다.
태양 마차를 끈다는 무모한 짓을 선택한 까닭은,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말라고 과시하고 싶어서. 나를 인정하고, 함부로 다루거나 해치지 말아달라고 외치고 싶어서. 그 마음과 결정엔 지금도 후회는 없었다. 비록 분수에 맞지 않는 도전을 해서 사지에 떨어졌다 해도, 어떤 방식이 있었다면 그것을 해내려 애썼을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했을 터다. 그것이 파에톤의 생존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도,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어서.
당신을 샘내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떳떳하게 화를 내고 싸워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헉… 헉……”
얼마나 멀리 달려온 것인지,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나무도, 건물 하나도 보이지 않는 평원이었다. 파에톤은 힘겹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대로 쪼그려앉았다. 등이 뜨거웠다. 또 멋대로 군 자신을 질책하는 것 같았다. 앉아서 숨을 몰아쉬던 파에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찾았다.”
문득, 따끔하게 쏟아지던 열기가 가셨다. 안식 같은 그늘이 그를 덮었다.
“……?”
올려다본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급하게 뛰어다닌 사람처럼 숨이 가빴다. 해를 완전히 가리고 선 남자는, 하얀 얼굴 가득 땀을 흘리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발이, 왜 이렇게 빠른 거냐. 마차를 몰았다더니, 직접 끌었다고 해도 믿겠군.”
한숨과 함께 토로한 지크프리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커다란 등이 여전히 태양으로부터 그를 지켜주듯 꼿꼿했다.
“…너희 말로, 사과하는 말은 뭐지?”
“…? 사과…요?”
“그래. 미안함을 표현할 때 하는 말… 이라고 해야 하나.”
갑자기 그걸 왜 묻는 건가.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파에톤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미안해요.”
“…미아내오?”
“미-안. 해, 요.”
“미-안. 아아. 이렇게 발음하는거군.”
두어 번 중얼거려보던 지크프리트가 문득 진중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파에톤이 어깨를 반사적으로 움츠렸다. 왜? 사과하라고 시키려고? 아니,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야겠지. 이번엔 자기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 아니, 그런 말하기 전에 미리……
“미안해요, 파에톤.”
미안하다고…?
“네, 당신이 미안… ……응? 뭐라고요?”
파에톤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던 지크프리트가 마저 말을 이었다.
“…네가 뭘 말하려고 했는진 알아. 주변에서도 비슷한 말을 자주 했었으니까. …그런데도 너한테 화를 낸 건, 확실히 내 잘못이다. 너도 걱정해서 말해준 건데.”
“…….”
“하지만… 난 나를 아끼는 방법을 몰라. 그게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어. 날 설득시켜보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너는….”
부끄러움이라도 타는 듯, 자꾸만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천천히 멈추었다.
“그래, 너는 나랑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지. 그래서 나와 전혀 다른 시선에서 나를 봐주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러니.”
지크프리트가 손을 뻗었다.
“알려주지 않겠나. ‘네가 아는 나’에 대해서.”
“…….”
“나를 아끼는 방법을,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나도 볼 수 있도록.”
파에톤은 처음 그와 약속을 했던 날을 떠올렸다. 어쩐지 눈가가 뜨거웠지만, 그가 정말 바보처럼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차마 울 수 없었다. 파에톤은 목구멍까지 치민 무언가를 겨우겨우 삼키고 나서야 손을 내밀었다. 처음 귀를 막아주었던 그날과 같이 커다랗고 따뜻한 온기였다. 고삐 자국이 남은 손바닥을 전부 덮고도 남을 만큼.
“……응. 좋아요.”
“네가 아는 언어도 좀 더 알려줬으면 한다. 네가 말이 빨라지면 나는 하나도 못 알아들으니 불공평하지 않나.”
풋, 파에톤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지크프리트의 표정도 부드러워졌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이미 익숙해진 변화였기에.
“그건 고민 좀 해보고요. 나한테 좋은 거잖아요.”
“요녀석… 자꾸 그러면 말도 더 안 가르쳐줄 거다.”
“이미 다 배웠거든요? 바보. 멍청이 지크… 아얏! 폭력 반대!”
“음. 확실히 언어 구사력은 너무 많이 늘었군. 도로 뺏어오든가 해야지.”
“아씨, 나보다 어른이 이렇게 치사하게 굴 거예요?”
유치한 말다툼이 이어지는 하늘을 구름이 조용히 덮었다. 다시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